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그 아련한 추억들/2013 연구년의 삶

[아이 눈으로 수업보기] 2차 보고서 _ 진안 장승초

갈돕선생 2013. 5. 22. 15:13

 

개인보고서 2차

 

세상에 공부를 싫어하는 아이는 없다!

 

박진환(논산 반곡초)

 

 

 

내 마음 속에 자리 잡은 소연이

 

‘아이 눈으로 수업보기’ 과정에 두 번째 참여한 날. 오늘은 참관에서 참여의 모습으로 나를 돌려놓아야 하는 날이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미리 책을 읽어 보았지만, 몸과 머리를 옮겨가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잘 알기에 다가 오는 부담은 클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지난 첫 수업에서 장승초 교사들이 벼리아이를 가운데 두고 기록하는 모습을 지켜본 그 작은 경험이 기록지를 들고 교실로 들어설 내게 작은 용기를 주었다.

이 학교 교사가 아닌 나는 소연이를 전혀 모른다. 지난 공개수업과 수업대화 속에서 듣고 이해한 바가 전부다. 하지만 아이의 외모와 말, 몸짓에서 이미 교육경력 20년차에 들어선 나는 저 아이는 어떤 아이일 거라는 짐작을 나도 모르게 해 버렸다. 참관 첫날 벼리아인 소연이를 기록하지 않은 나는 수업 속에서 보이는 소연이를 대략 이렇게 단정을 지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학습참여의 정도가 낮고 발음이 부정확하고 툭툭 내뱉는 말에서 표현력이 부족하며 모둠 구성원들에게서 배려나 이해를 받지 못하는 아이.’ ‘키와 덩치가 크고 요즘 흔히 일컬어지는 큰 얼굴에 안경을 낀데다 그다지 호감이 가질 않은 아이’ ‘카메라에 관심을 보이며 자신이 주목 받는 것에 크게 고무된 상태로 보였고 소연이의 해맑은 얼굴에서 만약 내가 담임이었다면 이 아이와 재미있게 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아이’

 

그러나 교사들의 수업대화 속에서 내가 소연이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던 점이 보였다. 그것 때문에 나는 한 순간 머리가 환해지며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벼리 아이들 둔 기록지를 바탕으로 수업을 복기하는 과정은 학습참여의 정도가 낮다는 소연이에 대한 내 선입견을 단 번에 깨뜨려 주었다. 비록 발음이 부정확하고 툭툭 내뱉는 말에서 냉소적인 느낌마저 들었지만, 분명히 소연이는 교사가 디자인한 수업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참여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소연이가 이전 수많은 다른 수업에서 매우 소극적이며 지루해 하는 모습을 보였던 건, 단지 참여의 기회와 조건, 상황이 소연이에게 주어지지 못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한 소연이 모습이 6학년에 올라선지 겨우 한 달 만에 담임의 노력으로 달라지기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소연이를 만나는 두 번째 날. 나는 이전과 다른 마음과 자세로 소연이를 바라보았다. 아이들이 쓴 글과 일상적인 만남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을 수업 속에서 생각보다 빠르게 찾아내었다는 점에서 나는 이 작업이 매우 흥미롭다. 소연이는 모르겠지만, 내 마음 속에는 어느새 소연이가 자리 잡았다.

 

미안해, 그래 넌 생각할 줄 아는 아이였어.

 

‘공평’의 개념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 것인지를 두고 한창 모둠토론이 진행되는 시점에서 관찰기록을 시작했다. 중간에 들어간 수업이고 정확한 정보를 얻지 못한 상태에서 들어간 관찰이라 시작부터 소연이를 비롯한 아이들의 말이 어떤 상황에서 오가는지 정확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기록은 계속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 모둠학습이 한창 진행될 무렵, 소연이는 ‘나도 해볼 게’라는 말을 꺼낸다. 이 말 자체로도 소연이는 지금 학습에 대한 의욕이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모둠끼리 정의해낸 ‘공평’이란 주제를 스케치북에 예쁘고 크게 정리해 쓰는 작업에 하린이와 소연이는 매우 적극적이었다. 남학생들은 곁에서 그 과정을 지켜보는 것으로 만족하는 듯했다.

정리하는 시간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교사의 '째깍 째깍‘이라는 말에 반응을 하며 몸짓을 하는 소연이가 수업에 재미를 느끼고 있다는 모습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무엇이 재미있었을까? 수연이는 어떤 지점에서 재미를 느끼고 있는 걸까? 이와 같은 질문은 오후에 이어진 수업 대화에서도 핵심주제로 다뤄졌다. 평소에 수업에 소극적인 참여를 한다는 소연이가 왜 이러한 토론 수업에서 흥미를 느끼는 것인지를 알아가는 과정이 곧 소연이의 눈으로 이 수업을 읽어내는 열쇠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열쇠를 푸는 결정적인 시점은 모든 아이들이 한데 모여 교사가 제시한 ‘프랑스 축구선수에게 엄청난 세금을 물리는 것’에 대한 찬반토론에서 시작했다. 담임교사가 아이들에게 ‘내 판단으로 내 생각은 어디에 해당하는 지를 골라 봐’라는 제안에 소연이는 칠판에 적힌 두 가지 정의를 가리키며 확인을 했다. 다른 아이들이 가만히 있는 상황에서 소연이의 행동은 토론과정에 참여하기 위해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를 첫 과정을 잘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다른 관찰자들은 당연히 아는 것을 질문을 했다는 것에 특이한 모습이라 볼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나 이 모습은 분명 벼리아이 소연이가 수업에서 집중력을 잃지 않고 있다는 작지만 뚜렷한 증거였다.

이어 나름 논리적인 주장을 펴는 민규와 하경, 다인이를 중심으로 찬반 논쟁이 격화되는 과정에서 유심히 지켜보던 소연이는 처음에 생각했던 ‘프랑스 축구선수 세금폭탄 문제’에 관해 불공평하다는 판단에 대한 확신과 의문에서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불공평해요!’라며 큰 소리를 내거나 거수투표에서 불공평에 손을 드는 모습에서 소연이의 판단에 큰 변화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담임이 정체돼 있는 토론 상황에 개입해 질문을 던진다. “세금은 나라에서 정한 법인데, 왜 나라에서는 그런 불공평한 일을 할까?”

그때, 아무도 언급하지 않은 대답을 소연이가 한다. “가난한 사람이 있으니까,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그러자 하경이가 “가난한 사람을 줄 거 같애?”라며 반문한다. 이런 상황에서 친구들이 줄 수도 있다며 소연이의 대답에 동조를 한다. 이어 나라가 도와주겠냐며 회의적인 의사를 표시하는 친구의 발언이 이어지면서 토론의 흐름은 새로운 방향으로 이어졌다. 이즈음에서 교사는 다시 논의의 흐름을 이으려는 듯 “왜 불공평한 일을 나라에서 할까?”라고 확인 질문을 한다. 그때 친구들은 그조차 불공평한 일이라며 공평과 불공평의 정의에 입각한 대답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나 소연이는 조금 다른 대답을 한다. “가난한 사람이…… 인구가 많고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사람들과 건물이 많기 때문에……”라며 교사의 질문에 맞게 사고하려 애쓰려는 모습이 보였다. 다시 이어지는 교사의 확인 질문, “그니까 왜 할까?”라는 지점에서 또 다시 소연이는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기 위해”라는 대답을 한다. 그러나 어떤 의문이 생겼는지 담임교사에게 질문을 한다. 나라가 돈이 없어서 그런 거냐고. 그렇게 세금을 거둘 수밖에 없는 거냐고. 다른 아이들이 불공평과 공평의 정의에 맞춰 논의를 진행하는 동안, 소연이 끊임없이 교사의 질문에 대해 생각하려 했고 나름 대답을 내 놓았다. 그 답에 확신은 없었지만 질문을 통해 확인하려는 모습도 보였다.

친구들은 소연이가 주제에 관한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판단해 박지성을 예로 들어 설명을 하자, 그것은 이해했다고 말한다. 그래도 알 수 없는 의문이 생기면서 이해하지 않았느냐는 친구들의 물음에 고개만 끄덕였다. 이때 다시 교사가 개입해 논의가 이 주제의 결론이 공평 쪽으로 가느냐고 물었고 소연이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라는 나름의 결론성 발언을 내 놓는다. 그러자 눈치 빠른 하경(?)이는 선생님은 다 알면서 자꾸 우리들에게 이야기를 하게 만든다며 불평을 털어 놓는다.

다시 논의는 정체되고 아이들은 답이 정확히 나오지 않는 토론과 긴 과정 때문에 피로를 느낀 듯 연신 하품을 하고 ‘머리가 아프다.’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소연이도 마찬가지였다. 힘들다는 말들이 나오기 시작할 무렵, 다인이와 어진이가 소연이를 지목하며 마이크를 차고 있는데도 말을 하지 않는다며 지적한다. 그러자 발끈한 소연이가 생각하고 있는데 왜 그러냐며 화를 낸다. 지금까지의 과정을 분석해 정리하면 분명 소연이는 논의 과정을 지켜보며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보려 애를 쓰고 있는 흔적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아울러 교사의 개입에 적극적인 반응을 하고 주위 친구들의 발언을 주의 깊게 관찰도 했다. 표현에 서툴러 논리적으로 자기 생각을 드러내지 못할 뿐, 짧은 발언에서 자신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툭툭 내던졌다. 말을 풍성하게 하지 못하고 조용한 듯 보이는 소연이의 모습을 지적한 아이들에게는 단호하게 자기는 지금 생각 중이고 생각하고 있음을 명확히 했다. 앞의 과정에서 이러한 소연이의 명확한 발언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적극 참여해 자기의 생각을 서툴게라도 표현하고 생각하는 과정을 겪어 가는 소연이에게 이 수업이 재미없을 리가 없다. 이 수업에서 소연이는 분명 생각하는 아이였고 그러한 생각을 나누고 싶어 하는 아이였다.

일상수업에서 가볍게 바라보는 소연이의 모습은 말 수가 적고 적극적인 참여를 하지 않는 듯 보인다. 아마도 이렇게 관찰하여 기록하고 벼리아이인 소연이의 말과 교사 또는 친구들의 말이 이어지는 과정에 대해 적극적인 해석을 하려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나는 소연이를 생각하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아이로 여겼을 지도 모르겠다. 물론,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소연이의 생활과 학습적인 면을 누가 관찰하고 기록하면서 좀 더 정확한 모습을 읽어낼 수는 있겠지만, 이와 같은 판단을 내는 속도는 매우 느릴 것이다. 이는 그만큼 소연이를 도와줄 기회를 놓칠 수도 있다는 얘기이겠다. 다시 말하지만 수업을 기록하고 교사들과 대화하고 분석하면서 그리고 이렇게 보고서를 쓰면서 드는 확신은 분명 소연이는 생각할 줄 아는 아이라는 것이다.

 

세상에 부를 싫어하는 아이는 없다!

 

요즘 부쩍 사회적 ‘차별’을 논할 때, 적지 않은 사람들이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노라 엘렌 그로스(Nora Ellen Groce)의 《마서즈 비니어드섬 사람들은 수화로 말한다》를 곧잘 꺼내 놓는다. 그 중에서도 마서즈 비니어드(미국 보스턴 남부 뉴잉글랜드 근해에 위치)섬의 할머니의 인터뷰 속 내용은 인상이 깊다.

“오, 그들은 장애인이 아니었어요. 단지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지요.”

저자는 위 책을 통해 장애는 ‘사회문화적으로 만들어지는 하나의 사회적인 가공구조’라 단언한다. 이러한 시각에서 본 소연이도 나는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연이를 공부에 관심이 없고 참여도가 낮으며 지루해 한다는 생각은 사회문화적으로 만들어진 이른바 ‘공부’대한 우리들의 의식이 오랫동안 사회적으로 가공돼 왔기 때문일 거라 생각해 봤다. 다시 말해 이는 공부에 대한 사회적 고정관념과 오랫동안 관성화된 시각과 틀에서 조금만이라도 벗어난다면 우리는 소연이를 전혀 다르게 볼 수도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두 번째 수업보고서를 쓰면서 뚜렷하게 드는 생각은 소연이는 공부를 싫어하는 아이가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소연이는 누구보다 세상을 배우고 싶어 하는 생각이 많은 아이였고 누구보다 세상에 대해 호기심이 많고 배울 자세도 충분한 아이였다. 그렇지만 책상에서 앉아 시험점수를 높여 학력을 쌓아야 비로소 대우를 받는 우리네 공립학교의 낡고 오래된 체제와 문화가 소연이의 학습에 대한 욕구가 그동안 꽤 크고 강하게 억눌려 왔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비단 소연이에게만 해당되는 일은 아니다. 작은 학교 장승초에도 이런 소연이와 같은 아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거대한 일반 공립학교에서는 두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아이들은 배우는 속도가 각기 다르다. 아이들마다 각기 다른 학습상황이 주어져야 한다는 철학은 누구나 아는 얘기다. 그러나 이러한 철학이 공립학교에 투입되기에는 너무도 높고 두꺼운 벽이 가로막고 있다. 결국 우리네 사회와 학교에서 오늘을 사는 전국의 많은 소연이들은 이와 같은 벽 안에서 학교에서 철저히 차별 당하고 외롭게 주눅 들어 살 것이다. 우리 교사와 학교는 이와 같은 잘못과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짧지만 두 번에 걸쳐 벼리 아이 소연이가 내게 전해준 가르침은 ‘세상에 공부하기 싫어하는 아이는 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본 소연이는 배우고 싶어 했고 그 속에서 자기의 존재를 확인 받고 싶어 했다. 다만 그동안 우리 어른들이 소연이에게 맞는 학습환경과 교육과정을 제공해 주지 못했을 뿐이다. 그 언젠가 또 어디선가 만약 소연와 같은 아이를 내가 다시 만난다면, 아마도 나는 이런 말을 건넬 것이다.

 

“그래, 소연아! 너는 특별한 아이가 아니야. 단지, 어른들이 너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뿐이었지. 너는 충분히 지금보다 잘 할 수 있는 아이야! 너는 누구보다 생각할 줄 알고 다른 사람을 이해할 줄 아는 아이지. 난 널 믿어. 선생님이 도와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