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미즈타니 오사무의 '얘들아, 너희가 나쁜게 아니야'를 읽고......

한 달 전인가 'TV, 책을 말하다' 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난 미즈타니 오사무라는 일본의 한 야간고등학교 교사의 삶을 이야기 하는 책을 소개 받았다. 그는 참으로 독특한 삶을 사는 사람이었다. 아니 독특함을 넘어 누구도 할 수 없는 삶을 사는 사람이었다.
밤이 되면 길거리로 나와 위험을 무릅쓰고 약물중독과 자해행위, 폭주족 또는 집을 나온 청소년들에게 집으로 돌아갈 것을 권유하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고 얘기를 들어주며 그들의 아픔을 함께 하는 교사 미즈타니 오사무의 삶을 감히 누가 흉내 낼 수 있다 할 수 있겠는가.
그의 손가락 중의 하나는 이렇게 12년간 길거리 생활을 하면서 한 청년의 삶과 바꾸어야 했고, 책에는 말이 없었지만 지금도 한 밤 도시 길거리에서 자신과 상관없는 아이들을 지켜보는 그의 몸은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었다. 한국 방송에서 그를 직접 찾아 그와 함께 비오는 길거리를 나섰을 때 그는 우산을 쓰려 하지 않았다. 그 까닭은 그들을 지켜보는 자신이 들고 있는 우산이 그들에게 무기로 여겨질 수 있어 그들에게 다가가는 장애물이 될 수 있다는 생각때문이었다.
이미 일본 각종 방송을 통해 알려진 그리고 유명(?) 인사가 된 그는 길거리의 청소년들로부터 스타대접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눈길은 도시의 밤을 헤매는 아이들에게 있었다. 어쩌면 '팔자'로 보여지는 그의 삶을 한 시간동안 바라보면서 교사인 나 또한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됐다. 그리고 그의 삶을 꼭 읽고 싶었다.
이 책에서 그는 길거리에서 만났던 수 많은 아이들과의 인연과 그 과정을 얘기하고 있다. 때로는 결말이 좋기도 하지만, 불행해지거나 세상을 뜨는 아이들의 얘기에서부터 가난하고 외로웠던 자신의 삶, 교사로서의 삶을 통해서 자신이 지금의 위치까지 오게된 이유를 짧고 간결한 문체로 독자들에게 다가선다.
이 책을 통해서 난 일본이라는 사회와 문화를 생각해 보았고, 교사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아이들 앞에서 난 어떤 교사일까 하는 생각들을 해 보았다.
자본주의 팽창의 일선에 섰던 일본. 이후 불황의 늪에서 좀처럼 헤어나지 못하는 일본사회에서 드러나는 여러 가지 모순 가운데 여전히 가난이란 것이 그 사회에도 존재한다는 점, 불황에서 빚어지는 구성원들의 목표상실, 그로 인한 가족사회의 붕괴, 불합리한 교육제도와 교육의 경쟁체제에서 빚어지는 일본 학생들의 왜곡된 삶이 미즈타니 오사무라는 사람을 만들어냈을런지도 모른다.
그는 말한다.
"풍요롭게 사는 사람들과 가난하게 사는 자신의 삶을 비교하면 슬퍼지게 된다. 그러나 가난함 그 자체는 결코 불행이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가난해도 충분히 행복하게 살 수 있다. 나는 그 사실을 어릴 때부터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행복한 사람이든, 불행한 사람이든 태어난 이상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살아가는 과정에는 많은 행복과 슬픔이 함께 한다. 그리고 슬픔보다 기쁨이 많은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스스로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이런 그의 말을 들어보면 마치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어느 고전적 자본주의 학자의 외침을 듣고 있는듯 하다.
난 가난을 모른다. 배를 굶은 적도 없다. 우리 아버님의 천성적인 근면함과 헌신적인 노력으로 자기 자식 밥 굶기지는 않겠다는 약속을 우리 식구들에게 지켜 보이셨다.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난 진정 가난을 모른다. 하지만, 가난이 맘 먹기에 달렸다는 말은 수긍할 수가 없다. 그의 말대로 어쩌면 그건 그의 경험의 한계에 머물러 있을지도 모른다.
여전히 우리 주변은 가난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에게 맘을 고쳐 먹으라고 하기엔 삶이 너무 고달프다.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은 그리고 위정가과들과 자본가들은 그들의 삶을 쉽게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지 않고 있다. 어쩌면 그의 생각은 너무도 단순하며 순진하기까지 하다. 그가 길거리에 있는다하여 과연 얼마나 일본사회의 청소년 범죄가 줄어들었으며 약물중독의 폐해가 줄어들었는지 난 모르지만 아주 미미할 거라는 생각을 해 본다. 어쩌면 그는 소용없는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바보같이.
하지만, 과연 우리들 중 과연 누가 그의 삶에 비난을 할 자격이 있을까라는 면에서 생각해 보면 얘기는 달라진다. 그는 얘기한다. 꽃이 시드는 것은 꽃을 가꾸는 사람의 잘못이라고. 아무리 시든 꽃이라도 생명의 씨가 남아 있다면 가꾸는 사람의 정성으로 얼마든지 다시 예쁜 꽃으로 살려낼 수 있다고. 아이들은 어떠한 잘못도 없으며 모든 책임은 어른들의 몫이라고.
그가 구조적 시각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해서, 과연 그를 못난 사람으로 규정할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다고 본다. 우리는 이제껏 거대담론에 짓눌려 우리들 삶의 가치를 무시한 적이 너무도 많지 않은가. 이른바 사상투쟁과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밑바닥 가냘픈 삶들은 그저 그렇게 힘없이 무너져 내려야 하지 않았던가. 교육계만 보더라도 여전히 우리 아이들은 입시라는 교육체제에 짓눌려 자살을 택하거나 삶의 목표를 잃어 버리고 하루종일 학교라는 콘크리트 건물에서 강제된 꿈을 꾸고 있지 않는가.
어쩌면 미즈타니 오사무 교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끊없이 추락하고 지치고 외로운 사람들의 자녀들의 친구가 되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민주와 민족을 외치고 참교육을 외치는 거대 담론가로 뿌리 박고 있는 어른들의 뒷편에서 누구하나 자신의 얘기들 들어주지 않았던 어른들을 원망하며 살아가는 그 아이들에게 당장 급한 것은 그들의 얘기를 들어줄 사람일 것이다. 미즈타니 오사무는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해 주었고, 그것이 많은 이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는 이유가 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삶의 모든 것이 물화되고 삶의 관계가 단절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점점 외로워지고 이른바 소외현상은 점점 더 심해지고 있는듯 하다. 아이들의 방황만큼이나 어른들의 방황도 심각하지 않나 싶다. 미즈타니 오사무는 그 모든 것을 사람들의 책임, 구체적으로 어른들의 책임이라고 말하지만, 궁극적으로 그 어른들도 어쩌면 사회적 피해자일 가망성이 매우 높다. 다만, 그는 어른보다 약자인 청소년에게 교사로서 다가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결국 그는 이 세상 어른들이 모두 바뀌면 아마도 더 이상 상처받는 아이들이 없을 거라 믿는다. 어쩌면 참으로 순박해 보이는 그의 논리에 난 토를 달고 싶지 않다. 너무도 헌신적이었던 그의 삶을 읽고 감히 난 당신의 논리는 한계가 뚜렷하다는 말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에게 그렇게 말하더라도 그의 삶은 조금도 변함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오히려 내가 그에게서 충고를 받아야 한다. 미즈타니 오사무 교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당신이 거대담론을 들고 세상을 논하고, 교육을 논할 때 바로 당신 앞에 있는 아이들의 외로움을 해결해 줄 수 있었냐고. 어쩌면 지금 당신의 아이들은 당신이 친구가 되어주길 원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그에게 도움을 받은 아이들이 그에게서 참으로 가장 고마웠던 말이 '괜찮아'였다고 한다. 나도 언젠가는 외로운 아이들에게 '괜찮아'라는 말을 하며 다가갈 수 있을까. 참으로 삶이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닌 것 같다.
"저 도둑질한 적 있어요."
괜찮아.
"저, 원조교제했어요."
괜찮아.
"저, 친구 왕따시키고 괴롭힌 적 있어요."
괜찮아.
"자, 본드했어요."
괜찮아.
"저, 폭주족이었어요."
괜찮아.
"저, 죽으려고 손목 그은 적 있어요."
괜찮아.
"저, 공갈한 적 있어요."
괜찮아.
"저, 학교에도 안 가고 집에만 쳐박혀 있어요."
괜찮아.
어제까지의 일은 전부 괜찮단다.
"죽어버리고 싶어요."
하지만 얘들아, 그것만은 절대 안 돼.
우선 오늘부터 나랑 같이 생각을 해 보자.
-미즈타니 오사무 <얘들아, 너희가 나쁜게 아니야>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