가난한 사람들의 기적, 희망의 인문학
2년 전, 우리 반의 한 아이는 나의 안내로 방학을 이용해 역사기행을 다녀왔다. 그런데 그 아이가 적어온 기행문을 보고 무척 놀라고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그건 그 아이를 인솔했던 어느 젊은 교사가 무심코 내뱉었던 말 때문이었다. 여행을 떠나려 부산역으로 가던 그 아이는 근처에서 한 장애인이 땅 바닥에 바퀴달린 판자에 엎드려 돈을 구걸하던 장면을 보았다. 꽤나 한참 그 장면을 지켜보던 우리 반 아이에게 인솔 교사는 이런 말을 던졌다.
“너도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나중에 저렇게 될 수도 있어.”
그 말을 들은 우리 반 아이는 그 말이 기억에 남았는지 그대로 글로 옮겨 놓았다. 나중에 나는 그 글을 읽고 아이와 잠시 얘기 해 본 기억이 난다. ‘과연 가난은 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생각해 보면, ‘가난’을 두고 우리는 이런 식의 말을 아무 생각 없이 편하게 얘기해 왔던 것 같다. 나 역시 부모님께 공부를 못하면 가난하게 산다고 들었고 그 협박(?) 아닌 협박을 진실로 알아듣고 가난이 무언지도 모르는 나는 그저 열심히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이런 말들은 가난의 역사 속에서 계층상승 수단으로 ‘학력’과 ‘학연’이 거의 절대적이었던 개발독재 사회에서는 충분히 나올 수 있는 말들이었다.
아마도 우리 반 아이에게 무심코 던진 그 젊은 교사도 어릴 때 어른들로부터 그런 말을 듣고 자랐을 것이다. 달리 생각해 보면, 오랫동안 경쟁에 익숙해 왔고 또 승리를 해 원하던 취업을 할 수 있었던 그 젊은 교사에게 보인 빈민의 모습은 어쩌면 공부를 못한 실패자(?)가 겪어야 할 당연한 삶의 한 모습으로 다가왔을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우리 사회에서 흔히 내뱉을 수 있는 상식적인 말과 풍경이라고 해서 그것이 진실일 수는 없다. 97년 외환위기 뒤, 우리 사회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직장에서 일찍 나와야 했고 그 후유증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이제 ‘가난’은 단순히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부지런함과 게으름의 통속적인 개념을 떠나 깊이 생각하여 새롭게 바라봐야 하는 개념으로 다가서고 있다. 학력인플레 속에서 청년 실업은 늘어만 가고 양극화로 부의 집중이 한쪽으로 몰려 경제적 문화적 재생산구조가 고착화되고 있는 요즘, 가난은 더 이상 개인의 문제로만 보기에는 그 한계가 뚜렷하다.
‘가난’ 바로 보기
가난! 우리는 지금껏 이 ‘가난’이라는 것을 ‘하면 된다!’는 개발독재시대의 극복대상으로 보아왔다. 그래서 ‘가난’은 마치 일하지 않는 이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져 왔던 게 사실이다. 아직도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들은 너무도 쉽게 가난한 이들을 무능력하고 일하지 않는 게으름뱅이쯤으로 보고 싶어 한다. 하지만 잠시만이라도 우리를 돌아보면, 이제 우리는 개발독재시대를 넘어 미국식 자본주의의 확대라는 신자유주의의 그늘 아래 살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우리 시대에서 가난은 극복할 수 있는 부끄러움 정도를 넘어서 벗어날 가능성이 지극히 낮은 대물림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 양극화의 시대에서 가난은 누구에게든 다가올 가능성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고 한 번 가난의 늪으로 떨어지게 되면 다시는 헤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에 두려워하고 있다. 이런 불안감은 더욱더 우리 사회 구성원들을 끊임없는 경쟁이데올로기의 노예로 만들어 버리고 있다. 가난! 그 가난의 원인은 무엇일까? 오랫동안 가난의 재생산구조를 필연적으로 안고 있던 자본주의 국가들은 여러 제도와 정책을 마련해 가난의 극복을 위해 나름의 노력을 해왔다. 하지만 결과는 그리 썩 좋지 않았다. 이제 자본주의사회의 가난은 대물림을 넘어 계급화로 진화하고 있다. 이런 상황은 더욱 지속될 것으로 보이고 따라서 사회불안은 깊어지고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은 더욱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과연 가난의 악순환을 풀어줄 열쇠는 없을까?
가난한 사람들의 삶 속에 존재하는 무력은 다른 종류의 해독제를 필요로 한다. 그 안에 노동이 포함되기는 한다. 하지만 겉보기에는 제한이 없고 지나치게 희망적이지만 실상은 착취의 요소를 감추고 있는 ‘노동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게으름이나 나태함이 아니라 무력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무력에 대한 해독제가 발견된다면 노동은 해야 할 일이 있을 때 자연스레 뒤따르게 될 것이다.(희망의 인문학, 117쪽)
낯선 이방인
2006년 1월 17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 웬 낯선 이방인이 나타났다. 그의 이름은 얼 쇼리스(Earl Shorris). 그는 경기문화재단의 초청으로 열린 국제 세미나 ‘가난한 이들을 위한 희망수업’에 참석하고 있었다. 이제 건강이 좋지 않아 보인데다 나이까지 일흔을 바라보던 그가 굳이 멀리 미국에서 이곳 한국까지 불편한 몸을 이끌고 어렵게 찾아온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그가 가난을 극복할 새로운 희망과 대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늘 소개할 책이 바로 그의 자서전이기도 한,《희망의 인문학 - 클레맨트 코스 기적을 만들다, 원제: Riches for the Poor - The Clements Course in the Humanities》이다. 과연 그에게 어떤 희망과 대안이 있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가 말하는 희망과 대안은 바로 ‘인문학’이다. 부와 권력을 쥔 사람들과 인문학을 연구하는 학자의 전유물로 여겨져 왔던 인문학이 바로 가난에서 해방시켜줄 열쇠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얼 쇼리스는 인문학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 영향을 끼치는지, 왜 가난한 사람들도 인문학이라는 ‘부(富)’를 누릴 권리가 있는 것인지,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인문학을 가르치는 일이 왜 전체 사회에도 좋은 일이 되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려면 가난을 바라보는 기존의 관점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 한다. 그는 현대 사회의 목표는 부유함이 아니라 불평등이라 규정한다. 아울러 미국식 자본주의 사회에서 평등은 승자와 패자의 게임을 정당화하고 그 결과가 뻔히 정해져 있다는 것을 숨김으로써 승자에게는 자부심을, 패자에게는 수치심을 안겨주고 있다고 냉정하게 비판한다. 따라서 그에게 빈곤은 물질적 결핍과 숱한 도덕적 좌절이 겹쳐져 만들어진 복합성 그 자체다.
무력의 포위
얼 쇼리스는 빈민들이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근본원인을 ‘무력의 포위’에서 찾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무력(force)은 폭력(violence)과는 다른 ‘힘(power)’하고도 다른 대단히 정치적인 개념으로 등장한다. 그는 빈민들에게 제공되는 최저 생계를 위한 물질적인 지원과 이른바 기능만을 익혀 생존수단으로 삼을 ‘훈련’만으로는 결코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그 까닭은 이미 가난한 사람들은 그들을 둘러싼 무력들로 포위되어 있어 스스로 좌절하고 포기하고 굴종하는데 익숙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무력은 바로 그런 점에서 매우 무서운 것이며 현대사회는 바로 그 무력으로 사회구조를 재생산하고 있어 그 무력의 구조를 깨뜨릴 눈과 힘을 주는 일이 바로 인문학이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얼 쇼리스에게 인문학은 지극히 비정치적이었던 가난한 이들을 정치적인 인간으로 복원시키는 희망의 열쇠가 된다.
포위해 들어오는 무력들은 빈민이라는 전체 집단에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 개개인에게 영향을 준다. 심지어 빈민들의 가족 단위로 포위하는 것도 아니라 한 번에 한 사람씩 포위해 들어온다. 포위망 안에 살아가는 모든 이들은 이렇게 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무력의 무게는 발밑에 깔린 유리잔처럼 빈민집단을 산산조각 내고 가족, 지역사회, 사회조직의 파편들을 무기력한 개인생활로 몰아냄으로써 그들을 분열시킨다.(같은 책,94쪽)
가난을 이렇게 광범위한 무력의 포위 속에서 개인을 무력화시키는 개념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우리는 이제껏 가난한 이들을 위한 수많은 복지정책이 왜 그들에게 근본적인 도움이 되지 못했던 것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 특히 미국은 가난한 이들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행․ 재정적으로 헤드스타트 운동과 바우처 시스템까지 도입하며 일정한 성과와 실패를 거듭했지만 양극화와 인종차별이라는 오명을 벗어던지기 못하고 있다. 그는 미국사회를 비판하는 좌파들조차 가난을 벗어날 수 있는 한 방편으로 ‘훈련’이상의 그 무엇을 생각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는 가난한 이들에게 인문학을 통해 삶의 ‘성찰’의 기회를 제공해야한다고 주장한다. 단순한 ‘훈련’만으로는 절대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며 인문학으로 무력의 포위망을 벗어나 진정한 민주사회의 정치인으로 스스로를 거듭나게 했을 때 비로소 빈민에게 가난은 극복할 수 있는 실체로 다가선다고 말한다.
감옥에서 얻은 영감(靈感)
사실, 얼 쇼리스가 인문학으로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12년 전 ‘가난’에 대한 책을 쓰기 위해 취재 중이던 그는 뉴욕의 한 교도소에서 살인 사건으로 8년째 복역 중이면서 대학과정을 밟고 있었던 비니스라는 에이즈에 걸려 고통을 받고 있기도 했던 여죄수와 마주 앉았다. 그런데 바로 이 여성이 ‘사람들은 왜 가난한 것 같나요?’라는 얼 쇼리스의 갑작스런 질문에 클레멘트 코스에 대한 영감을 불러일으킨 결정적인 대답을 준다. 아쉽게도 그녀는 감옥에서 석사과정까지 마쳤지만 에이즈로 끝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그녀와 만나 나눈 일화를 이곳에 줄여 옮겨 본다.
그녀는 한동안 경멸하듯이 얼 쇼리스를 노려보면서 입을 꽉 다물고 있었다. 그리고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 문제는 아이들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시내 중심가 사람들의 정신적 삶(the moral life of downtown)’을 가르쳐야 합니다. 가르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얼 선생님. 그 애들은 연극이나 박물관, 음악회, 강연회 등에 데리고 다녀주세요. 그러면 그 애들은 그런 곳에서 ’시내 중심가 사람들의 정신적 삶‘을 배우게 될 겁니다. 그렇게 하면 그 애들은 결코 더는 가난하지 않을 거예요.”
“무슨 뜻인지……?”
“제가 말한 그대로예요. 길거리에 방치된 그 애들에게 도덕적 대안이 필요하단 말이에요.”
가난의 이유에 대한 비니스의 대답 속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진짜 이유는 바로 ‘가난한 사람들을 움직일 수는 없기 때문’이라는 현실 진단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진단은 거꾸로 그들만 움직일 수 있다면 가난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는 암시가 된다. 즉, 자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비니스는 직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을 그녀는 ‘시내 중심가 사람들의 정신적 삶’이라는 말로 표현했던 것이다. ……(중략)…… 비니스는 고대 그리스에서 정치가 탄생했던 과정과 똑같은 길을 걸어 왔다. 그녀는 성찰적으로 사고하는 방법을 배웠다. 이것은 이후 계속된 대화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었는데, 그녀가 말한 ‘시내 중심가 사람들의 정신적 삶’은 바로 인문학을 의미했던 것이다. 인문학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자연의 경이로움을 제대로 경험하게 위해 자연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자연을 관조하기 시작한 이래로 줄곧 세상 사람들의 성찰적 사고를 가능하도록 해준 근본적인 원천으로 기능해왔던 것이다.(같은 책, 167-173쪽)
험난한 클레멘트 코스
이러한 만남과 성찰의 계기로 얼 쇼리스는 본격적으로 클레멘트 코스라는 이름을 달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인문학을 준비했다. 하지만 그 과정은 험난하기만 했다. 가난한 이들이 인문학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줄 전문 강사를 구하는 일은 그 자체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배운 것 없는 가난한 이들에게 인문학이라는 학문을 가르치는 것부터 이해하지 못하고 비아냥거리는 이들과 싸워야 했다. 더불어 배움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한 가난한 이들을 배움의 장소로 끌어오는 일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난과 폭력과 질병 속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그들이 차비도 없는 그들이 배움의 장소로 나와 꾸준히 일정한 과정을 이수한다는 일은 일종의 기적과도 같았다. 하지만 얼 쇼리스의 헌신적인 노력은 차츰 빛을 보게 되었고 전 세계적으로 클레멘트 코스는 번지기 시작했다.
클레멘트 코스는 현재 북미 호주 아시아 3개 대륙 5개 도시에서 53개 코스가 운영된다. 11년간 전 세계에서 빈민 4000여 명이 그의 코스를 졸업했고 최근엔 한해 신입생이 1200여 명에 이른다. 국내에서도 ‘노숙자 다시서기 지원센터’가 클레멘트 코스를 도입해 지난해부터 노숙인에게 인문학을 가르치는 성프란시스 대학을 운영하고 있는데 지난 학기엔 17명의 노숙자가 수료했다. 하지만 뉴욕에서 첫 코스를 시작할 때만 해도 그의 시도는 “미친 짓”으로 불렸다. 재단들에 후원을 요청할 때마다 “빈민들에게 인문학 교육이라니, 말도 안 된다”는 응답이 돌아왔다. 사재를 털어 문학 역사 등을 가르칠 교수들의 강의료를 마련한 쇼리스 씨는 약물중독자 재활센터 등을 돌며 약물중독자 매춘부 노숙자 등 31명의 학생을 모았다.
“겨우 글만 읽을 줄 알던 학생들이 함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읽었어요. 그리스 비극 ‘안티고네’를 읽을 때 학생들은 가족과 전통의 법도와 국가의 법이 서로 충돌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나보다 더 잘 이해했습니다. 나를 포함한 교수들이 더 많이 배웠어요.”
첫 1년 코스가 끝났을 때 31명 중 17명이 수료증을 받았고 그중 14명은 뉴욕 바드대의 심사를 거쳐 학점을 취득했다. 이들 중 2명은 나중에 치과의사가 됐고 전과자인 한 여성은 약물중독자 재활센터의 상담실장이 됐다. 쇼리스 씨는 빈민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다녔다. 교수들의 강의를 녹화해 뉴욕의 교도소에서 방영했다. 시카고에서는 노숙자 쉼터에서 신문 범죄기사를 즐겨 읽는 여성들에게 헤밍웨이의 소설 ‘살인청부업자’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읽게 했다.
“폭력적 내용을 좋아하는 사람에겐 그리스 비극을 읽혔죠. 그리스 비극만큼 폭력적인 내용도 없잖아요(웃음). 이 과정에서 학생들은 문학작품이 주는 감동의 맛을 알기 시작했고 인문학에서 풍요로움을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어요.”(동아일보, 2006.1.18)
학문의 언어가 아닌 사회 언어로
클레멘트 코스를 한국에 소개하고 이론을 알리는데 가장 앞장선 성공회대 고병헌 교수는 사회개혁을 하겠다는 진보진영도 ‘훈련’이라는 패러다임 아래 갇혀 있다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교육계조차 ‘교사훈련과정’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나. 소외계층에게 훈련의 기회를 줘서 성공한 경우는 거의 없다. 더 이상 소외계층을 속이지 말자. 사실 지금 인문학은 학문 영역에서 독점하고 있다. 인문학은 사람의 삶의 결을 조직적이고 과학적으로 이야기 하는 거다. 인문학은 더 이상 학문의 언어로 남아있어서는 안되며 내 존재의 의의를 찾고 자존심을 갖고 성찰적 사고를 하는 역할을 해주어야 한다. 이런 인문학을 위기 어쩌고 하면서 오히려 장애가 되고 있다. 우리 스스로부터 인문학에 대한 오해를 없애고 인문학이라는 용어를 학자들의 언어가 아니라 사회 언어로 빨리 찾아와야 한다.(우리교육, 2007년 1월호, 134쪽).
인문학이라는 개념은 라틴어의 후마니타스(humanitas)에서 전해졌다고 한다. 문자 그래도 해석하면 ‘인간다움’이라고 한다. 이제껏 우리는 인문학하면 딱딱하고 재미없는 학문으로 인식해 왔다. 어쩌면 그것은 인문학이 학자들만의 언어로 남아있었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인문학이 사람들의 삶과 괴리되고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지 못하면서 이미 인문학은 오래 전부터 죽지 않았을까. 새삼스레 인문학의 위기를 거론하며 출판시장을 걱정하고 대학 교육과정에 교양과목이 사라진다며 개탄하는 이른바 학자들의 엄살(?)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은 까닭을 나는 이 책을 통해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인문학과 우리 교육
인문학하면 대학 교육과정을 떠 올린다. 하지만 진정 인간다움을 이야기하는 인문학은 우리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만나야 하는 과정이며 언어이어야 한다.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몸으로 배우고 익히며 아름다운 인간사회의 이상을 꿈꿔야 하는 일은 20세가 넘은 청년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어릴 때부터 인간을 위한 더 나은 사회와 민주사회의 이상을 꿈꾸게 해야 하는 일이 바로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이고 인문학의 역할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네 교육풍토에서 요원한 일이다. 밤늦게까지 아니 밤을 새워가며 기능적인 점수 따기 학습과 영어와 같은 외국어 공부에 빠져 있는 우리의 아이들이 교과서 속 인문학 과정을 자신의 삶으로 끌어내기는 무척 어렵다. 심지어 초등학교 아이들조차 입시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일제고사의 부활과 입시 자본시장과 보수언론의 바람 불기로 초등논술의 거품이 잔뜩 끼어 있는 형국에서 인문학이 초등과정에 끼어들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시를 공부하지만 왜 공부하는지 모르고 문학을 공부하지만 왜 문학을 공부해야 하는지 모르고, 삶의 철학을 배우지만 우리 아이들은 왜 철학이 자신의 삶과 이어져 있는지를 모른다. 그것은 바로 그들 모두가 시험지 위의 문제와 답안에만 갇혀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교사들도 시험지 위에서 양으로 측정 받고 있는 죽은 인문학을 살아있는 인문학으로 끌어내 아이들에게 돌려주는 일을 해야 한다. 국어시간에도 수학시간에도 사회시간에도 과학시간에도 음악시간에도 미술시간에도 우리는 교과에서 아이들 삶과 이어지는 인문학으로 아이들 삶을 살려내야 한다. 왜 우리가 살아야 하는지, 왜 우리가 살고 있는지, 사람들이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까닭이 무엇인지 우리 아이들은 교과 속에 숨어 있는 아니 죽어 있는 인문학 과정을 제대로 배워야 할 권리가 있다. 그 권리를 찾아주기 위해 우리 교사들이 노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교사들은 쉽게 아이들에게 활용할 기법에만 매몰돼서는 안 될 것이다. 수업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끊임없이 의문을 던지고 실천을 하며, 교육과 사회의 관계를 어떻게 해석하고 실천할 것인지, 다양한 교육철학을 공부하면서 자신의 교육철학을 만들어가는 일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고민하고 실천하는 일만이 곧 우리 아이들과 교육을 바로 세우는 일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문학은 가난한 이들뿐만 아니라 우리 아이들과 우리 교사들에게도 매우 필요하다.
위험한 추론
빈민들은 정치를 배우는 것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다. 하지만 정치를 배우는 것은 역시 궁극적으로 빈민들이 위험스러워지는 길일 수 있다.
만약 정치를 배운 빈민들이 위험해지지 않는다면, 만약 그들이 평화와 안락을 누리면서 겸손하게 생존하길 선택한다면 확언컨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우리의 목표는 빈곤을 종식시키고, 가난의 서러움을 역사와 낭만의 영역으로 넘겨주고 빈민들을 시민으로 만드는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정치는 빈민들을 위험한 사람들로 만들 것이다. 타자의 행복을 보장하는 일은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목표다. 그리고 그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방법으로써 민주주의는 모든 것을 무릅쓸 만한 가치가 있는 위험이다.(같은 책, 424-426쪽)
얼 쇼리스는 스스로를 좌파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기존의 좌파적인 사고로 빈민을 정치화 시키는 것은 매우 경계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번져 나가는 클레멘트 코스 가운데에는 좌파적 시각으로 빈민들을 정치화 시키려는 교육과정이 있음을 그도 알고 있다. 더불어 그 과정 또한 그 사회의 환경에 기반을 둔 교육과정이기에 받아들이려 하고 있다. 하지만 얼 쇼리스가 인문학을 통해 빈민들에게 가르치려 하는 일은 정치적 선동교육을 하는 것이 아니라 빈민들이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하여 궁극적으로 사회 전체적인 빈곤을 스스로 깨치는 건강한 민주 시민이 되는 것에 있다. 그럼에도 얼 쇼리스는 그의 책 마지막 부분에 위험한 추론이라는 소제목을 달고 빈민들의 정치화는 어쩔 수 없는 숙명일 것이라는 얘기를 한다. 빈민들의 삶이 권력과 부를 가진 자들의 포위망에 갇혀 있었기에 그 삶을 박차고 나오는 것 자체가 위험한 일일 것이라는 것이다. 다만 그 위험이 타자의 행복과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것이기에 그 위험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닐까라고 얘기하고 있는 듯하다. 이는 마치 ‘억눌린 자들의 교육학(페다고지)’를 쓴 세계적인 교육학자 파울로 프레이리의 관점과 매우 닮아 있다. 프레이리 또한 브라질 빈민들의 정치적 삶에 관심이 높았다. 그 또한 빈민들이 자신의 삶을 개선시키기 위해서는 배워야 하고 그 배움은 사회적인 것이기에 위험하기도 하지만 유일한 대안이며 희망일 수밖에 없다는 정치적인 결론을 내린다.
서로 쉽게 사랑하는 사회
나는 프레이리의 글 가운데 ‘서로 쉽게 사랑하는 사회’를 만들고 싶다는 부분을 매우 좋아한다. 우리 사회는 권력과 자본의 벽 때문에 사람들이 서로를 쉽게 사랑하며 살지 못하는 게 사실이다. 가난한 이들은 더욱 그러할 것이다. 똑 같은 사람들이지만 공평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채 태어나 불공평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알고 살아야 하는 현실에서 우리는 서로 쉽게 사랑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 그렇다고 해서 억눌린 자들과 억압한 자들의 위치를 바꾼다고 해서 새로운 세상이 만들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 프레이리의 생각이다. 가장 이상적인 사회는 억압이 없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서로에 대한 억압이 사라질 때 우리는 비로소 쉽게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
이곳 김해에는 김해 문화의 전당이라는 곳이 있다. 작은 도시에 꽤 큰 규모의 문화시설이라 김해시민들은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이곳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 가운데에는 무료로 아침에 주부들을 대상으로 클래식을 감상할 수 있는 코너를 마련해 큰 호응을 얻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곳을 찾는 주부들은 빈민들이 아니다.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맞벌이 부부나 빈민들이 아침에 그곳에 와서 새로운 문화를 만나기란 무척 힘들다. 아침 일찍 나가 밤 11시 넘어서야 잔업을 마치고 들어오는 지난 해 우리 반 아이의 부모들의 삶을 보며 많은 사람들이 서로 쉽게 사랑하기에는 넘어서야 하는 벽들이 너무나 많다. 우리는 안정된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함께 나누는 문화공간과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그 둘 사이에 벌어진 벽은 언젠가 무너져 서로를 다치게 하거나 심지어 죽음으로 내 몰지 모른다. 우리는 서로 쉽게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 사람들이 서로 쉽게 사랑하는 법이 인문학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더불어 ‘성찰’이라는 낱말을 끊임없이 되새겨도 보았다. 궁극적으로 ‘성찰’이 개인의 안녕에만 머무는 것은 아니었다. 진정한 ‘성찰’은 타인의 행복과 관계있음도 알게 됐다. 인문학의 가치가 학문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것에 더욱 매력을 느낀다. 사람들이 서로 쉽게 사랑하며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인문학을 우리 곁으로 끌어내는데 많은 사람들이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 같다. 바로 나부터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끝으로 이 책에 대한 신영복 교수님의 생각을 옮겨와 본다. 지루했던 독후감의 끝을 예쁘게 잘 마무리해 줄 것 같아서다.
희망의 인문학과 더불어 행복의 인문학을 꿈꾸며…….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역경을 견디게 하는 힘은 어디서 오는가? 가난한 사람에게 필요한 부(富)란 무엇인가? 오늘날과 같은 신자유주의적 환경에서 이러한 질문은 빗나간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책은 바로 이러한 물음에 대한 가장 근원적인 답변이라 할 수 있다. 가난한 이들에게 인문학 수업은 더 이상 부질없는 이야기가 아니다. 자신을 성찰하고 자기의 이유로 살아가게 하는 근원적인 힘이 바로 인문학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저자는 자신의 실천적 경험을 통하여 펼쳐 보이고 있다. 인간으로서 삶과 가치에 대한 자각은 최하층 빈민들보다 더 많은 것을 잃고 있는 바로 우리들 자신의 과제이기도 하다. -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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