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그 아련한 추억들/국외 연수 이야기

[러시아바이칼여행기] 4부_8월 3일_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성당들

갈돕선생 2013. 8. 6. 21:14

오늘은 다시는 못 올 것 같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나는 날이다. 열차 안에서 다행이도 여행기를 이을 수 있어 참으로 다행이다. 나는 오늘에야 겨우 시차적응을 하며 그나마 잠을 편안히 잤던 것 같다. 햄과 빵으로 아침을 먹기가 싫었던 나는 간단하게 시리얼과 우유, 과일샐러드로 아침을 해결했다. 9시 30분 출발. 짐을 모두 챙겨 나온 우리 일행은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대표적인 성당, 피와 구원의 성당, 카잔 성당, 이삭성당 투어에 나섰다. 맨 먼저 찾은 곳은 피와 구원의 성당. 마치 이슬람사원과 같은 성당. 그리스 정교회를 가져와 만들어낸 성당. 가이드의 말로 러시아가 그리스 정교회를 받아들인 까닭은 어떤 종교적인 철학이 있어서가 아니었단다. 단지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그들에게 그리스정교회가 어울렸던 탓이란다. 믿거나 말거나.

 

 

 

 

아직 개정하지 않은 아침 일찍 방문한 탓도 있거니와 이번 여행에 이곳 피와 구원의 성당은 티켓 구매가 되지 않아 외관만 바라보고 사진을 찍고 가이드에게 이 성당에 얽힌 친절한 설명을 듣는 것으로 대신했다. 건물 전체가 모자이크로 처리돼 고운 자태가 더욱 아름다운 성당이었다. 이런 모자이크가 교회 건물 내외부를 통틀어 총 7000m2나 된다고 한다. 특히 내부는 거의 모든 벽과 천장이 모자이크로 처리 된 이콘화들로 덮여 있고 그 각각이 당대 최고의 화가들로 손꼽히던 사람들의 작품이라고 하니 교회 전체가 미술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내부를 들어가보지 못한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이 교회는 지금까지도 ‘스파스나 크로비’ 즉 ‘피 위의 성당’ 혹은 ‘피와 구원의 성당’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 내부에 서 있는 자그마한 흉상의 주인공 알렉산드르 2세가 급진적 혁명우동 조직인 ‘인민의 의지’ 활동가들이 던진 폭탄에 중상을 입고 피를 흘렸던 바로 그 지점에 교회가 건설되었기 때문이다. 보수적인 태도를 견지했지만, 농노해방 선언, 지방자치제도 도입, 배심원 제도를 반영한 사법개혁을 과감히 승인한 개혁군주였던 그가 1881년 3월 1일 입헌제도를 도입하는 법안에 서명할 계획으로 자신이 늘 산책하던 길을 따라 환궁하던 길에 혁명 조직에 의해 희생당한 사건은 당시 전 세계적인 충격이었다고 한다.

 

‘피와 구원의 성당’ 뒤편으로 돌아서니 옆으로 운하로 이어지는 강줄기로 유람선이 지나간다. 유람선을 따라 길게 찻길과 인도가 이어지는데 그 끝 멀리 카잔성당이 보인다. 우리 일행은 가이드에게 카잔성당까지 걸어가겠다 제안을 했다. 아침 바람이 선선하게 부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거리를 아침에 걷는 기분이 남달랐다. 토요일 한가롭게 길을 걷는 시민과 책을 읽는 시민. 네프스키 대로를 따라 힘차게 달려가는 승용차와 무수히 길을 건너는 사람들. 상트페테르부르크 토요일 아침은 조용하나 경쾌하며 힘차지만 느긋함이 엿보였다. 10여분을 한가롭게 걸었던 우리 일행이 만난 카잔성당.

 

 

 

 

  

96개의 코린트식 열주가 네프스키 거리를 향해 반원형으로 펼쳐지는 정교회 카잔 성당으로, 명문 스트로가노프가에서 일하던 농노출신의 보로니힌의 설계로 1811년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도시의ㅡ 수호 이콘(성상화)인 ‘카잔의 성모상’이 이 교회에 모셔져 있는데, 이 교회는 나폴레옹을 격퇴한 러시아군 총사령관 쿠투조프의 유해가 안장된 것이기도 하다. 이곳은 문화유적지이지만 여전히 신자들이 찾고 예배를 드리는 곳이어서 무료로 방문할 수 있었다. 다만, 모자나 선글라스, 촬영은 금지였다. 조용히 들어선 카잔성당의 분위기는 매우 신비로웠다. 수많은 신자들이 가득한 성당 안은 정교회 분위기에 맞게 아카펠라로 들리는 성가가 울려 퍼지며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무한한 경건함을 마치 요구하는 듯했다. 성당 기둥이 석고대리석으로 돼 있어 강와 바다가 함께 이어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날씨 덕에 염분에 색이 검게 그을리는 현상을 볼 수 있었다. 해마다 성당 측과 시에서 기둥들을 번갈아 가며 제 색을 보이도록 닦아낸다고 하는데, 직접 만져 보니 석고 대리석답게 석고성분이 묻어나오는 것이 꽤 신기했다.

 

 

 

 

 

이렇게 우리는 마지막 이동지인 이삭성당으로 향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찾은 뒤 네바강 저편으로 혹은 차로 이동하는 저편으로 금색 돔을 내세우며 우리의 눈길을 끈 이삭성당. 허나 이곳도 티켓이 예매돼 있지 않다하여 내가 이곳만은 직접 들어 가보자는 제안을 하자 공금을 털어 우리 돈 1만원이 넘는 금액으로 직접 들어가 보았다. 기대했던 것보다 그 이상의 해박한 지식으로 이삭성당을 소개하는 통에 나는 이곳에 순간 흠뻑 빠져들었다. 성당 안의 모자이크 그림의 배치와 위치들은 모두 잊었지만, 이곳을 건축 설계한 26세의 젊은 몽페란트의 이야기는 지금도 뚜렷이 기억에 남는다.

 

 

 

 

 

표트르대제가 자신의 생일을 맞아 조그마한 성당을 짓고자 했다. 자신의 이름으로 짓자니 눈치가 보였던 표트르는 자기 생일에 맞는 성인을 찾아내 그의 이름을 이곳 성당이름으로 대신했다고 한다. 그렇게 세월은 흐르면서 이곳 이삭성당이 거대한 성당으로 바뀔 무렵, 프랑스에 의해 추천받은 26세 청년 건축가 몽페란트를 데려온다. 허나 너무나 젋었고 경험이 부족한 그를 믿지 못한 차르는 이삭성당 공모전을 여는데, 결국 몽페란트가 1등을 하게 됐다는 것. 결국 그에게 일을 맡길 수밖에 없었는데 이삭성당의 기둥을 모두 올릴 즈음 본격적으로 그에게 이삭성당은 맡겨지게 된다. 허나 이 공사는 장장 40년에 걸쳐 이어지고 결국 이 성당을 완공한 뒤 28일 만에 그는 세상을 떠나게 된다.

 

 

 

 

 

 

  

세상을 떠나기 전 그는 자신이 애정을 쏟은 이곳 이삭성당에 묻힐 수 있기를 바라는 유언을 남겼으나 종파가 다른 그리스정교회는 이를 받아들이지 못했고 그의 시신은 프랑스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의 천재성은 이삭성당을 만든 과정을 셈세하게 그려놓은 설계도와 각종 이삭성당 건축 관련 그림들에 의해 드러나는데, 이삭성당을 찾은 이들은 이 중 일부를 직접 확인할 수 있고 전편을 복사해둔 영상자료를 대형 모니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직접 보면서 몽페란트의 천재성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한편으로 이삭성당을 짓기 위해 참으로 많은 인원이 동원됐으니 허무하게 세상을 떠난 이름 모를 많은 민중들의 아픔과 피가 서려 있는 곳이 바로 이삭성당이기도 했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권력과 정치의 희생이 되는 사람들을 과연 그들의 하나님은 어떤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을까. 잠시 종교에 대한 의문을 품게 만드는 지점이었다.

 

그렇게 세 개의 성당을 둘러본 우리 일행은 현지식으로 제공되는 어느 음식점을 찾았다. 재미있는 것은 식당의 간판이 전혀 없다는 것. 어떻게 이럴 수 있지? 가정식 백반집도 간판이 있는데 말이다. 어쨌건 빵과 샐러드, 채소스프, 치즈가 얹어진 연어구이 정식으로 맛난 식사를 했다. 어제 소고기요리보다 훨씬 내 입에 맞는 음식이었다. 점심을 잘 해결한 우리 일행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외곽에 있는 푸시킨시로 향했다. 러시아 국민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푸시킨을 위한 그가 졸업한 귀족학교 리체이가 있는 곳. 예전에는 황촌(황제의 마을)이라 불리던 곳이었는데, 스탈린 체제에서 이 마을의 위상을 떨어뜨리기 위해 어린이촌으로 한 때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이곳 황촌이 이제는 푸시킨시로 불리게 된 것이다. 바로 이곳에 또 하나의 궁전, 예카테리나 궁 안에 있는 호박방을 찾는 것이 우리 일행의 최종 목적이다. 원래 이 황촌은 표트르가 자신의 두 번째 아내가 될 마르타 스카브론스카야(훗날 그녀는 남편을 이어 예카테리나 1세로 등극했다.) 에게 선물한 땅이었다. 그후 엘리자베타 여제가 이곳을 황가의 여름 거처로 결정하였는데, 1752~56년에 걸쳐 화려한 바로크로 건설된 것이바로 이 궁전이다.

 

 

 

 

 

 

이곳의 작디작은 호박방을 보고 싶어 그날도 수많은 사람들이 궁전을 찾았다. 일정하게 줄을 서서 들어가야 했고, 바닥이 상하고 먼지가 들어올까 싶어 덧신을 신게 하는 등 꽤 까다로운 절차를 밟아야 들어설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이런 저런 설명을 가이드에게 듣고 들어선 어느 지점에서 마침내 우리는 기다리던 호박방을 마주 대할 수 있었다. 호박이라는 특별한 보석으로 가득한 방은 정말이지 아름답고 신비했다. 생각보다 작은 방에 실망도 했지만, 교실 크기의 방 한가득 호박으로 각종 색깔로 치장해 놓은 방은 2차 세계 대전으로 소실된 방을 다시 복원했다 하지만, 당시 러시아 황제의 호박에 대한 지나친 욕구가 어느 지점까지 가 있었는지를 미루어 짐작하게 했다. 아름다움만을 읽어내기에는 황제 개인의 취향과 욕구에 동원된 많은 민중들의 고통과 상처, 죽음이 동시에 떠오르는 씁쓸함은 이 궁전을 떠나는 내내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이 황제들의 흔적을 기리고 그들을 통해 또 다른 미래를 꿈꾸는 오늘의 러시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지 이해하기란 쉽지 않았다.

 

 

 

 

 

 

 

이제 우리는 빠른 저녁을 한식(김치찌개)로 해결하고 서둘러 모스크바역으로 향했다. 참으로 재미있는 건 역 이름이 목적지라는 것. 반대로 모스크바역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역이라나. 이곳 사람들의 생각이 참으로 흥미롭다. 하여간 우리 일행은 모든 짐을 챙겨 침대가 딸린 4인실 모스크바행 열차를 탔다. 이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난다니 순간 아쉽고 섭섭하고 늘 그리울 것 같은 마음이 일었다. 좁디좁은 4인실, 출발하기 전, 에어컨이 나오지 않고 복도는 좁고 허름한 내부시설에 답답했지만 이내 출발한 뒤 빵빵한 에어컨 때문에 이제는 춥기까지 하다. 이제 밤 11시. 창밖으로 하늘이 이제 밤이 오겠다는 신호를 보낸다.

 

 

 

 

 

  

이렇게 상트페레르부르크를 떠난다. 이곳에 적지 못한, 이제는 기억에서 사라져간 많은 이야기들이 아쉽지만, 그래도 세상을 떠나기 전 내 눈에 아름다운 잔상으로 남을 것 같아 고마운 마음으로 이 순간을 기꺼이 받아들이고자 한다. 너른 세상을 만났으니 좀 더 겸손하고 좀 더 마음을 너르게 써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이제 마지막 인사를 해야겠다. 아듀~ 상트 페테르부르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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