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올레여행기] 10월 13일_ 14코스 예기치 못한 사고와 만남의 길에서
오늘은 더단빌리지를 비로소 떠나는 날이다. 지난 3일과 다름없이 젊은 여주인이 정성스레 싸준 꼬마김밥을 먹고 길을 떠났다. 떠나는 픽업도 여주인이 해 주었다. 14코스 출발지점인 저지마을회관에 차를 대고는 여주인은 차에서 내려 이별 인사를 해주었다. 참으로 예쁘게 사는 부부를 만나서 이번 곶자왈코스 올레길은 행복했다. 내후년에 대학동창들을 데리고 오겠다는 약속을 하고는 그렇게 헤어졌다. 아들과 나는 다시 14코스 종점을 향해 힘차게 출발을 했다.
저지오름 방향이 아닌 오른쪽으로 틀자 숲길이 나온다. 숲길 옆으로 탐스럽게 익어가는 귤나무들이 가득하다. 마음 같아서는 담장 밖으로 뻗어 나온 가지에 매달린 귤 하나를 따고 싶었지만 아직 채 익지도 않은 데다 힘들게 공을 들인 주인을 생각하니 차마 손을 댈 수가 없었다. 그렇게 다시 길은 이어지고 밭들이 나란히 늘어선 농로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후 14코스의 비경이라 일컬어지는 굴렁진 숲길을 지나자 돌길이 이어진다. 이 숲은 제주 여느 숲과 달리 구불구불하고 오르락 내리막이 많은 데다 돌이 많아 발바닥이 고생을 좀 하는 길이었다. 이 길에서 아들이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돌이 울퉁불퉁 깊게 패인 곳들이 많아 발목조심하라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뒤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이미 뒤로 넘어져 일어서지 못한 상태였다. 다행히 팔과 다리에 생채기가 난 것말고는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손에 들고 있던 아이폰 유리 밑이 박살이 나 보기 흉하게 됐지만 사용에는 지장이 없었다. 지난 며칠 동안 돌길이 많아 조심해야겠다 생각했지만, 설마가 오늘처럼 사고로 이어지고 말았다. 나중에 한림항으로 가는 길 편의점에서 약을 사서 바르는 것으로 이번 사건은 마무리를 지었다. 돌이켜 보면, 지나온 올레길을 큰 사고 없이 걸을 수 있었다는 것이 참으로 행운으로 보였다. 이보다 심하고 험한 곳도 많았기 때문이다.
숲과 돌담, 목재다리가 이어지는 아기자기한 숲길이 끝나는 즈음에 밭으로 들어가 좁은 밭길을 따라 들어간다. 야자나무들이 모여 있어 야자나무 삼거리라고도 불리는 길에서 오른편으로 선인장 밭길이 눈길은 끈다. 억새가 어우러진 무명천 산책로를 따라 무명천으로 나간다. 큰 비가 오기 전에는 말라 있다고 하던데 실제로도 물이 하나도 없었다. 강둑길을 하염없이 걸으니 심심해 라디오를 켜고 뉴스를 듣기도 음악을 듣기도 하면서 길을 걸었다. 억새가 정말 제주의 가을을 알려준다. 무명천 인근에서 다리가 아파 아니 발바닥이 아파 10분 동안 쉬었다. 그러다 다시 출발. 또다시 선인장밭이 나타난다. 이제 중간산올레가 끝나고 월령포구가 가까워졌다는 느낌이 든다.
그때 제주로 올해 부산서 전근을 온 동현후배에게 연락이 왔다. 오늘 식구들이랑 나들이를 왔는데, 점심이라도 함께 하잖다. 고마운 마음에 협재해수욕장에서 만나자 했다. 조금 씩씩하게 걸은 탓고 있고 가방을 맨 탓도 있어 그런지 오늘은 발바닥이 조금씩 아파온다. 그래도 벌써 월령리 마을 입구에 들어섰다. 포구까지 선인장이 반겨주는데, 월령포구의 광대한 선인장 길은 제주에서도 이곳뿐이라 한다. 바다의 바위 위로 선인장이 뻗어 있는 풍경은 참으로 신비롭다. 그보다 더 신비로운 것은 월령 앞바다의 바다 색깔이었다. 다양한 파란색으로 칠을 해놓은 바다의 색깔이 해변을 걷는 내내 눈길을 끌고 사진기를 갖다 대도록 했다. 모처럼 제대로 바다 바람을 쐬니 더욱 흥이 났다.
더욱 반가운 것은 저 멀리 아니 바로 눈 앞에 보이는 비양도. 월령해안부터 한림항까지 비양도를 볼 수 있는데, 비양도는 천 년 전인 1002년(고려 목종 5년)에 분출한 화산섬으로 제주 화산섬 중 가장 나이가 어리다고 한다. 바다산호가 유명하며 어족도 풍부한 곳인데, 비양도 분화구 안에는 한국에서 유일하게 비양나무가 자생하고 있다 한다. 이곳에 배를 타고 가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월령마을에서 포구까지 가는 길은 순탄치 않았다. 한동안 아름다운 목재길이 이어지다 바로 바윗길로 이어진다. 제법 길게 걷는 바윗길 때문에 조금씩 더 발이 아파왔다. 수산양식장과 일성콘도 옆길을 지나자 겨우 포장도로가 나타났다. 이제 우리가 만난 곳은 금능리. 마을길에 들어서면 굽은 길을 따라 돌담과 나지막한 집들이 자리 잡고 있다. 금능리의 옛이름은 ‘배령리’로 마을 중간에 잔과 같은 동산이 있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라 한다. 그러다 발음이 버랭이(벌레)와 비슷하게 들린다고 해서 금능리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한다.
이제 금능포구를 지나면 금능해수욕장이다. 이곳은 아름답고 넓게 펼쳐진 하얀 모레사장과 맑디맑고 다양한 빛깔의 바닷물이 마음을 설레게 하는 해수욕장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물속으로 뛰어들고 싶었다. 그렇게 더 길을 가자 바로 이어진 협재해수욕장이 보인다. 이곳은 오래전부터 관광객이 많은 명소답게 사람들이 꽤 많았다. 10분 쉬고 15km를 걸은 아늘과 나는 이곳 협재해수욕장의 끝자락에서 동현후배 식구들을 기다렸다. 오후 2시가 되자 동현후배 식구들을 만나 바로 뒤 고깃집으로 갔다. 삼겹살을 대접받으며 제주로 전근 오게 된 이야기며 제주에서 교사로 사는 이야기며, 이런 저런 얘기들을 나누었다. 참으로 열심히 사는 후배가 이곳 제주에서 사는 모습에서 나는 문득 내 모습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렇게 만난 점심시간이 지나고 고마움의 인사를 전하고 다음에 또 만날 것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그러고 보니 이제 제주에 또 아는 이가 생겼다.
아들과 나는 배를 두드리며 최종 목적지인 한림항으로 길을 떠났다. 아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가 그만 올레 리본 표시를 놓치고 말았다. 그렇게 다시 길을 찾아 내려 가던 중 좀 전에 연락을 주시며 한림항에서 만나자 하시던 양재성선생님이 차를 세우며 반갑게 맞이하신다. 봄에도 대접을 잘 받았건만, 이렇게 내려올 때마다 챙겨주시니 그저 고마울 밖에. 하기야 우리는 러시아도 함께 갔다 온 동지이기도 하다. 만나자 마자 양선생님은 귤을 사왔다며 한 봉지를 내민다. 귤을 정말 좋아하는 나를 어찌 알고. 모레 16코스 끝자락 지점이 양선생님의 별장 ‘이소재’가 있는 곳인데 그 때 한 상자를 대접하겠다며 웃으신다. 오늘 잔칫날이 있어 다녀오는 길인데 배가 너무 불러 함께 걷자 하셨다. 차를 세워놓고 양선생님은 그렇게 우리랑 한림항 종점을 향해 걸어갔다.
종점에 도착해 스탬프를 찍고 양선생님의 제안으로 택시를 함께 타고 차를 세워 둔 곳으로 갔다. 제안은 다름이 아닌 인근 금능리에 금능석물원을 소개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제주 돌하르방의 명인 장공익 옹이 만들어 놓은 공원이었던 것. 올레 안내 책자에는 소개 돼 있었으나 올레길로 조금 떨어져 있어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양선생님이 도와주신 것이다. 양선생님의 말씀으로는 제주를 찾는 손님들에게 꼭 소개를 하는 곳이라고. 이곳은 장공익 옹의 일터이자 작품전시장이라고 한다. 어려서부터 돌을 다루는데 능했던 장공익 명장은 속돌로 처음 돌하르방을 만들다가 이어 제주의 현무암으로 55년 넘게 돌하르방을 만들어왔다고 한다. 금능석 야외 전시장에는 돌하르방을 비롯해 해녀성, 흑돼지성 등 해학적인 조각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운 좋게도 80이 넘으신 장공익 옹을 관람하다 직접 뵐 수 있었다.
양선생님이 인사를 시켜 주지 못했다면 그냥 이곳에서 일하는 분으로 착각할 정도의 허름한 옷차림에 모자를 쓰고 나타난 그분을 직접 만나 뵐 수 있어 얼마나 영광이었는지. 직접 만나 더 들었던 이야기도 있다. 이곳을 자신이 존경하는 어느 스님을 위해 조성을 하다가 주위의 요청과 관심으로 돌하르방과 제주의 풍습, 역사를 보여주는 공간으로 만들었다는. 실제로 이곳에는 돌하르방 뿐만 아니라 제주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알 수 있는 장면과 소품들이 가득하다. 특히 해학적이면서도 제주 신화와 역사를 어우르는 어르신의 재치가 돋보이는 작품이 참으로 많다. 이곳을 챙겨보게 해주신 양재성선생님께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양재성샘은 우리를 게스트하우스까지 데려다 주시고는 이틀 뒤에 보자며 떠나셨다. 우리가 묵을 오멍가멍 게스트하우스는 비수기 철이 아니랄까 우리 부자 밖에는 손님이 없었다. 젊은 대학생들이 찾는 곳인지 곳곳에 붙은 사진들은 다들 젊은 사람들이다. 나이 60이 넘은 어르신이 혼자 운영하신다는 이곳에서 우리는 몸을 씻고 곧바로 좀 먼 길이지만 이곳에서 가장 중국음식을 잘한다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웬걸. 오늘은 문을 일찍 닫았단다. 어쩔 수 없이 다른 중국집을 찾아 대충 저녁식사를 하고 그렇게 우리는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의 노을과 항구의 불빛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걷는 길이 힘이 들었지만, 아들에게 미안했다. 미리 연락하고 갈 걸.
도착할 때는 이미 밤이 돼 버렸다. 이렇게 해서 14코스도 마무리를 지었다. 이제 내일은 15코스로 넘어간다. 조금씩 발이 아프고 걷는 힘이 약해지는 것이 조금 마음이 불안하다. 내일과 모레 속도 조절을 좀 해야 할 것 같다. 자~ 힘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