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정말 봄인가 싶다.
봄 비를 맞으며 출근하는 길이 마냥 새롭기만 하다.
어제는 이런 저런 집안 일로 미뤄두었던 학급일을 주섬주섬 챙기느라 밤늦게까지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래도 힘들지 않고 즐겁기만 한 건, 일 년만에 아이들을 만나
새로운 일을 준비한다는 기분 때문이었다.
오늘 아침 교실에 들어서면서 들어서자 아이들 다섯이 반갑게 나를 맞이 했다.
그래도 지난 주에 만난 탓인지 나를 대하는 모습이 훨씬 자연스럽다.
제일 신경을 썼던 서연이는 부지런히 사물함을 정리하고 있었다. 무심한 얼굴로 나를 본 듯 만 듯
자기 일만 하는 녀석에게
"서연이 오늘 일찍 왔네?"
하며 인사를 건넸다. 반응이 시덥지 않았지만, 그래도 늘 늦는다던 녀석이 월요일 첫 날 일찍 온 것을
보면 무언가 마음이 움직였지 싶었다. 조금 뒤 녀석은 더워서 그랬는지 잔뜩 때가 묻은 겉 옷을 벗어 의자에
걸쳤다. 그런데 겉 옷 안에는 까만 원피스로 예쁘게 차려 입은 게 아닌가.
"야, 서연이 오늘 예쁜 옷 입고 왔네."
했더니 무심한 얼굴로 시선을 다른 데 두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 옷, 누가 골라 준 거야? 할머니가 골라줬니?"
녀석이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그래서 제차 물었다.
"그럼, 너 혼자 골라 입고 온 거야?"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자그마한 소리로 "네."한다.
"그랬구나. 정말 예쁘다."
했더니 볼이 살짝 발그레진다. 그래도 나름 새 선생님 만났다고 월요일 아침 신경을 쓰고 나온 게 분명했다.
지난 주까지만 해도 꽤 오래 시간이 걸릴 것 같던 아이의 마음이 조금은 움직인 것 같아 아침부터 기분이 좋았다.
아침에 옛이야기 '며느리밥풀'를 들려주었다. 아침에 들려줄 이야기치고는 조금은 슬픈 이야기지만,
재미있게 듣는다. 영상으로 직접 '며느리밥풀'을 보여주니 아이들은 꽤 놀라는 눈치다. 분홍빛 꽃잎 안에
살포시 담겨 있는 밥풀모양의 꽃봉오리가 꽤 신기한 모양이었다. 이어서 박고경의 '첫봄'이라는 시를 힘차게 읊고는 '딱지 따먹기'노래를 들려주었다. 내가 사는 이곳 아이들은 도시학교에서 흔하게 듣는 백창우선생님의 노래나 여러 가지 교실 놀이를 잘 모른다. 그저 늘 뛰어놀고 책읽기와 문제풀이만 강요받았던 아이들이라 내가 던지 모든 활동을 꽤 낯설게 받아들였다. 감성이 무뎌진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이제부터 조금씩 아이들과 시와 노래로 마음을 나누길 바랐다.
오늘은 오롯이 일기쓰기로 시간을 보냈다. 마침 국어 쓰기책에 일기 쓰기 단원이 있어 충분한 시간을 보내며 일기쓰기 공부를 했다. 1학년부터 한글도 제대로 배우지고 못한 채 일기 쓰기만 강요받았던 아이들이라 쉽게 자기 삶을 글로 쓰는 것에 힘들어 했다. 지난 날 내 학급문집들을 보여주고 읽어도 주고 함께 읽기도 하며 일기 쓰기가 어렵지만은 않다는 걸 느끼도록 애를 썼다.
다섯 명 가운데 두 명은 아직 한글을 완벽하게 익히지 못해 글을 쓰는 데 주저했다. 차근 차근 설명하고 칭찬을 해주었더니 겨우 따라오기는 하는데, 익숙해지려면 꽤 시간이 걸릴 듯 했다. 지난해 복식학급을 거쳤던 아이들이어서 그랬다고 하기에는 어른들의 책임이 커보였다. 조급한 마음 먹지 않고 차분하게 말과 글을 익히도록 해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아이들 탓이 아닌데, 역정을 낸다고 다그친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지 않는가. 좀 더 즐겁고 재미있는 국어시간이 될 수 있도록 준비를 더 해야지 싶었다.
오늘 아이들과 헤어지기 전에 아이들이 준비해 온 줄공책에 '소중한 00의 일기'라는 타이틀을 붙여주었다.
헤어지며 악수 하자며 손을 한 명씩 건넸다. 서연이 녀석도 이제는 쉽게 손을 내민다. 쑥쓰러운 듯 손을 재빨리 빼려던 녀석의 손을 조금 더 세게 잡아 봤다. 뒤로 팔을 빼 달아나려는 녀석이 "안녕히 계세요." 한다.
교실 밖에는 아직도 잔뜩 흐린 하늘에서 봄비가 내린다. 이제 정말 봄인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