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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홍세화의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을 읽고....

갈돕선생 2005. 12. 29. 22:32

홍세화 선생님의 책 두권,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와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를 읽고 난 뒤의 감흥때문에, 그리고 그의 강연을 오프라인과 온라인으로 두 번에 걸쳐 듣고, 한겨레 신문을 통해 그의 칼럼을 읽으면서, 그리고 MBC 100분 토론에 당당히 자신이 민주노동당의 당원임을 밝히고, 권영길후보 지지를 할 때 나는 이미 그의 팬이 되고 말았다.

또 그가 클래식을 좋아한다는 것만 빼고, '지금은 마로니에....'라는 가사가 나오는 옛 가요를 좋아하고, 끊을락 말락 하면서도 담배를 피워대고, 술은 잘 못하지만 빼갈은 좋아하며, 비를 무척 좋아한다는 그와 나의 정서적 유대감이 나를 더욱 더 그의 팬이 되게 했다. 더구나 그의 옆에서 술을 나누며 몇 마디 건네고 주고 받았던 잠시동안의 만남이 더욱 더 그에 대한 애착을 가지게 했다.

그러던 그가 잠시 노무현을 지지하는 한겨레의 심기를 거슬려 잠시 동안 징계를 먹은 후, 선거가 끝난지 며칠 뒤 한겨레 신문광고란에는 그의 새 책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에 대한 광고가 지금까지도 대대적으로 게재기 되고 있고, 며칠 전 MBC 수요일 새벽 1시에 방영되는 책소개 프로그램의 첫 책으로 등장하고 본인의 인터뷰까지 등장하는 등 그에 대한 직간접의 홍보가 이처럼 집중적으로 됐던 적이 있었나 싶다. 이 정도의 관심이면, 이 책을 구입하여 읽을 명분은 충분히 되지 않았나 싶다.

우선 이 책의 전체 내용을 훑어보면, 글쎄 나에겐 그다지 색다른 내용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그의 논조와 그의 글을 책이나 신문지상을 통해서 접해 본 나로서는 그 내용들이 책으로 나왔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의 대부분이 전에 책에 썼던 내용을 다시 인용하여 확장했거나, 신문지상이나 강좌에서 이미 수차례 언급했던 내용이어서 어떤 이는 별 것 아니라, 생각할 지 모르겠다. 하지만, 하루 하루 잊혀져가는 말과 글이 이렇게 책형태로 발간됐을 때는 사뭇 다른 힘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아는 이에게는 이 책의 가치를 그렇게 쉽게 단정짓지는 못할 것 같다.

우선 홍세화는 프랑스의 세계적인 철학자이자 문화인류학자이며 교육학자, 그리고 노동자 계급을 위해 헌진적으로 투쟁에 앞장섰던 지성인 중의 지성인 피에르 부르디외가 썼던 '국가귀족'이라는 말을 빌어 우리 나라 전반에 걸쳐 학연, 지연, 혈연, 그리고 자본으로 똘똘뭉쳐 권력화하고 있는 이들을 '사회귀족'이라고 칭하며 그들을 실랄하게 비판하는데서 시작하고 있다.

이 책은 줄곧 자신의 망명지였던 프랑스 사회의 거울로 우리나라를 비춰보는데, 프랑스의 귀족은 소수에 불과하며 그 소수인 국가귀족은 나라의 혜택을 받고 있는 특수계층임을 스스로 자각하고 이른바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는 반면, 우리나라의 사회귀족들은 이러한 사회적 책임감은 도외시 한 채, 그동안의 배신과 반역의 역사에서 비춰지듯 권력을 침탈하고 민중을 착취하며, 그들만의 세력확장을 통해 요새건설을 추진해 왔던 터라 애시당초 그들에게서 사회적 책임은 없었고 오직 힘의 논리만이 지배하는 사회를 구축하고 있음을 실랄하게 지적하고 있다.

한편, 홍세화가 더욱 분노하는 것은 이 뻔뻔하고 위선에 가득찬 사회귀족들에 빌붙거나 아무런 사상도 없이 지성인임네 행세하고 다니는 이른바 이시대의 지성인이 행동이었다. 특히 조선일보를 비롯한 거대 극우-수구언론의 힘에 기대어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대는 그들(이문열, 박완서, 김용택, 신경림 등)을 보며 비애를 느끼지 않을 수 없음을 토로하고 있다.

이어 두번째 장에서 그는 비상식적인 사회의 점잖은 지식인들의 실명을 직접 거명하면서 그들이 갖고 있는 지성과 지식의 층의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가를 드러내 보이려 보이려 하고 있다. 나아가 그들의 밥줄이 되고 잇는 조선일보의 극우적인 행태를 실례를 토대로 검증하고 그들의 뻔뻔함과 위선이 어떠한 조작에 근거하고 있는지를 까발기고 있다.

나아가 익명으로 가장한 어설픈 비판으로서 우리 사회의 변화를 꾀하려는 우리 사회의 한계를 지적하고 비상식적이고 앵똘랑스한 집단에 대해서는 과감한 실명비판을 통한 토론의 문화를 활성화시켜 그들의 위선과 뻔뻔함을 세상에 들어내게 하고 앵똘랑스한 그들의 문화에 과감하게 우리 자신들도 앵똘랑스한 자세로 맞받아쳐야 더 이상 패배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음을 얘기하고 있다. 이에 그는 이 시대의 악역을 맡고자 선언하기에 이른다. 그는 얘기한다. "단호하지 않을 때 한국 사회가 요구하는 일상 속에서 무뎌질 위험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악역자의 칼날을 일상적으로 벼리지 않으면 안된다'고.

세번째 장에서는 빠리 통신이라는 주제를 통해 프랑스 사회를 통해 우리 사회에 모습을 직접 비춰주고 있다. 그의 두번째 책에서 잠시 언급된 사항들이 비교적 구체적으로 설명보여지고 있는데, 8시간의 노동과 5일제 근무, 주택정책, 교육비, 사상의 자유들은 비단 그들이 이른바 선진국이어서가 아니라, 민주 공화국이라는 공화주의에 철저히 입각하여 생활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소리 높여 외친다.

그러면서 우리 한국 헌법 1조에 명시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명시가 얼마나 허울뿐인 용어인지 다시 한 번 입을 열고 있다. 공화 즉 공익을 목적으로 하는 사회로서 평등하고 자유로운 사람들에게 법에 의한 권위가 행사되는 국가를 일컫는 이 말이 우리 사회에서 최소한으로도 적용되지 않고 그 공화라는 개념조차 얘기되지 않는 면을 비판한다.

철저히 개인주의 국가인 프랑스가 교육비를 국가가 전액 대고 있는 반면, 철저히 국가주의와 민족주의, 집단의식을 강조하는 한국은 그 교육비의 대부분을 개인에게 부담지우는 이상한 형식을 보면서 그는 프랑스인에게 직접 묻는다. '왜 당신들 나라에서는 교육비를 국가에서 다 지불 하나요'라고. 그러자 프랑스인들은 이상하다는 투로 프랑스는 '공화주의요'라고 한마디로 정리해 버리더란다.

이상을 통해서 홍세화는 우리나라 운동권에서 '사민주의'를 '계량주의'로 치부해 버리고 아예 변절자 취급하는 앵똘랑스에 대해서도 과감히 일침을 가한다. 최소한의 공화주의조차 실현하지 못한 사회에서 그 이후 단계인 '사회주의'만을 얘기하는 것이 더 비현실적임을 자각하지 못하는 이 운동권 사람들이 서로 서로 똘래랑스의 가치를 발견할 필요가 있지 않는가 하고 충고하고 있다.

덧붙여서 피흘려 전제왕권을 일반 대중으로 끌어 안는 역사가 없었던 우리나라에서 나타나는 대중들 간의 연대의식의 결핍을 지적하며, 노동자가 노동자 의식을 갖고, 나와 다른 노동자들에 대한 같은 연대의식을 보여줄때, 진정한 사회변화가 앞당겨지리라는 힘찬 외침도 빠뜨리지 않고 있다. 예를 들어 지하철 노조가 파업을 할 때, 우리 나라식 '시민의 발을 볼모로....'라는 말에 과감하게 비판을 하며 같은 노동자 의식을 보여주고 동조해 주는 문화가 형성될 때, 진정한 부의 평등과 기회균등이 마련될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에겐 이러한 연대의식 나아가 구체적인 실천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한다. 머리로만 연대하는 것도 의미없다는 말을 빠뜨리지 않았다. 그것이 진정한 진보를 위한 첫걸음이라면서.

끝으로 그는 희망찾기를 얘기한다.

이 장에서는 그는 자신이 이런 시각을 갖게 된 데에는 프랑스라는 피난처 아닌 피난처가 큰 도움이 되었다는 말을 한다. 즉, 한국 사회에 계속 남아 있었다면 아마 이런 시각과 삶을 가져낼 수 없지 않았겠냐는 자신의 모습을 돌이켜 보고 있다. 그러면서 일상의 덫에 빠져 의식과 행동이 왜곡되는 것을 진정 막는 길은 끊임없는 자기 학습과 토론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어 청소년에 말걸기를 통해 자아실현과 생존의 갈림길에 서 있는 자신을 잘 성찰하길 바라고 있다. 실제적인 부와 명예라는 생존과 진정한 삶의 가치와 직업의 가치를 추구하는 갈림길에서 우리 청소년들이 비록 삶의 어려움으로 생존을 선택하더라도 자아실현의 가치를 포기하지는 말라며 간곡히 당부한다. 그것을 포기하지 않을때 '연대의 즐거움'이 새롭게 자신들에게 부여될 것이고 그것이 진정 다 같이 잘 사는 사회를 만드는 밑걸음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한편, 홍세화는 우리들 교사에게도 두 손 모아 소망을 얘기한다. 미래의 회구성원들에게 자기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을 갖지 않게 해달라고. 사익 추구 집단이 사익 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형성시킨, 사회구성원 대부분의 존재(민족적, 계급적)를 배반하는 의식을 갖지 않게 해달라고 말이다. 그러면서 전교조 교사에 대한 신뢰를 강조하면서, 공화국 교육을 관철시키는 것은, 그것을 위해 투쟁하는 것은, 아이들을 억압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라도, 교사 자신의 건강한 자아실현을 위해서도 필수적이라면서 말이다.

그러면서, 안토니오 그람시의 말을 빼놓지 않고 적어 놓고 있다.

'이성으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 낙관하라!'

이 글은 홍세화 특유의 맛갈스런 문장과 적절한 사례와 과감한 일침을 경험할 수 있는 적절한 책이지 않나 싶다. 지나치게 건방지지 않으면서 지나치게 어려운 용어를 쓰지 않으면서 과감하게 현실을 직지하고 비판하는 그의 글에서 우리들의 삶을 되돌아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보며 적극 추천한다.

한 가지 더 이 글을 읽으면서 대학원 다닐적 어설프게 인용하고 아는 척을 했던 '피에르 부르디외'와 '그람시'의 책을 더 많이 읽고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그의 책을 몇 권 가지고 있으나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본적이 없기에 더욱 그렇다. 홍세화 선생은 강조한다. 끊임없는 학습과 토론, 성찰이 진보된 삶의 첫걸음이라고. 나는 그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출처 : 부산교대 맥
글쓴이 : 박진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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