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홍세화의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를 읽고......
홍세화
선생님을 만나기 하루 전에야 나는 이 책을 다 읽을 수 있었다. 다 읽어내면서
다음 날 그 분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무척 흥분되어 있던 기억이 새롭다.
그렇다, 난 흥분해 있었다. 홍세화님의 처음 책과 이 책 두권은 나에게 커다란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차라리 오래 전에 읽지 않은 것이 잘 됐다 싶을 정도로 지금의 내 처지에서 가장 알맞은 책이었지 않나 싶다. 그리고 그 분의 정서와 일면의 성격이 나와 일정정도 괘를 같이 하고 있다는 생각에 무척 호감이 가는 인물이기도 하여 더욱 그분을 만날 수 있다는 것에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이 책을 처음 읽기 시작했을 때는 앞의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라는 책의 감흥에 흠뻑 빠져 있어선지 그분의 눈으로 바라본 프랑스의 문화를 꼼꼼히 살피는 부분에서 다소 주줌하기 시작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한국사회와 프랑스 사회의 만남이라는 세 번째 장을 접하기 시작하면서, 더구나 교육문제가 본격적으로 다뤄지면서 다시금 그의 세심한 프랑스와 한국문화 읽기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곳에서는 우리가 평상시에 쉽게 지나쳐 버리던 생각들, 아니면 늘 생각하며 답답해던 얘기들을 프랑스의 예를 통해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우선 그는 세 번째 장에서 교사는 스승인가, 노동자인가?라는 질문에 그는 아주 쉽게 대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즉, 그는 교사들이 스승이면서 노동자가 되기를 바란다. 제자들에게는 스승이 되고, 국가나 학교법인에게는 노동자가 되면 된다는 것이다. 그는 교사가 스스로 노동자라고 주장할 때, 제자와 사회에 대하여 스승이 되는 첫 걸음이라고 말한다. 한국사회가 노동자의 힘으로 일구어진 사회임에도 노동자를 업신여기는 사회에서, 국민 대다수가 노동자임에도 그 노동자성을 업신여기는 사회에서 올바른 스승상은 세워 질 수 없음을 지적하고 있다.
다음으로 그는 한국의 교육을 '불평등에 기초하여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사회 현실을 보이지 않게 가리면서 합리화 시키는 억업의 과정'으로 정의하고 있다. 즉, 우리 교육은 잘 난 이들을 '추려내기' 위한 피나는 경쟁의 과정이라면, 프랑스의 교육은 못하는 이들을 잘난 이들에게로 '끌어 올리기'위한 적어도 불평등이 심화되지 않도록 교육이 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고 한다. 즉, 프랑스 사회는 사회구성원 전체를 그 자원으로 삼아 모두 끌어 올리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차이가 보다 더 올바르고 온건하고 평등한 사회를 위한 의지와 정책의 유무에서 찾고 있다.
이외에도 수학과 글쓰기를 통해서 본 그들의 철학교육과 글쓰기 교육, 언론의 객관성, 외국어를 대하는 태도, 똘레랑스에 대한 사족을 달고 있다. 나아가 네 번째 장에서는 프랑스가 말하는 사회정의와 질서, 사회복지, 사회체제를 보는 눈 등은 우리가 되씹고 곱씹어 봐야 할 얘기들로 가득차 있다.
그의 강연을 들었던 사람들의 일부는 우리 나라를 떠나고 싶었다고 한다. 프랑스와 같은 선진나라에서 살고 싶더란다. 나도 그의 책 두 권을 읽으면서 순간순간 그런 생각이 문득문득 들었던 까닭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많은 면에서 적지 않게 답답한 구석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홍세화 선생은 이 두권의 책에서 프랑스 사회의 제국주의적인 잔재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이면들을 통해 그들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이 사는 사회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나아가 홍세화 선생은 밀양지회 강연 첫머리에 선진국의 문화에 대한 맹목적인 동경에서 벗어나길 바랬다. 즉, 그는 프랑스 사회를 존중하고 많은 부분을 우리가 배우길 바라지만, 그 자신은 한국인이었으며 기본적으로 한국사회가 나를 뿌리깊이 규정하고 있기에 언제나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프랑스 사회를 떠나 이 곳에 올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이 한국사회가 더 올바른 사회로 변화하길 희망하며 그 변화를 위해 싸우며 살아갈 것이라 단호히 말하고 있었다.사실 그분의 책은 밀양지회가 그 분을 밀양으로 초청하지 않았다면, 나는 좀 더 그분을 늦게 만나보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일년에 한 번씩은 그 분을 글로 다시 만나고 싶다. 아니 늘 만나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다. 그 삶이 내 삶이 될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