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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정민의 '미쳐야 미친다'를 읽고......

갈돕선생 2005. 12. 29.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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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옛날 사람들을 떠올리게 되면 미개하고,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고, 봉건적이고 계급적인 사회에 묶여 갑갑한 생활들을 했던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기 쉬웠다. 가끔씩 옛 물건들과 사적을 돌아보더라도 어떻게 옛날에 이런 물건, 이런 생각, 이런 손놀림이 있었나 하고 놀라기도 하지만, 그 바탕엔 옛 시절에 대해 갖는 현대인들의 어설픈 우월감이 배여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런 류의 책을 접하고 나면, '조선의 뒷골목 풍경'(강명관, 푸른역사)에서 처럼  시대가 다를 뿐 그곳도 사람이 사는 세상이었고 오늘날과 전혀 다를 것 없는 일들이 수시로 일어났다는 걸 너무도 쉽게 알게 된다.

 

'조선 뒷골목 풍경'이 반상의 문화로 점철된 조선시대 계급사회의 벽을 깨드리며 독자에게 사람냄새 물씬 풍기는 어설픈 조선사회의 뒷면을 보여주었다면, '미쳐야 미친다'는 조선후기 사회의 격정적인 흐름 속에서 뛰어난 능력을 가졌음에도 주류사회로부터 끝내 외면 당하고 아웃사이더 역할에 머물러야 했던 이들의 삶들을 얘기해 주고 있다.

 

첫번째 꼭지는 책 제목에 가장 잘 어울던 벽(癖)에 들린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독보적인 천문학자였던 굶어 죽은 천재 김영, 독서광 김득신 이야기, 책에 미친 바보 이덕무 이야기, 뛰어난 문장가였음에도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죽어갔던 박제가와 서문장, 노긍. 첫째 꼭지에서 미천한 신분, 또는 서얼이라는 차별적 대우 속에서 그것도 조선이라는 유교적 윤리가 기본이었던 사회에서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요즘 말하는 마니아적 삶을 살았던 그들에게서 자연스럽게 나는 나를 찾아 보았다. 솔직히 특별히 관심이 가는 인물은 없었다. 나 또한 책을 즐겨 읽는 편이어서 김득신과 이덕무 이야기에 관심을 가졌을 뿐. 다만, 이덕무라는 사람이 그저 책만 읽은 것이 아니라 책을 통해서 자신의 주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자기 확신을 만들어 냈던 지점에서 잠시 머물렀던 기억이 난다.

 

두번째 꼭지와 세번째 꼭지는 그 옛날 주류사회에서는 인정받지 못했던 뛰어난 인물들의 혜안과 그들과 인연을 맺었던 이들의 얘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2장 '맛남 만남'에서는 내 주변사람들을 떠 올릴 수 있었고, 진정 내가 내 이야기를 속 시원히 드러내고 만날 수 있는 사람은 누굴까라는 생각에 머물기도 했다. 3장에서는 '일상 속의 깨달음'이라는 주제로 세상을 통찰했던 인물들의 면면을 둘러보고 있다. 특히 난 '홍길주의 이상한 기행문'이라는 곳에서 보여준 이 대목에서 멈춰 섰다.

 

" 사람이 일용기기와 보고 듣고 하는 일이 진실로 천하의 지극한 문장이 아님이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스스로 글이라 여기지 아니하고 반드시 책을 펼쳐 몇 줄의 글을 어설프게 목구멍과 이빨로 소리 내어 읽은 뒤에야 비로소 책을 읽었더다고 말한다. 이 같은 것은 비록 백만 번을 하더라도 무슨 보람이 있겠는가?"

 

이어 정민이 이런 평을 덧붙인다.

 

"꼭 문자로 된 종이책을 소리 내어 읽는 것이 독서가 아니다. 삼라만상이 다 문자요 책이다. 삶이 곧 독서다. 죽은 지식, 아집과 편견만을 조장하는 지식은 지식이 아니라 독이다."

 

삶과 지식이 뚜렷하게 구분되었던 시절, 이 같은 홍길주의 얘기는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주는 교훈 또한 크다. 학교현장만 해도 그렇다. 종이로 공부하고 종이로 평가하여 점수를 매기고 줄을 세워 구분지어 선발하는 전형적인 자본주의적 교육문화 속에서 삶의 진실과 노동의 가치가 들어갈 틈바구니는 없어 보인다. 아이들을 가르치며 몸으로 함께 하는 교사이기보다 상품화되고 규격화된 낡은 지식으로 점수를 채워 일찌감치 가르침에서 떠나려 하는 교사가 늘어나고 있다. 삶과 지식이 구분되고 나누어져 죽은 지식을 가진 관료들이 교사와 학부모, 학생들의 삶의 가치를 재단하고 훼손시키고 있다. 죽은 지식은 지식이 아니라 독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을 읽고 옛 조상들의 내면의 모습, 그들의 갈등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이러한 모습은 너무도 우리들의 현실과 닮아 있다는 생각이다. 그 닮음에서 순간 허무함을 느낀다. 미쳐야 미친다를 읽으면서 삶의 의욕을 기대했었지만, 난 삶의 허무를 더 느꼈다. 나이 탓인가 모르겠다.

 

출처 : 부산교대 맥
글쓴이 : 박진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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