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여행] 4월 12일 이야기
힘들었다. 오늘이 제일 힘들었다. 남들은 사흘째라던데. 그나마 3월에 몸을 다스린 탓일까? 나흘째 몸에 신호가 온다. 사실 올레 4코스가 생각보다 재미없었던 코스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데다 제일 긴 23km를 가지고 있는 4코스. 아들도 무척 힘들어 한다. 우도에서 나오는 성산행 배에 놔두고 온 올레 책에 사실 미리 경고를 받기도 했다. 4코스가 지루할지도 모르니 일정정도에서 버스를 타고 5코스에 가는 건 어떻겠냐는 제안말이다. 그게 맞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하지만 세상살이가 그렇듯. 늘 편안한 길만 걸을 수 있나. 아들에게도 그랬다. 세상 모든 길이 앞으로 걷는 길을 미리 알 수도 없는 것이고 길마다 다 특징이 있고 힘이 드는 정도도 다르니 이런 경험도 나중에는 다 득이 될 수 있다고. 하여간 어쨌든 4코스 길을 완주했다.
4코스 시작은 표선리 해변의 끝자락에서 시작을 했다. 몸이 한층 가벼워 나름 힘차게 걸었다. 당케 포구를 지나 갯늪으로 가는 길은 여느 제주의 해안 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옛날 표선 당케 포구 근처에는 폭풍우가 잦아 마을 사람들이 고생이었는데, 제주신화의 상징인 설문대할마의 도움으로 포구가 만들어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고 한다. 제주 곳곳에 설문대할망의 흔적이 살아있다는 게 그것을 현지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그렇게 해안도로를 걷는데 자세히 보니 바위와 돌모양이 이제컷 본 모양과 조금은 다른 느낌도 들었다. 이어 가마리개(여기서 개는 제주말로 포구라는 뜻)를 지나 해병대길을 만났다. 35년만에 묻힌 길을 다시 찾아 올레길을 여는데 해병대의 도움이 컸다는 뜻으로 해병대길이라 이름을 붙였다는데 그들의 손길을 생각하니 사뭇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해병대의 도움으로 만든 길은 작은 숲길로 이어져 올레길의 참맛을 더했다. 1.4km 이어지는 아기자기한 숲속 길은 귀엽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이윽고 남쪽나라 횟집이라는 곳에서 올레 패스포트에 스탬프를 찍고 점심 먹을 곳을 찾아 나섰다. 아침을 거르고 나온 터라 아들과 나는 무척 배가 고팠다. 이곳을 벗어나면 종점에서야 식당을 찾을 수 있다니 쉬이 지나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발견한 카페. 그러나 생각보다 비싼 음식들이 많아 우리는 가장 싼 돈까스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싸 봐야 1만원. 올레길을 걸으며 먹는 음식값을 이제는 조절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대로 맛있게 먹고 난 뒤 우리는 다시 길을 나섰다. 점심을 먹으며 만난 곳은 망오름 쉼터. 오름이라는 곳을 온 몸으로 걷는 일이 이제 익숙해졌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은 올레 전 코스를 완주한 뒤에 다시 제주를 찾을 때는 꼭 오름만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3코스에서 김영갑갤러리에 사진으로 본 오름. 그 오름만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제주의 신비를 느껴보고 싶어서다. 어제 묵었던 숙소에서 여주인은 올레보다는 제주의 오름을 만나는 게 더 좋을 것 같다는 말이 귓가를 맴돈다. 그렇다고 올레길을 포기할 생각은 없다. 아들과 올레길 완주라는 목표에 함께 다다르는 과정과 결과가 우리 부자에게 던져줄 메시지가 적지 않을 거라는 믿음 때문이다. 지난 올레길을 걸으면서 그러한 믿음은 더욱 뚜렷해졌다. 망오름에서 바라보는 제주 풍경은 또 다르다. 세상의 이치가 그렇듯 어느 위치에서 어떻게 바라보냐에 따라 세상은 그만큼 달라보인다. 아들이 그리고 내가 이것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싶다. 늘 내 입장에서 나의 눈으로만 바라보는 세상에서 집착하고 다른 사람에게 강제해 왔던 지난 삶들을 다시 돌아본다. 제주 오름에서 그걸 새삼 깨닫는다.
물이 가꾸로 흘러 마르지 않는 샘물을 만든다는 거슨새미를 지나 특히하게 생긴 영천사라는 곳에서 잠시 무거운 발을 놓았다. 4코스 길의 특징은 우리가 그렇게 먹는 귤나무가 장관을 이루고 있다는 것. 그러한 귤나부 밭을 걷는 것이 자칫 지루함을 주는 것이 4코스의 한계로도 보였다. 다소 긴 4코스의 무게감이 이러한 지루함을 돋구었을까. 태흥리 포구까지 가는 길과 목적지인 남원포구까지 가는 길이 점점 멀어져만 보였다. 이렇듯 목적지가 그리운 적이 없었다. 마침내 도착한 주제올래 안내소에서 스탬프를 찍고 오늘 하루 길을 마무리 지었다. 시간은 4시 30분을 넘어서고 있었다. 한 10여분 쉬었을까. 우리를 픽업해 주는 숙소주인이 지정한 남원 하나로 마트까지 의지를 가지고 힘겹게 발길을 옮겼다.
저녁 먹을 거리를 사가지고 주인장의 도움을 얻어 찾아간 숙소는 제주 숲 게스트하우스. 이번에 올레길 숙소를 예약하면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곳이다. 남원읍에서 6km 떨어져 있지만 주인장의 따듯한 마음이 전해져 찾은 곳이다. 아니나 다를까. 젊은 주인장의 배려가 돋보이는 게스트하우스였다. 잘 생긴 외모도 외모지만 손님을 배려하고 대화를 하려는 모습에서 이곳이 다른 게스트하우스와 다른 평을 듣는 까달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몸을 씻고 주인장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서귀포에서 달려온 양재성선생님이 우리가 머문 숙소로 찾아오셨다. 여행 중에 아침독서신문에 내야 하는 서평때문에 출판사 북멘토에서 보내준 책을 대신 받아 전해주기 위해서였다. 귀찮은 부탁 기꺼이 받아주신 양재성선생님이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제주 살면서 이런 게스트하우스는 처음 와본다며 구경해 보자는 선생님을 숙소 안까지 초대해 한동안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참으로 정이 많은 우리 양재성선생님. 전국모임을 하다보니 이렇게 전국 곳곳에서 좋은 선생님을 만나게 된다. 제주를 떠나는 마지막날 김경나샘과 만나 저녁식사나 함께 하자 했다. 하~ 이렇게 또 하루가 간다. 내일은 영화 건축학개론에 나오는 한가인이 살았던 집을 지나는 5코스다. 지난 3월 27일 멋지게 카페로 탈바꿈 했다는 그곳에서 아들과 영화이야기를 하며 차를 마실 생각이다. 지붕 위 잔디도 그대로남아 있다고 하니 기대가 크다. 이만 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