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여행] 4월 13일 이야기
멋지고 잘 생긴 마음 따뜻해 보이는 <제주 숲 게스트하우스> 주인장과 아쉬운 이별을 하고 제주에서 처음으로 버스를 타러 나섰다. 정류장으로 들어설 무렵 이내 시내버스가 떠나 버려 20분을 더 기다려야 했다. 내가 사는 금산에서도 서울에서도 시내버스를 거의 타지 않앗던 탓에 괜한 긴장감이 생기는 것이 내심 기대도 됐다. 기대보다는 싱겁고도 짧게 끝난 시내버스 여행이었지만, 제주사람들이 버스에 타고 내리면서 서로에게 안부를 묻는 풍경들이 참으로 살갑다는 느낌이 들었다. 제주 말에서 느끼는 색다른 맛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남원포구에 도착한 아들과 나는 5코스 길을 새로운 마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제주 8일째, 걷기 6일째. 체력이 아직 버텨주는 것이 다행이다. 무릎 뒷편에 인대가 늘어난 것 같다며 며칠 전부터 파스를 붙였던 아들이 오늘은 부담이 조금 된다며 천천히 걷자고 한다. 나중에는 그런 말을 언제 했냐는 듯 씩씩하게 걸었지만. 그렇게 걷는 해안도로를 한창 걷다 만난 건,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안산책로로 꼽히는 '큰 엉(바닷가나 절벽 등에 뚫린 바위그늘을 뜻하는 제주어)'이었다. 해안산책로를 걷는 내내 보이는 풍경은 다른 올레길과 또 다른 감흥을 주었다. 걷는 내내 바다와 해안가 돌들이 만들어내는 풍경을 사진에 담기 바빴고 아름다운 산책로가 만들어내는 색다른 풍경에 발길을 멈출 때가 잦아졌다. 이렇게 아름다운 길을 또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
그렇게 큰 엉을 지나자 동백나무들이 가득한 마을을 만났다. 17살 나이에 이 마을로 시집을 와 울창한 동백숲을 만들어내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 그러나 걷는데 집중을 한 탓일까? 겨울이 아닌 탓에 붉은 꽃들이 피어나지 않은 탓일까? 동백나무 군락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지나친 것 같아 못내 아쉬웠다. 아쉬움도 잠시 5코스에서 가장 어렵다는 바윗길을 만났다. 다리가 조금이라도 불편한 노인들은 쉬 지나지 못할 것은 바윗길을 지나자 기암괴석군으로 둘러싸인 위미항이 보인다. 검은 바위로 둘러싸인 위미항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다름 아닌 최근에 개장을 한 영화 건축학 개론의 여주인공 '서연의 집'. 이 집을 지난 3월 27일 카페로 새롭게 단장을 했다는 소식때문인지 오전 11시 30분에 아들과 내가 들어섰음에도 좋은 자리에는 이미 많은 관광객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색다른 장소가 주는 분위기를 한껏 즐기고 있었다.
'서연의 집'에 들어서자 영화 건축학 개론의 OST가 흐르고 이 집의 대표적인 그림이었던 너른 창문이 이 집이 바로 건축한 개론의 배경이었음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일반 카페와 달리 여기 저기서 사람들이 사사진을 찍으며 집 안을 구경하느라 바빴다. 나 또한 게의치 않고 차와 베이글을 시켜 놓고 이곳 저곳을 다니며 사진을 찍어댔다. 지난해 아들과 함께 단 둘이 본 영화 가운데 하나였던 '건축학 개론' 영화에 나온 그 집을 카페로 개조가 됐다 하지만 그 장소에 왔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꽤 괜찮았다. 아들도 영화 분위기가 좀 느껴졌던지 이곳 저곳을 살펴보는 모습이 보였다. 영화주인공들의 이름을 넣은 떡을 '스토리 텔링 떡'으로 이름 짓어 파는 모양새가 어설퍼 보였지만, 전체적으로 인상은 꽤 좋았다. 영화 속에 나온 잔디 옥상은 규모가 줄어든 채로 흔적만 남아 있었다. 너른 잔디밭 옥상을 기대했던 내게는 실망이었지만, 어차피 영화는 영화일 뿐. 그렇게 아들과 나는 그다지 크지 않은 '서연의 집'에서 1시간 넘게 시간을 보내고 남은 5코스를 마치기 위해 길을 나섰다. 언제 또 이곳을 와 볼까 하는 마음을 간직한 채.
'서연의 집'을 나서 부지런히 걸어가 5코스 종점에서 만난 건 쇠소깍. 제주어로 쇠는 소, 소는 웅덩이, 깍은 끝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원래는 소가 누워있는 모양이라고 쇠둔이라고 했다는 데 18도씨의 용출수가 솟아 올라 가을에도 물이 차지 않다고 한다. 이 곳에서 관광객들은 테우와 카약을 타며 여흥을 즐기고 있었다. 토요일이라 더욱 사람들과 가득 찬 이 곳에서 아들과 나는 서둘러 스탬프를 찍고 숙소가 있는 6코스 1/3 지점을 향해 길을 나섰다. 쇠소깍을 지나니 6코스의 아름다운 바닷길이 이어졌다. 소금막을 지나 오늘 가장 힘든 과정이었던 제지기 오름을 올랐다. 오랜만에 오르막을 올랐던 탓인지 아들과 나는 300M를 오르는 내내 헉헉거렸다. 정상까지 나무 계단을 만들어 놓아 더욱 힘들었다. 겨우 올라선 정상에서 바라본 보목마을. 옹기종기 모여있는 마을풍경이 참으로 정겨웠다. 잠시 바람도 쐬고 물도 마시고 땀을 식힌 뒤 얼마 남지 않은 숙소. 우리가 묵을 숙소 '두나 게스트하우스'를 향해 마지막 힘을 다해 보았다. 그렇게 해서 들어간 게스트 하우스. 토요일인데도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4인실에 우리 아들과 단 둘이 쓸 수 있는 혜택까지 누렸다. 오후 4시경에 도착해 여유도 많아 몸을 씻고 퉁퉁 불어오른 발을 식혔다.
저녁 6시가 넘어서면서 식사를 먹어야 할 즈음. 주인장의 안내로 보목마을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아니 제주시에서도 유명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줄을 선다는 중국집 짬뽕을 먹으러 갔다. '미향'이라는 음식점이었는데, 겉으로 보는 것과 달리 주문해서 나온 짬뽕은 정말 대단했다. 냉동이 아닌 생물이 가득한 홍굴이 짬뽕. 아마도 지금껏 먹은 홍굴이 짬뽕 중에 두 세 손가락에 들어 갈 맛과 품위였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만난 음식. 이레서 절대 책에서 소개한 음식점을 찾아가지 않아야 한다는 확신만 든다. 이렇게 맛난 식사를 하고 숙소로 다시 돌아와 아들은 음악을. 나는 글을 쓰는데 시간을 보냈다. 아침독서신문에서 요청한 서평을 쓰나라 2시간을 보낸뒤, 또 이렇게 오늘 여행의 후기를 쓴다. 아들은 조금 전 골아 떨어졌다. 푹 자고 내일 다시 또 다른 제주를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서야겠다. 오늘 이 숙소에서 다른 이과 이야기를 못한 게 아쉽다. 이런 적은 이번 여행에서 처음이다. 옆 방 경상도 아지매들이 잔뜩 들어와 분위기를 망친 탓이 크다. 물론 방에 쳐박혀 글 쓰나라 정신없었던 내 탓이 훨씬 크지만. 아~ 잘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