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바이칼여행기] 13부_8월 12일_ 아련한 추억으로 남을 러시아와 바이칼!
아~ 이르쿠츠 국제선 공항 안에서 이글을 쓴다. 2시간 뒤, 새벽 3시면 대한항공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간다. 피곤한 우리 일행은 여기 저기 의자에 누워 쪽잠을 청한다. 나도 그렇고 싶지만, 2시간을 푹 자지 못할 바에야 글을 쓰는 것이 낫겠다 싶어 이렇게 또 노트북을 꺼내든다.
러시아의 마지막 날 아침. 과일로 아침을 대충 마무리 하고 9시 10분 버스에 올라 타 첫 행선지 딸지 민속촌으로 향했다. 바이칼뿐만 아니라 시베리아는 어디를 가든 빈도만 다를 뿐 자작나무와 소나무가 적당히 어우러진 타이가 숲이라 한다. 이르쿠츠크에서 가장 쉽게 바이칼 호수를 보려면 리스트비얀카라는 호숫가 마을로 가야 하는데, 딸지 민속촌은 그 길에 서 있는 관광지인 것이다. 사실 어제로 바이칼과 완전히 헤어진 것으로만 알았던 나는 다시 바이칼을 만난다는 사실에 내심 반가웠다. 한 40분이 지났을까? 딸지 민속촌에 들어가기 전 가이드가 산책 코스로 안내한다. 안내한 곳은 자작나무가 가득한 숲속 길이었다. 상쾌한 아침 공기에 자작나무가 뿜어내는 기운이 한데 어우러져 온 숲은 이미 깨끗하고 맑음 그 자체였다. 조금은 피곤한 아침을 맞은 우리 일행에게 자작나무 산책길은 그야말로 피로회복제였다. 환호성을 지르며 사진 찍기 놀이에 흠뻑 빠진 일행들의 뒤를 따라 나도 하늘 높이 이어진 자작나무를 따라 걷고 또 걸었다.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저만치 가이드가 있는 곳 주변으로 건물들이 보인다. 그곳이 바로 딸지 민속촌이었다. 사실 이곳은 ‘딸찌 목조 건축 구조물 박물관’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지만 그냥 민속촌이라 부르면 딱 어울리는 이름이라 한다.
우리가 가장 먼저 만난 것은 바이칼의 옛 주인이었던 토프족과 예벤카족의 주거지였다. 이들의 주거지를 지나자 카작크 사람들의 물레방앗간이 보인다. 윗집에서 방아를 돌리고 흘러내린 물이 아랫집에서 또 방아를 돌리게 만드는 흥미로운 구조였다. 왼쪽 언덕으로 올라가니 나무로 지은 집들이 빙 둘러 마을을 이루고 그 가운데 망루를 포함한 목성이 자리 잡고 있었다. 들머리에 있는 첫 번째 집은 유리공장이었던 딸지 지역의 옛 유물을 전시하고 있었다. 사실 이곳은 1784년에 건설해서 1951년까지 가동되었던 유리공장이 있었던 곳이라 한다. 그런데 이르쿠츠크에 댐을 만들면서 수위가 높아져 이곳의 흔적도 함께 수몰되었다고 한다. 그때 발굴한 유리공장의 흔적들이 이곳에 있는 것이다.
문밖으로 나오니 나무로 만든 망루가 보인다. 카작크 원정대가 시베리아에 진출하면서 세운 군영이라고 하는데, 이것도 원래는 수몰 위이게 있던 것을 지금 자리에 옮겨 놓은 것인데, 1667년에 건축한 목성 망루는 그 앞에 있는 카잔스카야 예배당과 함께 이곳에 민속촌을 만든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이곳에는 몇 세기가 지난 학교 건물도 있고 시베리아 유배지의 감옥도 보였다. 특히 우리 일행들이 교사가 많아 학교는 유독 눈에 띈 건물이기도 했다. 자그마한 교실에 교탁과 칠판, 8명이 앉을 수 있는 나무로 만든 조금 경사진 2인용 책상이 참으로 귀엽다. 그 옆방은 교사의 숙소로 쓰이는 듯한 방이었는데, 고혜경선생님 왈, 선생 대접이 이 정도는 해야 되지 않겠냐 한다. 우리는 다들 웃으며 동의했다.
학교를 지나자 각종 노점상들이 늘어서 있다. 각종 기념품을 좋아하는 일행들이 이곳을 그냥 지나칠 리 없다. 나도 오늘은 동의를 했다. 가이드가 길게 시간을 준 탓에 여유롭게 딸지 민속촌을 돌며 나름 쇼핑을 했다. 나는 자작나무로 만든 두 가지 제품을 샀다. 하나는 러시아 전통 인형과 자작나무로 만든 접시였다. 작은 전통인형 안에 인형이 모두 5개가 들어있다. 러시아를 돌아보며 이 인형을 두루 살펴본 결과 양파 까듯이 들어가는 인형 수가 많을수록 비싸다는 점, 그리고 세공 기술에 따라 값은 천양지차로 다르다는 점, 내가 본 것 중에 가장 비싼 인형은 우리 돈으로 100만원이 넘었다. 최근 러시아 정부에서 이 인형이 사양사업이 되지 않도록 지원을 하고 있다고 하는데, 하여간 러시아 인형 하나로 이곳을 찾은 최소한의 책임을 다한 기분이었다. 그 다음이 자작나무 접시. 여선생님들이 괜찮다는 평을 내리신 것인데, 다들 이런 저런 고민을 하다 그냥 내버려둔 것을 내가 챙겨 사 보았다. 인형 말고도 러시아를 생각할 기념품이 될 것 같아서였다.
그렇게 오전시간을 보낸 우리가 버스에 올라 타 잠시 들른 곳은 바이칼과 앙가라강의 경계가 되는 지점이었다. 그곳을 찾은 까닭은 또 하나의 샤먼 바위 때문이었다. 화려한 전설에 비하면 잘 보이지도 않은 작디작은 바위지만, 이르쿠츠크에 댐을 건설하기 전에는 당당한 바위섬이었다고 한다. 가이드의 말로는 앙가라 강의 센 파도 때문에 세월이 갈수록 더 깎이고 있다고 한다. 박대일 사장의 책에 실린 이 바위에 대한 전설은 대충 이렇다. 늙은 바이칼에게는 크고 작은 아들이 336명이나 있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딸이라고는 고명딸 앙가라뿐이었다. 앙가라는 호수 같은 푸른 눈과 자작나무 같은 하얀 피부를 지닌 뛰어난 미인이었는데, 앙가라의 혼처를 알아보던 바이칼은 이웃동네 샤안이라는 영감의 아들 이르쿠트를 사위로 맞고자 한다. 그러나 딸 앙가라는 이를 거역한다. 앙가라는 그녀에게 세상 이야기를 전해주는 새를 통해 바다를 보고 싶어 했다. 그러던 중 먼 곳에 예니세이라는 청년을 만나 사랑에 빠졌고 야반도주를 감행한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바이칼이 급한 마음에 옆에 있던 돌을 던지게 되는데, 그 돌은 불운하게도 앙가라의 뒤통수를 쳤고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그 돌이 바로 오늘 우리가 본 샤먼바위인 것이다.
이제 점심이다. 그런데 어느 한적하고도 분위기가 음산한 곳으로 버스가 들어간다. 그곳이 점심을 먹을 곳이라 한다. 역시나 우리를 맞는 건물에는 도통 간판이 없다. 러시아에 와서 간판 없는 식당을 간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어서 이제는 당연하게 여기지만, 어이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50분이나 일찍 식당에 도착해 식사를 하려 하자 주인장이 1시에 예약된 시간을 기다리라 한다. 할 수 없이 우리 일행은 식당 건물 앞 허접한 숲에서 시간을 보냈다. 잠시 시간이 나자 가만히 있을 우리 일행이 아니다. 기어코 사진 찍기 놀이에 들어가더니 꼬박 50분을 모두 사진 찍기에 바친다. 내가 이 모임에 있지 않아서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참으로 흥미로운 사람들이다. 시간이 다 되었을 무렵, 식당 입구에서 노랫소리가 들린다. 돌아보니 이곳 민속공연 팀이 부르는 노래였다. 그러고는 우리를 부른다.
오늘 민속공연이 있다 하더니 이리로 그들을 초대한 모양이다. 아카펠라처럼 펼쳐지는 러시아 노랫소리가 아름답게 울려 퍼진다. 박자 빠른 노래가 이어지더니 여덟 명쯤 돼 보이는 공연자들이 선생님들에게 손을 내밀고는 신나게 춤을 추자 한다. 그렇게 한 곡이 끝나자 자연스럽게 우리는 식당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마치 폐가 분위기였던 식당 외곽 건물과 달리 식당 내부는 깔끔하고 넓은 공간이었다. 샐러드에 이어진 오물스프와 감자볶음, 치즈로 감싸 구워낸 고기음식이 그나마 먹을 만하다. 팬 케잌에 섞인 아이스크림도 독특하여 입맛을 당긴다. 그때였나? 조금 전 우리를 맞았던 민속공연팀이 들어와 흥겹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전통 러시아 노랫소리는 아름답게 울려 퍼지면서 우리가 점심을 맛나게 먹을 수 있게 해주었다.
곧이어 자신들이 입고 온 전통의상에 대한 소개와 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또 한동안 노래를 부르더니 우리가 식사하던 옆 공간 너른 곳에서 함께 춤을 배우자 한다. 안 그래도 흥을 주체하지 못하는 우리 일행은 거침없이 그들과 손을 잡고는 함께 신나게 춤을 시작했다. 나도 잠시 이 모습을 동영상에 담다가 합류를 했다. 그들의 노래와 리듬에 맞춰 보여준 그들의 노래와 놀이는 우리들도 예전에 한 때 즐겼던 비슷한 놀이도 있었다. 이밖에도 짝을 지어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여러 가지 춤과 노래로 우리는 한껏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놀이 가운데에는 서로를 지목하는 놀이도 있었는데, 내가 두 번이나 러시아 공연팀 여자팀원에게 간택(?)되는 영광을 누려 내가 러시아에서 통하는 몸매를 지녔나 하는 생각마저 했다. 그렇게 우리는 이들과 자유로운 춤을 추며 공연의 마무리를 함께 했다. 나는 이들을 보면서 비록 돈을 받고 초대된 팀이지만 마음을 다해 정성을 다해 성의를 보여주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더 고마웠다. 이들은 18년이 된 경력의 단장 아래 여러 나라의 공연도 참여하며 전문성을 키워가는 러시아 민속공연팀이었다. 그들과 함께 단체 사진을 찍고 난 뒤, 우리는 이내 아쉬운 이별을 해야 했다.
점심을 먹고 우리가 찾아간 곳은 성 니꼴라이 성당이었다. 리스트비얀카에서 유일한 교회인 이곳은 19세기에 상인 세레브라코프가 바이칼을 항해하던 중 폭풍우를 만나 위험에 처해 있을 때 성 니꼴라이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기도를 했는데, 모두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뒤 그는 감사의 뜻으로 교회를 세우기로 하고 1846년에 공사를 시작했는데, 완공이 되기 전에 죽어 그의 부인이 뒤를 이어 공사를 마무리 했다고 한다. 이곳을 들어서기 전, 박대일 사장의 책과 달리 어린 소녀들이 좌판을 펴고 손님을 맞이하는 모습은 없었다. 책이 쓰이던 시절과 지금은 당연히 다를 터. 한 노파가 작은 좌판 위에 송이채 담긴 잣을 파는 모습만 보인다. 그냥 지나치기가 미안했다. 뜨거운 땡볕 아래 홀로 앉아 있는 저 늙은 여인은 또 어떤 삶을 살아왔을지 생각해보니 더욱.
그렇게 우리는 성 니꼴라이 성당을 뒤로 하고 우리의 최종 목적지인 리스트비안카 항구로 향했다. 이곳은 처음에는 오믈을 잡는 어부들이나 소볼을 잡는 사냥꾼들이 주를 이루었으나 1720년대부터 이르쿠츠크의 중산층이 이주해 오면서 번창해 1740년대에는 아시아 지역과 무역 및 교류의 중심도시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지금은 바이칼 호수를 보러 오는 전세계 사람들이 찾는 관광지가 되었는데, 리스트비얀카란 러시아어로 낙엽송이라는 뜻의 리스트비니짜에서 유래한 말이라고도 한다. 이 일대가 시베리아에서는 보기 드물게 낙엽송 군락을 이루는 곳이라고도 한다. 이곳은 훈제 오믈을 파는 아낙들과 좌판을 펼치고 각종 기념품을 파는 잡화상들이 늘어서 있는 곳이기도 하다. 러시아 전통의 마트료쉬카 인형부터 이 지역 특산물인 보라색 옥돌 등 종류도 다양하다. 우리가 이곳을 찾은 까닭은 총 세 가지인데, 그 하나가 바로 유람선을 타고 바이칼을 30분 정도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두 팀으로 나뉘어 30분씩 유람선과 노점상을 돌아보는 시간을 보냈다. 먼저 유람선을 선택한 나는 참으로 드넓은 바이칼호를 다시 만난 기분을 잠시지만 매우 만끽했다. 가이드의 배려로 훈제오믈과 보드카를 맛보는 시간도 좋았지만, 바이칼을 배를 타고 돌아본 것이 더 좋았다. 30분은 바이칼을 느끼기에는 정말 짧았다. 아쉽게도 나는 배에서 내려야만 했다. 그렇게 일정을 보내고 우리가 찾아간 다음 장소는 바이칼 호수박물관이었다. 사람들은 우리 말고도 많았다. 내부시설은 그저 그랬지만, 박물관 안에 작은 수족관도 있어 흥미롭다. 특히 우리가 즐겨 먹었던 오믈 뿐만 아니라 바이칼의 또 다른 상징인 물개 네르파도 있었다. 민물 물개인 네르파를 직접 볼 수 있어 놀라웠다. 하지만 좁은 공간에 갇혀 왔다 갔다 하는 네르파를 보며 마음이 마냥 즐겁고 편할 수만은 없었다. 그냥 영상으로만 보게 하고 자유롭게 살도록 그들을 놔 주었으면 하는 생각뿐이었다. 귀엽고 앙증맞은 표정이 오히려 더 슬퍼보였던 것 나 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제 마지막 일정만 남았다. 저녁시간이다. 특별식으로 준비된 숯불 돼지 꼬지 일명 을 먹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준비 시간이 길어진 탓에 일부 일행은 바로 위에 보이는 리스트비얀카 시장구경을 나서기도 했다. 마침내 꼬지 완성. 호변 가에 마련된 파라솔 밑에서 우리 일행 모두는 맛있게 요리된 꼬지를 먹었다. 이번 여행 내내 고기음식이 많아 버거웠던 내 입이 쉽게 이 음식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게 흠이지만, 해지는 바이칼을 바라보며 바이칼에 휴양 차 온 많은 세계 사람들을 보며 우리는 그렇게 2시간 동안 마지막 러시아 일정을 마칠 수 있었다. 밤 9시 쯤 이제야 해질녘에 들어가는 이르쿠츠행 버스는 그다지 행복하지 못한 듯 했다. 몸은 피곤하지만 떠나야 한다는 아쉬움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아쉬움도 잠시 1시간 뒤에 도착한 큰 마트에 도착한 우리 여선생님들의 눈은 다시 빛나기 시작했다. 마지막 쇼핑이자 그동안 맛나게 먹어본 보드카를 살 기회였기 때문이었다. 나 또한 한 병을 더 샀다. 지인들과 러시아의 추억을 함께 나누고 싶어서였다.
그렇게 대형매장을 떠난 지 20분이 지났을까? 우리는 곧 이르쿠츠크 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곳 이르쿠츠크는 특이하게도 국내선 비행장보다 국제선이 훨씬 볼품이 없고 시설도 열악했다. 11시에 도착해 공항에 들어섰음에도 우리는 1시간 30분을 더 기다려 공항 내부로 들어설 수 있었다. 거기까지 함께 해준 우리 가이드 김민석군이 참으로 대견하고 고마울 따름이었다. 건실하고 순박하고 믿음이 가는 보기 드문 청년 김민석군을 이번 여행에서 만나게 된 것도 또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때때로 썰렁한 농담을 던지곤 했지만, 그의 따뜻한 마음과 정성 때문에 우리 일행은 그를 믿고 일주일 일정을 함께 했다. 이르쿠츠크에 맨 땅에 헤딩하듯 들어와 외국어 대학에 다니며 가이드를 하면서 학비와 모든 생활비를 벌어 자급하고 있다는 그를 보며 내 자식 내 조카도 아닌데 그렇게 대견할 수가 없었다. 얼굴도 잘 생겨 적지 않은 호감을 주었던 그와 헤어지며 악수를 건넸다. 수고 많았다고 고맙다고. 또 다른 자리에서 언제 또 만나게 될지 모르겠으나 20대 청년에게 적지 않은 것을 배운 시간이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의 메일주소도 받아두었으니 그때 이 말은 전할 수 있을 것 같다.
하~ 이 글의 마무리는 한국의 대구에서 쓴다. 14일은 장인어른 제사가 있는 날이라 대구로 부랴부랴 내려왔다. 하룻밤을 자고난 15일. 나는 장모님댁 거실에서 여행의 마지막 날 풍경을 적어 본다. ‘하~’라는 말을 시작으로 마무리를 시작할 무렵. 이르쿠츠크 국제공항에서는 서둘러 비행기를 타라는 신호가 들렸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노트북을 접고 짐을 챙겨 한국행 비행기로 몸을 옮겼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이르쿠츠크 국제공항은 공항이라고 하기에는 시설과 시스템이 너무도 후진적이었다. 아마도 비행기를 타고 가기 위해서 버스를 타고 가는 건 참 드문 일일 것 같은데, 이곳이 그랬다. 마치 한국사회의 70년대 풍경을 보는 듯 했다. 우리의 지난 70년대와 2010년대가 공존하는 러시아. 크나 큰 땅에서 핍박과 착취, 피의 역사가 공존했던 곳,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경제체제가 아닌, 권력과 탐욕을 가진 자들이 이름 모를 수 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줄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었던 곳, 러시아. 나는 이곳에서 2주를 채 머물지 못했지만, 그들의 역사를 통해 우리의 역사를 돌아볼 수 있었고, 광활한 자연을 통해 지구의 먼 미래를 읽을 수 있었다. 물론 빼놓을 수 없는 배움은 내 뒤를 돌아볼 수 있었던 여행이라는 것. 내가 지금껏 살아온 자리와 흔적, 생각들을 돌아볼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이번 여행은 충분한 가치와 보람이 있었다. 고맙다. 러시아~ 그리고 바이칼!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