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하종강의 `그래도 희망은 노동운동`을 읽고
(사) 부산교육연구소 삶과 교육, 여섯째편 원고
내 무기의 최저값
- ‘그래도 희망은 노동운동’을 읽고
박진환(김해 어방초 교사)
지난 오월 십일일, 김해시 사회복지회관에서 나는 조금은 피곤한 얼굴로 들어서는 한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나는 그 사람을 그렇게 네 번째 만났다. 잠시 뒤, 그가 단상에 올라 노동운동을 천시하는 천박한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목소리 높여 힘 있게 외칠 때, 나는 사년 전 그를 처음 만난 그 때를 떠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월드컵 열풍이 조금씩 사그라질 무렵인 이천 이년 늦가을, 그 당시 우리나라는 한창 공무원 노조가 조직화될 무렵이었다. 마침 밀양시 공무원 노조에서는 하종강선생을 강사로 초대를 했다. 이제 갓 전교조 밀양지회 사무국장을 맡아 일을 배우던 나는 하종강이라는 사람이 누군지도 모른 채, 지회장님의 안내로 지회식구들 약 스무 명과 함께 밀양시 강당을 찾았다. 이제 막 시청 강당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오백 사람이 넘게 앉을만한 넓고 큰 강당은 무척 썰렁해 보였다. 공무원 노조 사람들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우리 지회 조합원 사람들 스무 명이 자리를 함께 하여 대충 오십 명 가량이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그 강당의 10%조차 채우지 못한 상태였던 것이다.
멀리서 어려운 발걸음을 한 하종강이라는 강사는 이런 분위기에서 과연 그 넓은 허공에 대고 무슨 힘으로 두 시간이나 말을 할 수 있을까? 어느새 나는 강의에 대한 기대보다는 오히려 그 외로운 강사의 마음을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그가 무슨 말을 어떻게 할지 지켜보던 나는, 놀랍게도 두 시간에 이르는 강의 내내 그의 입과 그의 얼굴에서 눈을 땔 수가 없었다. 마치 오백여 좌석을 꽉 채운 분위기인 듯 그의 입은 다부졌고 목소리에는 힘이 넘쳤다. 무엇보다 그의 말에는 ‘희망’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단지 무조건적이고 감성적인 ‘희망’이 아닌, 우리나라 역사와 세계의 역사를 통찰하며 노동운동의 꿈을 얘기하는 ‘맞서 싸우는 희망’이었다. 그는 ‘사람이 사는 세상’을 만드는 희망의 역사를 주도할 운동은 바로 노동운동이며 바로 일하는 사람이 곧 변혁의 주체임을 우리 스스로 깨달아야 함을 역설하고 있었다. 막연하게 사회과학적 이론에서 ‘희망’을 찾아오던 나는, 구체적인 노동자의 삶 속에서 너무도 쉽게 ‘희망’을 찾아내며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희망, 자신감을 심어주는 그의 독특한 매력에 빠져들고 말았다.
이렇게 감동적인 첫 만남을 한 뒤로, 나는 일 년에 한 번 꼴로 그를 만나게 된다. 그를 만났던 네 번의 강연마다 똑 같은 내용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활동가면 활동가에 맞게, 일반교사면 또 그에 맞게, 각기 이야기들을 풀어내면서도 늘 ‘노동’과 ‘꿈’이라는 그가 말하고 싶은 주제를 강의를 듣는 모든 이들에게 쉽고 뚜렷하게 심어 주었다. 이따금 자신의 강연을 여러 번 들었을 분들에게는 미안하다는 말로 강연을 시작을 하지만, 내가 들은 바로 비슷한 내용이더라도 거의 그 내용은 전과 같지 않고 늘 새로웠다. 특히, 올 일월 전국에서 몰려 온 약 사백 명의 국어교과모임 선생님들을 앞에서 몸소 온 나라를 다니며 확인했던 열악한 노동현장의 현실을 울먹이며 전해줄때, 그는 나를 비롯한 모든 선생님들의 손수건과 휴지를 꺼내게 했고 두 시간 내내 젖은 얼굴을 훔치게 했다.
얼마 전 하종강은 ‘그래도 희망은 노동운동’이라는 책을 펴냈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책을 내고자 하지 않았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 그를 믿는 이들이 어느 날 이제껏 그의 누리집을 비롯한 여러 곳에 올렸던 글을 거칠게 모아 묶어 책을 내자며 가져왔던 것이다. 이는 노동운동의 정당성과 희망을 얘기하는 하종강의 목소리를 좀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 하는 동지들의 바람 때문이었다. 이제 나는 이 책 속에 담긴 다섯 개의 꼭지를 따라가며 그가 말하는 ‘노동’과 ‘꿈’을 부족하나마 대신 전하고자 한다.
노동운동을 비판하려면
지난 해 민주노총의 간부의 비리가 세상에 드러나 노동운동의 위기, 진보운동의 위기라며 언론이 호들갑을 떨 때, 나는 나의 절친한 친구와 민노총과 전교조 문제로 말다툼을 심하게 했던 적이 있다. 그 친구는 일반 대중과 일반 교사의 정서를 앞세우며 전교조가 노동 운동 쪽에 무게를 두는 것은 이제 시대착오적이며 어서 민주노총과 거리를 두는 것이 전교조가 사는 길이라 했다. 그래서 나는 전교조가 민주노총과 관계를 맺는 것은 역사적으로 옳고 그 관계를 보수언론이 조장해 놓은 분위기에 말려든 일반대중들의 의식을 고려해서 거리를 둔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며 그렇게 될 수도 없는 일이라 했다. 그러자 그 친구는 그런 조직주의적 한계 때문에 결국 전교조는 자기 한계에 봉착해서 대중과 점점 멀어질 거라며 자신은 그런 전교조를 탈퇴하고 싶다고까지 했다. 그 친구는 이러 식의 전교조 비판을 자신의 선명성을 드러내는 일이라고 까지 했다. 그 친구를 잘 알고 그 친구를 여러 면에서 이해하려 하지만, 이 부분에서는 나도 결코 양보할 수 없었다. 그 까닭은 그런 발언은 더 이상 교사가 노동자가 아니라는 것이기 때문이고, 민주노총에서 전교조가 거리를 두고 탈퇴까지 하는 일은 오히려 역사를 뒤로 후퇴시키는 일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없는 일을 내 친구는 우리나라에서 만들라 외치고 있었다. 그것이 곧 전교조를 마치 살릴 수 있는 것처럼. 물론 그 친구처럼 대다수 노동자들이 점점 자본에 삶이 묶이고 노동운동을 제대로 배우거나 공부해 본 적이 없는 대다수 우리 국민들이라면, 더구나 보수언론의 노동운동에 대한 조작과 편파적인 시각으로 여론을 만들고, 대통령까지 나서 노동운동을 앞장서서 탄압하여 노동자의 삶을 더 열악하게 만드는 사회라면 충분히 나올만한 이야기였다. 분명 잘못된 논리이고 반역의 논리였지만 나는 그 친구를 설득할 수 없었다. 그건 책으로만 역사와 노동을 공부했지 구체적인 노동자의 열악한 삶을 내 것으로 만들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나의 한계였기 때문이다. 물론, 설령 그러한 실제적인 노동자의 삶을 알았다 해도 이미 노동운동에 대한 편견과 그것을 공부를 해 보지 못한 그 친구를 설득하기란 힘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한 친구들에게 하종강선생은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하종강선생의 말을 통해 그 친구의 말처럼 전교조가 민주노총과 거리를 두는 일이 힘들게 살아가는 대다수 우리 노동자들의 삶을 더욱 힘들게 하지 않을지, 그것이 진정 조직 이기주의는 아닐지, 그리하여 결국 우리 사회가 더 나은 사회로 발전하는데 해를 끼치지 않을지 진정 곱씹어 생각해 볼 일이다.
노동운동에 대한 정상적인 이해가 대중적 정서로 올바르게 자리 잡아 본 적이 역사상 단 한 번도 없는 사회에서 노동운동을 비판할 때에는, 자신의 말이 얼마나 옳은가 하는 것 못지않게, 자신의 말이 얼마나 옳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 한 번쯤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참고로 저는 거의 매일 노동자를 만나 우리의 잘못된 행태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우리 정말 많이 반성해야 한다. 이러다가 망한다. 자신보다 더 어려운 처지에 있는 노동자들의 고통을 함께 끌어안을 수 없다면, 초등학교 도덕 교과서의 원칙들을 지킬 수 없다면, 우리 사회에 아무런 유익한 영향도 끼치지 못할 뿐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가치 있게 채울 수도 없을 것이다…….”
어쩌면 저는 노동자들에게 그런 ‘싫은 소리’를 가장 많이 하는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어제도 했고, 오늘도 했고, 내일도 할 것입니다. 다만, 노동자들보다 훨씬 잘 사는 사람들이 주로 모여 있는 곳에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노동자들을 더욱 힘들게 만들어, 결국 우리 사회가 더 나은 사회로 발전하는데 해를 끼치기 때문입니다. (21-22쪽)
파업에 대한 편견과 이데올로기
‘알려고 하지 않는 사회’, ‘다 안다고 착각하는 사회’
이 말은 홍세화씨가 프랑스에서 우리나라로 삶의 근거지를 옮긴 이후에 내린 결론이다. 어느 날 홍세화씨가 택시를 타고 신문사로 급히 가던 날, 택시 운전사 출신인 그는 다감하게 운전사에게 이런 저런 말을 건네다 문든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무슨 일을 하시는 지요.”
“네, 한겨레신문사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이 있은 뒤, 두 사람은 한 동안 침묵했다고 한다. 아직 도착할 시간이 남게 되면 홍세화씨는 한겨레신문을 아느냐 되묻는다고 한다. 그때 되돌아오는 말은 빨갱이 신문이라는 편견에 휩싸인 말들이라고 한다. 그래서 묻는다고 한다.
“그럼, 한겨레신문을 보신 적이 있으시군요.”
하면, 한 번도 읽은 적이 없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노동자의 처지를 대변하고 택시운전사들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누구보다 앞장 서 보도했던 신문사의 기사를 한 번도 읽어보지도 않고 그들은 빨갱이 신문이며 좌파 신문이라며 평가절하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모든 택시 운전기사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의외로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세상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
굳이 알려고도 하지 않고 또 공부하지도 않고 다 안다고 여기는 사회. 이런 분위기가 한국사회를 더욱 천박한 자본주의 사회, 민주공화국이 뭔지도 모르고 민주주의를 외치는 사회, 노동자가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외치는 것마저 빨갱이와 좌파로 몰아붙이는 사회가 되고 있지 않은가 하며 홍세화씨는 반문하고 있었다. 이는 비단 일반 대중에게만 적용되는 일은 아니다. 어느새 이른바 민주화의 역사를 거쳐 왔다는 그래서 나름대로 식견이 있다는 지식인들조차 알려고도 하지 않고 또 다 안다고 치부하며 자신의 삶에 매몰되어 가는 이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노무현정부가 들어서면서 개혁의 바람이 거셀 거라는 시점에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노동자들의 요구를 지켜보며 노무현 정부를 지지했던 내 주변 사람들은 자제해야 하지 않겠냐며 노무현 정부에 신뢰를 보냈던 적이 있었다. 그 사람들은 정말로 열악하고 절박해서 들고 일어났던 ‘화물 노조’ 파업에 대해서도 자제를 해야 한다고 했고, 대기업노조의 파업을 지원하며 민주노총이 전면파업이라는 깃발을 들고 나섰을 때도 월급 많이 받는 귀족노조가 자제하여 수출의 길도 열고 노사화합을 이끌어 내야 한다며 정상적인 임금투쟁까지 반대했었다.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전과 달리 파업의 강도와 횟수가 수치상으로도 줄어들었음에도 노동자들의 탄압은 거세지고 연행 및 구속자는 늘어남에도 참여정부에 더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며 노동운동 방식을 전면 바꾸라는 보수언론의 논리와 똑 같은 외침을 이른바 학생 때 운동을 했다는 사람들 입에서도 너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홍세화씨가 본 사회논리가 그대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른바 민주적인 삶을 살아왔다는 그들조차도 더 이상 알려하지 않고 아니 세상을 다 안다고 착각하고 사는 것이다. 왜 파업을 했는지, 왜 보수언론이 노동운동의 흐름을 왜곡하려 하는지, 노무현정부의 기본적인 노동정책이 어떠한지 알려고도 하지 않고 마치 다 아는 것처럼 쉽게 단정 짓고 파업은 더 이상 올바른 투쟁방식이 아니라며 노동자들을 가르치려 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사회는 불법적이며 가혹한 노동여건 속에서 최저 임금조차 받지 못하고 부당한 노동을 강요받는 이들이 많다. 하종강선생은 바로 이러한 파업에 대한 편견과 이데올로기를 여러 사례를 통해 깨버리려 한다. 대기업에서 경리담당을 하던 한 여직원이 이유도 없이 자리에서 쫓겨나 노동위원회에 구제신청을 하며 당하는 수모를 이야기 하는 ‘울지 마세요, 당당히 맞서세요’, 지하철 노조의 파업을 거짓 왜곡보도 했던 KBS에 대한 일화,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임금이 고임금이라는 것에 대한 허와실, 계약직만 돼도 좋다는 용역회사 파견근로자의 안타까운 삶, 병원파업의 진실, 제주도 양돈축협 노동자들의 싸움, 조종사 파업과 공무원 노조 파업 결정의 정당성을 읽어보면 왜 우리가 파업을 지지해야 하며 그 파업이 왜 정당한가를 그리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굳이 서유럽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적어도 파업을 왜 하는지, 그 파업이 우리 사회에 끼치는 영향은 어떤 것이며 나 또한 그들과 같은 처지가 됐을 때 이 파업을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한 진지하고도 솔직한 접근이 먼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파업하는 그들의 삶이 곧 나의 삶과 관련 있다는 상식적인 삶의 철학을 다시금 되새겨 볼 때다.
제 홈페이지에 가끔 찾아오는 어떤 이가 라디오 방송을 들으며 퇴근하고 있었는데, 여러 나라에 거주하는 통신원들로부터 가가 나라의 화제를 전해 듣는 프로그램에서 이탈리아의 통신원이 버스 파업에 관한 소식을 전하더란다. 이탈리아 어느 지방 도시의 버스 회사 노동자들이 3년 동안 500번이나 파업을 했다는 것이다. 프랑스나 독일 같은 나라의 노동자 파업에 관한 시민들의 연대의식은 귀가 닳도록 들었던 터라, 관광의 나라, 축구의 나라, 좀도둑과 소매치기가 많은 나라 정도로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는 이탈리아의 경우가 궁금했는데, 그 통신원의 말을 옮기자며 대략 이러했다는 것이다.
그 도시의 시민들에게 “버스 회사 노동자들이 3년 동안 500번이나 파업을 해서 도시 교통이 수시로 마비가 됐는데, 불편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우리나라 언론인들은 질문도 꼭 이런 식으로 한다) 상상도 할 수 없는 답변이 나오더란다.
“그들도 파업을 할 이유가 있었겠지요. 그들의 권리를 존중하기 때문에 불편을 감수하고 있습니다. 내가 지금 불편하다고 불만이나 늘어놓으면 나중에 내가 파업할 때 누가 나의 권리를 이해해 주겠습니까?”
이런 답변이 우리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내용인 것이다. 그것이 뉴스가 되고 전해지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며 호들갑을 떠는 통신원의 낭랑한 목소리가 공중파 주파수를 통해 전해지는 나라라는 생각에 잠겨 그 이는 잠시 차에서 내리는 것도 잊은 채 앉아 있었다고 했다.(175-176쪽)
노동운동을 용납 못하는 사회
2년 전, 6학년 사회시간이었다. 우리나라 경제발전을 이야기하면서 교과서 속에는 언뜻 어려웠던 60-70년대 경제상황을 얘기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놀라운 경제발전을 이룩했던 우리 나라를 이야기 하고 있었는데, 당시 어려웠던 노동현장에 대해서는 지극히 짧게 언급하고 있던 터였다. 부족한 현대사를 공부하는데 도움을 주려 우리 반 아이들에게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라는 영화를 보여준 적이 있었다. 그 영화를 보고 감상문도 쓰고 이야기도 나누었는데, 조금은 거칠게 준비했던 탓에 전태일이 분신하는 장면에서 아이들은 꽤나 충격을 받았던 모양이었다. 더구나 인간으로 살 수 없는 작업환경을 이야기 할 때, 어떻게 저런 환경에서 일을 할 수 있냐며 지금은 나아지지 않았냐고 묻곤 했다. 그때 나는 아이들 앞에서 아직도 이런 어려운 노동환경이 많다고 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공부과정이 우리 반 아이에게서 어느 노동자 아버지에게 전해졌었고, 그 아이의 아버지가 매우 불쾌해해 했다는 말을 아이의 일기를 통해 알 수 있었다. 나는 노동자들의 열악한 삶과 당당한 삶을 아이들에게 얘기했지만, 그 아이의 아버지는 자신의 계급적 위치를 철저히 부정하고 계층상승 욕구가 매우 강한 이 시대의 전형적인 노동자였기에 자신의 아이가 노동자들의 삶에 대한 역사를 배우는 것을 또 그걸 가르치는 담임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벌어지는 까닭이 우리가 노동운동이라는 것이 얼마나 사회에 유익한 것이고 자신의 권리를 내세우는 것이 결코 이기적이지 않다 것을 학교나 다른 사회에서 배워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된 것은 하종강선생의 강연을 듣고 난 뒤였다. 그저 서유럽의 혁명적인 사회변화를 통해서 노동운동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아가고 좌파가 그 존재의 정당성을 얻을 수 있었다는 막연한 지식만 가지고 있었지, 구체적으로 그 사회의 학교교육과정에 노동조합과 노동운동이 얼마나 큰 비중을 가지고 다뤄지는지는 몰랐다. 노동운동의 정당성과 노동운동이 사회경제적으로 유익한 것임을 알고 자라는 청소년들이 만드는 사회와 그 사회가 애당초 노동운동을 천시하고 부자가 되는 법만 가르치고 노동자의 권리를 내세우면 매국노 소리를 들어야 하는 자본가들의 논리만이 횡행하는 사회의 청소년들이 만든 사회는 분명 다를 것이다.
아직도 우리나라는 40대 초반의 한 여성 노동자가 자신의 임금이 최저 임금인지 확인만 해도 직장에서 쫓겨나야 하는 나라다. 회사 측의 입장을 두둔하면서 수많은 노동자들을 구속하고 수배했던 경찰서 한 간부가 ‘경찰의 날’ 기념식에서 ‘노사 양측에 대한 순화 설득 및 적극적인 중재로 평화적인 노사 문화 정착에 기여’했다는 공로로 대통령 표창을 받는 코미디가 연출 되는 나라다.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이후로 실제로 노동자들이 목소리가 낮아지고 노동쟁의가 절반이나 줄어들었는데도 대통령은 끊임없이 노동조합을 비난하고 언론은 과장된 불안감으로 여론을 부추겨 노사관계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는 나라다. 싸울 수밖에 없는 사회 환경이 만들어졌는데도 이 나라는 노동자에게 자신이 권리를 내세우는 노동운동 자체를 죄악시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나라 노동운동이 과격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노동운동을 용납하지 못하는 사회는 결국 이 사회를 더욱 양극화 시킬 뿐이다. 우리는 이것을 학교에서 배워야 한다. 언젠가는.
독일 같은 나라에서는 초등학교 정규수업시간에서부터 노사관계를 가르친다. 교과서에서는 노사관계에 대해 “가족관계를 제외하고 인간이 자기를 실현하며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관계”이며 “민주주의와 공동결정”의 장이라고 정의한다. 그 말이 백번 맞다. 자본주의 사회를 구성하는 대부준의 사람들은 가족생활 그 다음이 직장생활이다. 실제로 가정에서보다 회사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하는 직장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교실에 앉아 공부하는 학생들 대부분이 장차 노동자가 되는 사회에서는 학교의 정규 수업 과정에서부터 노사관계에 대해 중요한 비중으로 가르쳐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독일 중등학교 사회과목의 한 교과서에서는 모두 340쪽의 분량 중 93쪽을 노동교육에 할애하고 있다. 청소년 실업에 관한 내용만 29쪽이나 되는 교과서도 있다.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내용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생생한 사실들”을 토론 주제로 다룬다. 독일 금속 노조와 사용자 단체가 체결한 임금협약, 금융 노조와 사용자 단체가 체결한 기본협약 등과 함께 노동조합이 발표한 성명서, 노동문제에 대한 신문기사 등이 교과서에 수록된다.(216-217쪽)
노동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
절친한 친구나 선배들과 비슷한 생각으로 함께 살아오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가끔 다른 얘기를 하고 있다는 걸 알 때 문득 지나간 세월을 돌이켜 본다. 지난여름 한 선배가 자신의 어릴 적 경험을 얘기하며 더 이상 작은 학교는 없어져야 하지 않겠냐는 말을 나에게 건넸다. 내가 시골학교 경험이 5년 정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야기인 즉, 작은 학교 아이들은 숫자가 적은 관계로 정서상으로 학습발달상으로 서로에게 그다지 유익하지 않으므로 조금 더 학교에서 많은 아이들과 어울리며 다양한 경험을 통해 성장해 나가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옆에 있던 다른 선배도 맞장구를 치며 경제적인 효율성도 함께 이야기를 했다. 마치 정부 측에서 말하는 논리와 똑 같은 것이어서 한편 놀라기도 했지만, 틀린 얘기만은 아니어서 일단은 듣고 있었다. 하지만, 땅에 발붙이며 살아가는 농사꾼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비록 적은 수의 아이들과 어울려 지내지만 수업이 끝나면 산으로 들로 다니며 서로에게 따뜻한 정을 느끼며 사는 그래서 학교 오는 맛이 있는 그곳 아이들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그렇게 쉽게 얘기할 일은 아니다.
한 마을에 학교가 있다는 것은 그 지역에 사는 농사꾼들에게 가져다주는 심리적 안정은 매우 크다. 비록 작은 학교에 투입하는 예산이 학생 수에 비해 많아 비효율적이라지만, 그것 때문에 풍족하게 아이들은 학교를 다닐 수가 있었다. 예를 들면 수학여행, 현장학습이 있을 때 차량 지급은 전액 학교 예산으로 치러 낼 수 있었고 아이들의 모든 준비물과 방과 후 특기적성, 급식비까지 일정정도 작은 학교 덕에 혜택을 받을 수 있어 경제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었고 각종 크고 작은 행사로 사람 수는 적지만 그 지역 문화센터 역할도 톡톡히 할 수 있었다. 이는 경제성으로만 따질 수 없는 부분이었다. 더구나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어 아이들만 조부모에게 보내는 상황에서 내가 일했던 곳은 상처받은 아이들에게 너무나 좋은 쉼터였다. 아이들 수가 적었던 아이들은 전학생이 오면 무척 반가워했고, 부모와 떨어져 낯선 곳에 상처를 입고 왔던 아이들은 자연과 순수한 우리 반 아이들의 사랑과 배려로 쉽게 적응하곤 해서 나 스스로도 놀라워했던 적이 많았다. 이는 학교 폐교와 통합이 가져달 줄 수 없는 이 지역 주민과 아이들에게는 일종의 생존의 이유와 근거였다. 일본이 단 하나의 학생이 있더라도 학교를 폐교시키지 않는 정책을 유지하고 있는 까닭을 우리도 생각해 봐야 한다. 이런 생각과 마음으로 나는 선배들에게 폐교는 단순히 생각할 수 없는 그곳 사람들의 ‘생존’과 이어진 부분이어서 쉽게 결론짓기 어려운 문제라며 짧게 내 뜻을 전했다.
이렇게 누구의 처지에서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우리네 삶은 때로는 커다란 차이를 보여준다. 누구의 관점으로 어떻게 보느냐는 노동의 문제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하종강선생은 ‘기업살인법’이라는 단어로 우리의 시각이 얼마나 자본가들의 입장에 서 있는가를 보여주려 했다. 그 실례로 그는 신자유주의 국가의 첨병인 영국의 예를 들고 있다.
2000년 10월, 영국에서 열차 탈선으로 4명의 승객이 사망한 사고에 대해 3년이 지난 2003년 7월 영국 경찰은 철도회사의 선로보수회사 등의 고위직 임원 6명에게 살인죄를 적용했습니다. 철도회사가 선로 교체와 속도 제한 조치와 같은 기본적인 의무를 게을리 해서 사고가 발생한 것은 살인 행위에 해당한 것입니다. 영국의 검찰 역시 이들을 재판에 기소할 예정인데, 만일 유죄가 확정되면 이 사람들은 종신형을 선고받을 수도 있습니다. 영국에서는 그동안 기업이 살인죄의 적용을 받아 기소된 적이 여러 번 있었고 지금까지 5개의 기업이 살인죄로 처벌 받았습니다. 이들은 모두 중소기업이었습니다. 대기업에 대해서는 단 두 건의 기소가 있었으나 모두 기각되었습니다. 그러자 영국에서는 현행법상 기업에 대한 살인죄 기소가 어렵다 판단하고 노동조합과 사회단체들이 ‘기업살인법’ 제정 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기업살인법’은 블레어 총리의 공약이기도 했습니다. …… 영국은 2003년 ‘산업안전보건 범죄에 대한 법안’을, 캐나다는 ‘기업살인에 관한 정부법안’, 미국에서는 ‘부당한 죽음에 관한 책임법’ 등과 같은 관련법 제정운동이 일어나고 있으며, 호주는 ‘산업안전보건법’, ‘사업장사마과 중대상해법’ 등을 통해 기업주와 기업에게 노동자의 건강과 노동안전에 대한 책임을 묻고 있다.
하종강이 전해주는 남구만의 시조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교과서 텍스트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무심코 읽어버린 이 시조도 어린 머슴과 양반의 관점 가운데 어느 쪽의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 이 글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생각은 크게 달라진다. 여러분은 과연 어느 쪽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또 어떻게 배웠는가.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나니
그래도 희망은 노동운동
하종강선생의 글을 보면 어떻게 이 시대에 이런 일이 벌어질까 할 정도의 열악한 노동현장의 모습을 생생하게 들여다 볼 수 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인분투척, 가혹한 폭행이 가해지는 노동현장의 모습이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데도 숱하게 많은 노동자들이 목숨을 내 던졌는데도 방송과 언론 그 누구도 이 사실을 드러내 보이지 않고 있다. 민주화가 됐다는 이 사회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우리는 다시금 우리 사회를 되돌아 봐야 한다. 우리나라 노동자들이 왜 싸울 수밖에 없는지, 왜 대기업 노동자들의 임금투쟁이 우리 전체 노동자들의 권익과 상관있는 싸움인지 우리는 더 이상 모르쇠로 살 수는 없다. 혹자들은 얘기한다. 노동운동의 비리와 정체성의 혼돈으로 더 이상 지금과 같은 노동운동은 사라져야 한다고. 그럼에도 하종강은 그 사람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외친다.
대기업 노동조합이나 상급단체 간부들의 비리가 마치 우리 노동운동 전체를 상징하는 것처럼 사람들이 오해할지라도, 그 여론 때문에 노동운동이 한낱 사람들이 비웃음을 받는 대상이 됐을지라도, 그래서 시대를 거슬러 마치 70, 80년대로 돌아간 것처럼 노동자 권리를 주장하기가 더욱 어려운 세상이 됐을지라도, 현장의 활동가들은 삼보일배를 하는 심정으로 노동자 권리를 확대하는 일을 자신의 몫으로 끌어안을 수밖에 없다. 노동운동의 혁신은 그렇게 현장에서부터 활동가들에 의해 시작되고 완성될 것이다.(313쪽)
에필로그
일 년에 삼백 회 이상 다니는 노동교육. 그는 벌써 20년째 전국의 노동현장과 다양한 계층의 대상자들에게 노동운동을 전파하는 전도사 역할을 하고 있다. 그 일마저 조직생활을 하지 못하는 부채감을 안고 있고 노동자들의 삶에 비하면 큰 고생이 아니라며 겸손해 한다. 하종강선생의 강연을 들은 사람들의 말 중 전교조 조합원의 말을 소개해 본다.
선생님의 강의를 경청하고 매우 감명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나라가 터부시하는 노동의 가치와 소중함을 일깨워 주셨고, 이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에 대해 명쾌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한 선생님이 말하길 자기는 조합원이면서도 늘 주눅 들어 있었는데, 선생님의 강의를 듣고 어깨가 쭉쭉 펴지는 것을 느꼈답니다.(최○○, 전교조 조합원)
하종강선생의 강연을 들어본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그의 강연에는 그가 겪은 생생한 노동현장과 우리나라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강연 처음부터 끝까지 파업현장, 집회, 평범한 일상에 이르기까지 노동자들과 함께 희로애락을 겪었던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이것이 그의 강연이 사람들에게 쉽고 설득력 있게 다가설 수 있는 이유이다. 그의 과거 학생시절의 이야기도 참으로 드라마틱하다. 숱한 고문을 이겨내며 내 삶의 방향과 정체성을 찾아내었던 이야기이며 조직생활을 그만두고 이 길로 들어섰던 이유, 조직생활을 함께 하지 못하는 부채감으로 세상을 더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는 그의 굳은 다짐은 그의 삶을 보는 이에게 큰 감동을 준다. 아울러 그의 남다른 가족력에서 두 가지의 놀라운 사실도 발견할 수 있다. 훈장을 두 개나 받았던 교사출신의 아버지의 극우적인 발언으로 자신을 흥분시키는 얘기와 20대 때 결정적인 삶의 결정을 내려야 할 즈음, 자식의 판단에 가타부타 얘기하지 않고 믿겠다는 어머니가 사실은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조합원이었다는 사실은 그도 놀라고 나 또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칠순이 다 된 어머니가 40여년 살을 맞대고 살아온 남편에게조차 말하지 못했던 비밀을 아들에게 고백하던 그 이야기에서 잠시 숨을 멎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하종강은 바로 그런 어머니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끝으로 하종강을 소개하는 또 다른 한 얘기와 그가 말하는 삶의 최저값을 들어보며 긴 책이야기를 마무리 하고자 한다. 이 책을 통해 우리 독자들이 노동운동에 보다 더 많은 관심을 갖길 바란다. 무엇보다 교사가 노동자이며 노동자의 권익을 내세우는 일이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님을 깨닫길 바란다. 그래서 이 나라 전체 노동자들과 연대의식을 갖는 사러져 가는 ‘진보성’을 다시 발견하길 바란다.
하종강 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은 ‘얼짱’이다. 80년대 정보과 형사들이 공인한 ‘원조 얼짱’이다. 당시 거리에 나붙었던 ‘미남형’. 하지만 얼굴로 승부하며 살진 않았다. 그를 말할 때 맨 앞에 자리하는 수식은 ‘진정성’이다. 한결같은 삶과 노동자에 대한 애정. 넘치는 카리스마. 그렇지 않았다면 노동문제의 우물을 24년간 팔 수 없었으리라. 그는 노동자들의 희망이다. <고경태, 한겨레21 기자, 21세기를 바꾸는 교양에서>
오늘도 결의를 다지면서 머리띠를 묶어 매야 하는 노동자들과, 번화한 거리 뒷골목에서 단속반과 숨바꼭질을 벌여야 하는 노점상들과, 포크레인 삽날에 무너져 내리는 삶의 터전을 지켜보아야 하는 철거민들과, 썩어 문드러진 논밭을 바라보며 이를 가는 농민들이 있다. 이들은 모두 진솔한 ‘우리’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최소한 그들과 친구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내가 죽어도 손에서 놓을 수 없는 내 무기의 최저값이다.(37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