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바이칼여행기] 7부_8월 6일_ 러시아의 유배지 ‘이르쿠츠크’에 도착!
이르쿠츠크는 흥미롭게도 네 시간이라는 비행거리에도 우리나라와 시간이 같다. 사실상 오늘부터 시차 적응에 들어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 이곳 시각으로 아침 9시경에 이르쿠츠크 공항에 도착을 했다. 밤을 꼬박 비행기에서 보낸 터라 다들 피곤해 했다. 짐을 찾는데 만해도 30여분이 소요돼 우리는 자연스럽게 아침밥은 건너뛰어야 했다. 그나마 <우리가 간직해야 할 지구의 푸른 눈 바이칼>의 저자이시자 바이칼에서 현지 여행사를 운영하며 한겨레신문 등 많은 문인들에게 바이칼을 안내하고 소개하는 일을 하시는 박대일사장님이 아주 젊고 잘 생긴 한인 유학생 가이드와 직접 마중을 나와 주셔 정말 다행이고 반가웠다. 사실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에서 만난 가이드의 부적절한 행태 때문에 마음고생을 잠시 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이번 우리 일행의 전 일정을 기획한 박대일사장님이 직접 나오신 까닭도 이 점에 대해 미안한 마음 때문이 컸다.
크게 사과를 하며 러시아 한국인 가이드들의 문제점들을 이야기 해 주시는데, 그래도 고르고 고른 정도가 그 수준이었다 하니 내 주변 지인들에게 러시아로 여행을 선뜻 권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와 관련한 이야기는 이번 러시아 바이칼 여행 뒷이야기에 담아볼 작정이다. 아무튼 지난 5일간 볼 수 없었던 따뜻한 환대에 우리 일행은 6시간의 피곤함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특히 박대일사장님의 거침없는 입담으로 풀어 놓는 러시아 바이칼 이야기와 에피소드 때문에 얼마나 즐거웠는지 모른다. 워낙 바쁘신 분이어서 오후 2시를 넘겨 우리를 떠난 박대일사장님이시지만, 요즘에는 좀처럼 여행객들 앞에 나서지 않는다는 분을 직접 만날 수 있고 그분의 익살스럽기까지 한 러시아에서 삶과 경험을 들을 수 있어 좋았다. 우리가 떠나는 날 다시 뵙기를 바라며 아쉽게 헤어져야 했다.
박대일사장님께 바통을 이어받은 가이드는 이르쿠츠크 외국어대학교에 다니고 있는 유학생이었다. 박사장님이 제일 믿고 맡긴다는 젊고 정말 잘 생긴 남자 가이드 때문에 아줌마선생님들도 난리다. 하긴 내가 봐도 정말 잘 생겼더라. 부러웠다. 부러우면 지는 거라는데, 난 고만 져버렸다. 젊고 총기 있고 예의 바른 젊은 가이드의 안내로 점심을 먹고 우리가 간 곳은 이르쿠츠크의 조그마한 민속 박물관이었다. 신화전문가이시고 대학교수이신 고혜경선생님의 특별강의가 시작된 것이기도 했다. 이곳에 2천 5백만 전 유물로 발견된 자그마한 여신상 때문이었다. 이곳 박물관에서는 별 것 아닌 것처럼 전시돼 있지만, 이것에 관심을 가지는 학자들에게는 매우 뜻 깊은 유물이라고 한다. 고대 석기시대의 신은 남신이 아닌 여신이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작은 여신상의 손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는 점, 잘 모르지만, 작지만 하나하나에 제작과정에 의미를 읽어낼 수 있다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 들었다. 박물관은 총 2층으로 만들어진 옛 건물에 소박하게 유물을 전시했지만, 그곳에 담긴 러시아와 이르쿠츠크의 역사는 결코 작지 않았다. 우리와 헤어지기 전 박물관까지 따라가 유물과 관련된 러시아 바이칼 지역과 문화에 대한 풍부한 이야기를 들려주신 박대일사장님의 말씀 때문에 좀 더 유익한 시간이 될 수 있었다.
다음은 이르쿠츠크가 자랑하는 앙가라강에서 키로바 광장까지 이어진 길을 걸으며 러사이의 또 다른 역사와 문화를 만나는 길이었다. 오랜만에 여유를 느낄 수 있었다. 프랑스의 세느강을 결코 부러워하지 않는 이르쿠츠크인들의 앙가라강 사랑이 괜한 소리가 아니라는 걸 느꼈다. 5년 전 보았던 세느강과 다른 크기와 넓이, 물의 속도와 풍경은 과연 러시아 이르쿠츠크인들의 힘을 보여주고 있는 듯 했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앙가라강을 바라보자니 빠른 유속 탓인지 마치 내가 배를 타고 앞으로 나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시원한 바람과 너른 강줄기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이르쿠츠크를 찾은 보람을 찾을 수 있었다. 그렇게 길을 걷다가 만난 곳은 앙가라 전망대를 지나면 보이는 승리 광장과 영원의 불.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이 지방 출신 용사들의 영혼을 지키는 불이다. 마치 붉은 광장 인근의 영원의 불처럼. 당시 이르쿠츠크 출신 참전 용사는 20여만 명이었고, 그중 5만 명이 전사를 했다고 한다. 이들 중 70여명이 소비에트 연방 정부로부터 영웅칭호를 받았고 37명의 이름은 주정부 청사 뒤편 벽에 새겨져 있다고 한다.
다음으로 스파스까야 교회. 이르쿠츠크에서 두 번째로 건축했던 석조 건물이며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는 몇 안 되는 석조 건물 중 하나라고 한다. 소련시절에 영화 장비를 수리하는 장소로 사용되다 현재는 교회 박물관으로 개관하고 있다고 한다. 스파스까야 교회에서 길 건너편을 바라보면 19세기 후반 가톨릭 건축 양식인 네오고딕양식으로 지어진 폴란드 가톨릭 교회가 보인다. 이루크츠크의 가톨릭 역사는 1831년부터 1863년까지 폴란드 사람들이 쫓겨 오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혹독한 유배 생활에서 종교는 그들의 유일한 안식처였을 터. 현재 이 교회는 1879년 이르쿠츠크 대화재 당시 목조였던 건물이 모두 타고 석조교회로 다시 지은 것인데, 전 세계의 가톨릭 신자들이 헌금으로 재건했다고 한다. 1978년에는 오르간 연주 홀을 개관했다가 지금은 다시 교회 문을 열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폴란드 가톨릭교회를 뒤로 하고 발길을 옮긴 쪽은 키로바 광장. 그 길에서 만난 이르쿠츠크 주 청사. 청사 앞에는 작은 종탑 모형의 건물이 있다. 이 모형 건물은 그 옛날 이르쿠츠크의 러시아 정교회의 파편으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사실 이 건물은 현재 이르쿠츠크 주 청사 건물 위치에 거대한 크기로 자리잡고 있었으나 1917년 혁명의 시기에 본보기로 폭파 제거되었다고 한다. 아름다운 이 카잔교회의 건물 잔해는 키로바 광장을 돋우는데 사용했고 시민들로하여금 밝고 다니도록 강요했다고 한다. 최근 다시 카잔 교회를 복원하자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고 하는데, 그야말로 가슴 아픈 러시아 역사의 뒷이야기였다. 그렇게 만난 카잔건물을 뒤로 하고 만난 키로바 광장은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오늘을 사는 러시아의 젊은이들은 더 이상 과거 공산당시절을 그리워하지도 않을뿐더러 매우 부끄럽게 여기기까지 한다고 한다. 무엇이 옳은 역사여야 하는지, 무엇 때문에 지난 역사는 지워져야 하는지 두고 두고 생각하고 곱씹을 일이라 여겼다.
오늘 일정은 이렇게 가볍게 지나갔다. 내일 9시간이나 타야 하는 환바이칼 철도여행을 위한 간식을 사고 고급스러운 저녁을 먹은 뒤 우리가 묵을 앙가라 호텔로 갔다. 이번 여행 중 가장 시설이 좋은 곳이었다. 모처럼 일찍 들어와 싱글룸에서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러시아 현지식이 여전히 입에 맞지 않지만, 오늘만큼은 조금은 고급스러운 음식점에 간 탓인지 편안하게 먹을 수 있었다. 조금씩 익숙해지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제 내일이면 러시아 여행 7일째로 들어선다. 가벼운 소풍 길을 나서는 기분으로 바이칼을 둘러보는 철도여행을 떠난다. 그곳에서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궁금하다. 그곳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 곳이며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가 궁금하다. 반갑다, 이르쿠츠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