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준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나쁜 사마리아인들]이후 3년만에 펴낸 장하준의 책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나 또한 그 반향에 동참했다. 그동안 신자유주의를 끊임없이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했던 그의 새 책은 이전 책보다 훨씬 쉽고 명쾌했다. 그래서 더 값진 책이지 않을까 싶다. 어렵게 보이기만 한 경제이야기를 이렇게 쉽고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쓴다는 건 웬만한 내공으로서는 엄두를 못낼 일이다. 무엇보다 자본이나 노동 어느 편에 치우치지 않고 한 세기를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게 탄탄한 자료에 바탕을 둔 적확한 이야기 23가지는 어느 독자에게도 결코 지루하지 않다.
그는 익히 알던 대로 반자본주의자가 아니다. 그의 노력과 성과를 폄하하기 위해 빨간 색을 뒤집어 씌우는 일부 보수언론과 정치인들은 그의 정확한 자료에 기반한 주장에 이제 크게 토를 달지 않을 정도가 됐다. 그는 심지어 자본주의는 여러 가지 문제에도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좋은 경제 시스템임이며, 이 책은 바로 그 자본주의를 좀 더 나은 시스템으로 만들어야 하고 또 그렇게 만들 방법이 있기에 쓴 것이라 말한다. 그의 이야기 23가지를 모두 늘어놓을 수는 없다. 내가 특별히 주목했던 부분은 크게 두 가지였다. 경제는 객관적인 시장을 논하는 게 아니라 정치적 행위일 뿐이라는 부분과 대학에 보내는 비율로 교육성과를 논하고 경제발전과 연계시키는 것이 얼마나 빈약한 논리인가 하는 것이었다.
내가 교사인만큼 그의 이 두 논리는 나에게 무척 크게 다가왔다.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이 시장의 자유를 제한한다는 이유를 들어 특정 규제의 도입을 반대하는 것은, 그 규제를 통해 보호될 권리를 부정한다는 자신들의 정체적 견해 표명에 불과하다. 물론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논리는 순전히 정치적인 반면, 자신들의 논리는 객관적인 경제학적 진실이라고 우기지만, 그들 역시 자신들이 반대하는 사람들만큼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행동하는 것이다. 시장은 객관적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자본주의를 이해하기 위한 첫걸음이다."(첫번째 이야기)
보수언론과 보수교원단체, 정부교육기관들은 끊임없이 교육의 중립성을 내세워 왔다. 하지만, 그들만큼 아니 그들조차도 정치적임을 그들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의 행위는 언제나 중립적이고 정치적이지 않다고 한다. 보수교원단체가 군부독재시절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정치적이었는지는 수많은 자료를 통해서도 이미 검증이 됐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들의 권리와 이익을 훼손하는 일에서는 언제나 교육의 정치적 중립을 내세운다. 상식이 있는 많은 사람들은 이미 교육이 정치적인 행위임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의 논리는 객관적이고도 교육학적인 진실이라고 우기지만, 그들 역시 자신들이 반대하는 사람들만큼 정치적 의도를 행동하는 것이다. 교육이 중립적이라는 환성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우리나라 교육을 바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일어나는 무상급식과 체벌관련 논란을 통해서도 우리들은 두 개의 정치적 의도를 확인할 수 있다.
"교육을 더 시킨다고 나라가 더 잘살게 되는 것은 아니다....부자나라와 가난한 나라의 가장 큰 차이는 구성원 개인의 교육수준이 얼마나 높은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각 개인을 잘 아울러서 높은 생산성을 집단으로 조직화할 수 있느냐에 있다...교육은 소중하다. 그러나 교육의 진정한 가치는 생산성을 높이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잠재력을 발휘하고 더 만족스럽고 독립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데 있다....교육에 대한 과도한 열의는 가라앉힐 필요가 있다." (17번째 이야기)
장교수는 다른 이야기들 속에서 최소한의 결과의 평등이 제공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복지를 강조하는 그의 기본적인 주장과 맥을 함께 하는 이야기이기도 한데, 학교 이야기로 끌어들이면 쉽게 이해를 할 수 있다. 우리는 교육의 기회를 제공해 주는 것으로 국가가 할 일은 다 한 것이라는 것에 동의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교육의 기회만으로는 결코 공평하지 않다는 것이다. 최소한의 경제적 부를 지닌 부모의 배려와 관심 속에서 자라는 아이와 최소한의 경제적 부를 얻기 위해 바쁘게 살아야 해 자녀를 관심을 가지고 돌보지 못한 아이들은 분명 격차가 날 수밖에 없다. 자녀의 교육을 부모가 함께 책임져 줄 최소한의 결과의 평등이 제공되어야 비로서 교육기회의 평등도 빛을 바랄 수 있다는 얘기다. 상식적이지만, 이 상식조차 우리들 사이에서 그렇게 공감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신자유주의 속에서 노동유연화 정책은 심화되고 자연스럽게 비정규직은 확대되고 고용이 불안한 상태에서 부모들의 소득은 줄고 가정 또한 불안으로 가득해 자녀들이 안정적으로 학교생활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은 그만큼 떨어지고 있는 게 사실이다. 고용불안은 다시 공무원과 전문적(의사, 판사....)로 아이들의 꿈을 모아나가고 그만큼 경쟁을 강화될 수밖에 없는데, 불난데 부채질하는 정부는 각종 일제고사를 들이대며 학력저하를 큰 문제인양 여론화 시키니 부모들은 그만큼 불안해지고 아이들은 힘들어졌다. 교사들도 학력평가위주의 정책에 부응하려다 보니 교육과정과 수업방식의 왜곡을 가져올 수밖에 없고 학교 내 인권문제나 폭력문제도 이와 더불어 심화되고만 있다. 이를 아이들의 일탈행동으로만 보고 단속하려는 언론이나 정부는 헛다리만 짚고 있다. 더불어 학교 무용론과 해체론이 힘을 받고 있다. 불안한 사회, 불안한 어른, 불안한 부모들은 강요된 학습만 아이들에게 권하게 되고 그 상황 속에서 아이들과 교사는 행복하지 않다. 교사와 아이들이 행복하지 않은 학교를 만들어 놓고 인성교육을 운운하는 것이 그저 어이가 없을 뿐이다.
핀란드와 한국이 학력 1,2위를 다툰다는 말을 많이 한다. 대게 흐름은 우리가 1등을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느냐에 몰린다. 그러나 우리나라 아이들보다 절반 밖에 공부하지 않고 즐겁게 학교를 다니는 핀란드 아이들에 대한 교육방식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다. 특히 정부가 그렇다. 두 배 이상 공부시켜 가며 행복하지 않은 아이들을 만들내는 교육정책의 비효율성과 모순을 그들은 결코 반성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시험치고 더 공부시키기에 혈안이다. 어떠한 논리도 통하지 않는 우리 사회가 그저 걱정스러울 뿐이다. 불안한 부모들의 각성만이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아무튼 경제에 관해 그리고 세상을 명쾌하고 분명하면서도 쉽게 읽게 해 준 이 책에 아니 장하준 교수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좀 더 우리 세상을 분명하게 보는 사람들이 늘어나 우리가 원하는 자본주의와 우리가 원하는 교육을 하는 세상이 빨리 다가오기만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