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김진경의 '미래로부터의 반란'을 읽고......
오랜만에 김진경선생님의 글과 마주할 수 있었다. 대학시절 ‘스스로를 비둘기라고 믿는 까치에게’를 읽은 뒤의 만남, ‘지금은 우리가 만나서’라는 민중가요가 아직도 입가에 맴도는 세대여서 인지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읽어 본 책이다. 얼마 전 그분은 대통령 비서실로 들어가셨다. 뜻밖의 행보에 놀라기도 했지만, 이 책에서 그분의 세상 보는 눈의 변화는 어떤지, 새로운 교육의 화두로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 조금은 알 수 있었다.
올 초 김진경선생님은 박복선선생님(하자교육센터 부소장)과 우리교육 초청으로 <교육운동 새로운 화두가 필요하다>(2005년 2월호)라는 제목을 달고 대담을 가졌다. 몇 가지 논란거리들이 있었지만, 대부분 이 책의 내용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때마침 이계삼선생님(밀양지회 사무국장)은 <가난과 교육>이라는 제목으로 김진경선생님의 말씀에 되묻는 긴 글을 ‘월간 우리교육’에 보냈고, 우리교육 편집부는 의미 있는 문제제기라는 판단에 4월호에 그 글을 싣게 된다. 이어 5월호에는 서근원(‘수업을 왜 하지’의 저자)선생님에 의해서 다시 두 분의 이야기를 다시 짧게 되짚어 보는 과정을 거치기도 했다. 이렇듯, 김진경선생님의 생각은 책이 나오기 전부터 두루두루 여러 사람들에게 얘깃거리를 던져주며 교육과 사회, 그리고 우리시대의 어른과 아이들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이 책에서 김진경선생님이 끊임없이 문제 삼는 우리교육의 가장 큰 문제는 여전히 깊게 우리 사회에 뿌리 박혀 있는 근대성과 그 핵심인 이성이다. 그는 이제 점차 근대성의 틀(이성의 우위) 안에서 훨씬 벗어나고 있는 우리 아이들의 변화(몸의 우의)를 눈을 크게 뜨고 지켜봐야 한다고 얘기한다. 한편으로 그 변화는 너무도 빠르고 폭이 커서 제대로 보지 않고 대처하지 않으면 불안과 두려움으로 우리 사회는 뒷걸음만 칠 것임을 경고하고 있다. 이러한 생각을 그는 1장 ‘당신의 아이들이 전혀 다른 인종 같아 보인다구요?’와 2장 ‘아이들에게 중요한 일은 왜 학교 화장실에서 일어날까?’에서 자신의 딸 얘기와 그가 복직해 가르쳤던 아이들의 이야기로 읽는 이들의 눈을 붙잡아 놓고 있다. 특히, 이 책 3장 ‘난쟁이를 만드는 작은 통, 학교’, 4장 ‘입시 검투사가 된 아이들’에서 이론으로 어렵게 이해해야 했던 근대 학교의 문제들과 입시제도의 문제를 아주 쉽게 풀어내고 있다. 아울러 ‘몸의 우위’를 앞세우는 ‘미래들의 반란’을 ‘이성의 우위’를 앞세우는 어른들이 어떻게 이해해야 하며, 그들을 위해 어른들이 무슨 도움을 주어야 하는지를 설득력 있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에게 근대적 이성이 지배하는 우리네 학교는 이제 우리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배울 수 있는 곳이 되지 못함은 물론, 오히려 그 잠재력을 억압할 곳일 뿐이다. 그는 이제 우리 어른들은 우리 아이들이 ‘이성의 우위’가 아닌 ‘몸의 우위’를 내세우는 세대임을 탁 터놓고 솔직히 인정하자고 말한다. 아울러 새로운 사고와 관심을 가지며 살고 싶어 하는 그 아이들에게 우리 어른들은 낡은 제도와 사고로 억압하려 들지 말아야 한다고 읽는 이를 설득한다. 진정 아이들이 배우고 싶은 것과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찾아내 스스로 행복한 길을 선택하도록 변화된 시스템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 어른들이 그들을 위해 이러한 노력을 하지 않으려 한다면,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버린 근대화의 악몽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우리 사회는 끝내 죽어버릴지 모른다며 읽은 이를 내내 긴장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한편, 이 책 3장의 마지막 주제 ‘추락에 대한 불안, 중산층’은 조금은 논란거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부분이었다. 사실, 김진경 선생은 이미 ‘월간 우리교육’ 2월호에 이 부분에 대한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내용인즉, 그는 1990년대 초 교육운동의 상층부는 시간이 흐를수록 사회의 중산층 상층부의 계층적 이해관계에 갇혀 버렸다고 말한다. 아울러 전반적인 운동양상이 중산층으로 확대됨에 따라 오히려 운동주체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얽매여 학교교육을 변화시킬 기회를 놓쳤다고 답답해한다. 이런 주장에 오해의 소지가 있다는 박복선선생(하자교육센터 부소장)의 말에 그는 특정계층이나 집단의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교육에 대한 합의 같은 게 무너지다 보니 결과적으로 자기 집단의 이해관계로 자꾸 가 버리는 결과를 야기했다는 뜻이라고 풀이하며, 이는 어떤 개인의 책임보다는 크게 보니 그렇더라는 답을 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전교조는 이미 중산층 상층부에 편입되어 이해관계에 얽혀 제대로 된 전망을 제시하지 못하는 집단이 돼가도 있다는 얘기였다.
결국, 김진경 선생님은 지금 시점에서 우리 어른들이 할 일은 특정계층이나 집단의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사고와 정책이며 앞으로 지역자치 단체와 학교, 교사에 이르기까지 전체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흐름과 운동이 전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시스템 변화에 대한 그의 간절한 희망은 마지막 5장 ‘사고의 대전환기, 버려진 것들의 커밍아웃’에서 잘 나타나 있다. 하지만, 이렇듯 마지막까지 어둡고 절망적인 얘기만을 풀어냈던 그는 ‘희망은 있다’라는 에필로그로 자신의 얘기 속에서 절망을 발견했던 읽는 이들을 달래주려 한다. 그는 ‘희망’을 ‘타자에 대한 상상력’에서 찾고 있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남의 이야기를 자신의 경우로 상상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남의 경우로 상상하는 이 타자에 대한 상상력이야말로 인간만이 가진 고유한 능력이라는 것. 이는 ‘타자에 대한 상상력이 살아 있는 사회’야 말로 스스로 변화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살아 있는 사회임을 말하는 것이며, 우리 사회는 바로 그러한 변화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고 그 전환의 시기에 와 있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 그가 지적하고 있는 ‘근대성과 이성의 비판’은 그다지 새로운 얘기는 아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 사회의 ‘탈근대화’를 얘기하며, 교육계에 ‘구성주의’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전개되곤 했고, 언론과 학계, 출판계에서는 그것을 ‘상품화’하는데 주력해왔던 것은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지금까지 그러한 문제 삼기와 집적거림이 우리 사회와 교육을 변화시키는 데는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데 있다. 그 까닭은 그동안 우리는 ’재생산론‘에서 그랬듯이 근대성과 이성, 과학적 이데올로기를 정면으로 비판하며 등장한 ’탈근대화론‘을 유럽과 미국의 시각에서 그대로 수용하기에 바빴지, 우리의 눈으로 세계의 변화 속에서 우리 사회와 교육을 분석하여 대안을 마련하려는 엄두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 바람도 잠시 멈춘 것 같았던 요즘, 김진경 선생님은 자신이 직접 겪었던 학교현장과 딸아이의 삶을 통해 변화하는 우리 아이들의 삶을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고자 했고, 지켜본 결과를 그의 표현처럼 ’감성적 고찰‘이라는 이름을 달아 우리 사회의 변화를 피부로 느끼는 얘기를 세상에 내 놓았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고찰도 다른 환경과 처지에 있는 사람의 눈에는 딴 나라 이야기로 들리는 듯하다. 앞서 말한 것처럼 밀양의 이계삼 선생님은 김진경식 세상 읽기에 의문을 던졌다. <가난과 교육>이라는 제목에서 그는 ‘경상도 땅 밀양의 비평준화 지역 2등 그룹에 속하는 인문계 고등학교 평반’의 일상은 김진경선생님이 보신 아이들의 일상과 다르다며, 사회와 교육을 바라보는 시각이 한 쪽 측면만 얘기되고 있음을 경계했다. 이와 같은 주장을 서근원은 '우리나라 교육운동계의 대부라고 할 수 있는 두 사람(박복선 포함)에게 뼈아픈 한마디였을 것'이라며 공감을 나타내기도 했다. 이계삼 선생님은 ‘힘’과 ‘시스템'이 혹은 ‘탈근대적 담론’으로 정연하게 완비된 어떤 틀이 결코 좋은 교육적 조건이 될 수는 없다고 믿는다며, 교육은 그저 땀이자 숨결이고 사람일 뿐, 그 정신의 가난함 외에 어떤 완숙한 물적 조건도 부차적이며, 오히려 해악일 뿐이라고 반론을 제기한다. 아울러 교육운동의 생산적인 담론은 전교조를 위시한 교육운동 진영이 '가난'과 '결핍' 그리고 '힘없음'을 스스로 선택할 용기를 가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교육 공공성'이라는, 현재로서는 중산층의 가치에 기울어진 논리에 주목하는 게 아니라 중산층이 자기 한계를 넘어 가난한 자들과 연대할 때, 우리 교육운동이 그 아름다움을 회복할 길이 열린다는 주장을 내 놓기도 했다.
하지만, 어쩌면 이들은 같은 얘기를 자신들이 살고 있는 환경에서 각각 다르게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아마도 빠르게 압축 경제성장을 이뤄왔던 우리 사회에 전근대성과 근대성, 탈근대성이 모두 섞여 있기 때문일 것이다. 김진경, 이계삼, 두 분이 말하는 사회와 교육, 모두 어느 쪽이 옳다고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다. 문제는 이러한 현상이 우리나라의 모습이며 양쪽을 무시한 어떠한 시각도 우리 교육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래서 어렵고 그래서 한편 절망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분명 세상이 ‘변화’하고 있다는 점, 우리 아이들이 ‘변화’하고 있다는 점, 그 ‘변화’에 근대성의 대표적인 기관인 ‘학교’가 그 변화의 속도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점, 아니 애써 무시한다는 점은 분명하지 않을까 싶다.
무척 가슴 아픈 일이지만, 얼마 전 전방초소에서 벌어진 ‘총기 난사 사건’은 근대성의 또 하나의 기관인 ‘군대’의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각종 언론과 시민단체에서는 너나할 것 없이 신세대 장병들의 의식 변화에 대처하지 못하고 군대가 과거의 근대적 사고로 억압만 반복할 뿐이라며, 우리 군대의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그 모습을 보며 너무도 닮아 있는 우리 학교 현장을 돌아본다. 사실 이미 크고 작은 많은 사건과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곳은 학교가 아니던가. 각종 폭력과 따돌림, 수업거부, 시험부정, 두발단속 거부, 초등학교 일제고사 부활이라는 우리네 학교문화를 보며 우리는 다시금 ‘학교의 변화’ 나아가 ‘교육개혁’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우리가 바뀌어야 할 차례인 것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