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그 아련한 추억들/아들과 제주올레를!

[제주올레여행기] 10월 19일_ 19코스 6km 지점에서 20코스 12km 지점까지_ 4.3의 상흔 너븐숭이를 거쳐 광해를 만나다.

갈돕선생 2013. 11. 22. 19:04

오늘은 무려 25km를 걸어야 하는 날이다. 마지막을 편하게 걷고자 오늘 조금은 길게 잡은 탓이다. 따라서 출발시각도 30분 앞당겨 8시 30분을 넘겨 숙소에서 나왔다. 인근 편의점에서 점심거리와 물을 사고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멀리 야영장 옆으로 해변을 내려다보듯 봉긋한 오름이 솟아 있다. 살찐 물소가 뭍으로 기어 올라오는 듯한 모양새라고 하여 서우봉이라 한다. 길을 걸으며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북쪽 봉우리에는 서산망이라는 봉수대가 있고 동쪽 기슭에는 일본군이 파놓은 21개이 굴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한다. 조금 힘들게 걸어 오르면 다시 평탄한 길로 이어져 일몰전망대에 이른다. 서우봉을 내려오니 자그마한 북촌일포구를 지나 너븐숭이 4.3기념관에 이른다,.

 

 

 

 

 

 

 

 

 

 

 

 

 

 

 

 

 

 

 

 

 

 

 

현기영의 소설 <순이 삼촌>의 배경이기도 한 북촌리는 4.3항쟁 당시 가장 큰 피해를 당한 마을이다. 1949년 1월 17일, 군인들이 가옥 대부분을 불태웠고 주민들은 마을 주변 이곳 저곳으로 끌려가 학살당했다. 기념관은 이러한 마을이 역사를 전하고 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학살을 해 어린 아이들도 많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기념관 앞에는 이때 죽은 어린 아이들을 묻은 애기무덤이 자리하고 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한날 한시에 죽어 무덤을 쌓을 시간도 없었던 제주의 아픈 역사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곳이었다. 북촌리는 전체 323가구 가운데 207가구 479명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아들과 나는 이곳에 잠깐 들러 억울하게 희생당한 영혼들에게 묵념을 했다.

 

북촌리를 지나 북촌등명대가 있는 북촌포구에 이르러 바닷길이 마무리 되었다. 북촌등명대는 1915년 12월에 세워졌는데, 민간에서 만든 제주 최초의 옛 등대라고 한다. 보기에는 너무 작고 기능을 다 했나 싶은데, 탑의 상단에는 잘 볼 수 없었으나 축조 연대를 새긴 비가 있다고 한다. 이곳에도 4.3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하는데, 당시 총탄 자국으로 비에 새긴 글자 일부분이 소실되었다고 한다. 북촌포구에서 다시 내륙으로 방향을 틀면 곶자왈올레가 시작된다. 워낙 곶자왈을 지나왔던 터라 낯설지 않은 풍경이나 날이 어두우면 매우 음습한 기운이 느껴질 만한 곳이었다. 이곳을 지나자 동복리마을운동장이 나타났다. 이곳에서 중간점검 스탬프를 찍고 잠시 휴식을 했다. 그런데 워낙 쓰레기가 많아서 그런지 모기 때문에 오래 머물지도 못한 채 아들은 모기에 몇 방을 물리고는 서둘러 일어서야 했다.

 

 

 

 

 

 

 

 

 

 

 

 

 

 

 

 

 

 

 

 

 

 

다시 숲길로 이어지는데, 이곳에도 말을 방목해서 키우는지 말똥이 꽤 많다. 숲길로 조금 더 들어가니 용암이 굳으면서 만들어진 너른 공터가 나왔다. 두 마을로 갈라지는 곳, 또는 가운데가 벌어진 곳이라 해 버러진동산이라고도 한단다. 곶자왈 숲길을 나오니 마을길과 밭길이 구불구불 길게 이어진다. 참으로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제주올레가 길을 내기 전까지는 여행자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조용한 마을이었다고 한다. 이 길을 마을 주민들이 기꺼이 내주었다니 그저 고맙다. 그렇게 길을 걸어 일주도로 버스정류장 앞 백련사에 이르러 이제 19코스의 끝 지점에 다 온 듯하다. 바로 김녕서포구가 바로 그곳이다. 김녕서포구에서 종착점 시작점 스탬프를 찍고 좀 더 걸어가 자그마한 마을 정자에서 점심을 해결했다. 마땅한 음식점이 없어 김밥과 귤로 해결했는데, 투정하지 않고 잘 먹어주는 아들이 참 고마웠다. 점심들 먹고 30분 넘게 쉬었다. 12.5km를 내리 걸어와 좀 쉬어야 했다.

 

 

 

 

 

 

 

 

 

 

 

 

 

 

쉬면서 페이스북을 보니 동료선후배들이 전교조 법외노조 건으로 서울로 집회에 참가하러 가는 소실을 전한다. 참으로 답답하고 우울했다. 아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자 이런 저런 질문을 한다.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냐고. 어떻게 되겠나. 합법이던 비합법이든 우리가 지키고자 했던 것은 조직이 아니라 참교육이 아니었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살려고 한다. 이 말까지는 아들에게 하지 않았지만. 다시 길을 걸어 도댓불을 지나니 희고 고운 모래사장 위로 맑고 푸른 물빛이 가득한 김녕성세기 해변이 보였다. 이 바닷가에는 제주의 옛 등대인 김녕도댓불이 있다. 1915년에 세워졌다가 태풍으로 허물어져 1964년경에 다시 지었다고 한다. 상단 가운데에는 호롱불을 놓는 대가 박혀 있고 등불 보호대를 설치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

 

바닷가를 걷다가 구불구불 돌담 밭을 지나니 월정마을로 들어섰다. 마을로 둘러 나오면 물빛이 고운 월정해수욕장이 나온다. 안내책자를 보면 이곳은 마을 사람들만 품던 아름다운 물빛이 여행자들의 입소문을 타고 어느새 명소가 되었다고 한다. 과연 그럴 만 하다고 느낀 것은 다양하고 특이한 카페와 숙소, 편의시설들 때문이었다. 명소라기보다 그렇게 또 이 지역이 망가져가고 있다는 생각만 들었다. 토요일이어서 그런지 젊은이들이 가득하다. 조용한 마을이 시끄러워졌다. 모래사장을 지나 행원마을로 들어섰다. 마을을 지나 다시 포구에 다다르니 멀리 작은 비석이 길가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 비석은 조선의 제15대 임금인 광해군이 제주로 유배를 와 배에서 내린 기착지임을 알리는 비였다.

 

 

 

 

 

 

 

 

 

 

 

 

 

 

 

 

 

 

 

 

 

광해군의 흔적은 이곳 행원포구에만 남아 있다고 한다. 인조반정으로 폐위된 광해군. 그는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태안을 거쳐 병자호란이 일어난 이듬해인 1637년에 제주로 보내졌다고 한다. 당시 인조는 광해군에게 유배 지역을 알리지 않았고 심지어 바다를 건널 때 배이 사방을 모두 가려 밖을 보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1637년 6월 6일 행원포구에 입항했는데, 배에서 내린 광해군은 그제서야 제주라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다음날 주성 망경루 서쪽에 위리안치 되었는데, 위리안치란 유배형 가운데 하나로, 귀양 간 곳의 집 둘레에 가시가 많은 나무를 두르고 그 안에 사람을 가두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더욱 생활하던 곳을 알 수가 없다고 한다. 광해군은 제주 유배 4년 4개월만인 1641년 67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이 행원포구는 어등포라고도 불렸는데, 어떤 바람이나 물때에도 구애되지 않아 전선 한 척과 병선도 감출 수 있었다고 한다. 행원에는 거대한 바람개비들이 바다와 땅 곳곳에 서 있어 이채로운 풍경을 연출한다. 바로 풍력발전단지. 이곳 행원리는 풍력발전과 농공단지, 양식단지가 들어서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고 한다. 실제로 길을 걸으면 이 변화를 모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제 다시 해안도로를 조금 따라 걸어가다보면 멀리 오른쪽으로 마을길로 들어서는 입구에 한동정자가 있다. 이제 우리 목적지에 거의 다 왔음을 알리는 곳이다. 아들과 나는 이곳에서 지친 발을 쉬게 하며 20분간 머물렀다. 그렇게 해서 찾아간 올레길에 있는 게스트 하우스, 게으른 소나기. 이름도 특이한 이곳을 찾자 터프한 여주인이 투박스럽게 손님을 맞는다. 불친절한 것이 아니라 투박하다. 어쨌거나 이 숙소가 아들과 내가 제주올레길에서 마지막으로 머무는 숙소가 됐다. 이제 이곳에서 하루를 머물고 아들과 나는 내일 마침내 제주올레의 마지막 길인 21코스를 걷는다. 막상 내일이 제주올레의 끝이라 생각하니 설레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하고 복잡하다. 저녁은 인근에 유명하다는 해물라면집으로 가려 한다. 자, 내일을 위해 오늘은 여기서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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