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올레여행기] 10월 11일_ 13코스 저지 올레에서 헤매다!
어제 늦게까지 게스트하우스 카페에서 주인장 내외와 나와 아들이 밤늦게까지 술 한 잔하며 세상 사는 이야기를 나눴다. 마침 어제 오기로 한 손님이 취소를 하는 바람에 투숙객은 나와 우리 아들 밖에 없어 편하게 시간을 보냈다. 게스트하우스 내외가 제주까지 내려오게 된 이야기이며 그들이 부딪히며 살아온 삶은 특히 우리 아들에게 적지 않은 도움을 주는 말들이었다. 모처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푹 자고 일어난 오늘. 우리는 중간산 숲길을 자랑한다는 13코스를 떠날 작정이다. 이제껏 다닌 올레길 중 가장 짧은 거리 14.4km. 그래서 아침 출발도 느긋하게 10시로 잡아 놓았다. 게스트하우스 안주인이 마련해 준 맛있는 꼬마김밥과 덤으로 챙겨준 삶은 계란을 싸들고 출발을 했다. 오늘은 게스트하우스 안주인이 픽업을 해주었다.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떠나 오후 2시면 끝날 것 같았던 13코스는 생각보다 늦은 오후 3시 30분이 돼서야 끝낼 수 있었다. 저지오름의 헷갈리는 코스 때문이었다.
일단 어제 종점이었던 절부암에서 13코스 출발을 시작했다. 평이한 길때문인지 천천히 걸었는데도 생각보다 목적지까지 길이 빠르게 이어지면서 어젯밤 숙소 주인장이 제안한 금악오름(검은오름)을 가보리라는 마음도 한때는 먹었다. 숲으로 덮인 13코스의 저지오름과 달리 분화구까지 보이며 일몰의 장관을 지켜볼 수 있다는 그곳에 대한 기대가 컸다. 13코스는 용수포구에서 시작해 내륙으로 방향을 틀어 들어간다. 사방으로 밭이 펼쳐진 너른 밭길을 지나자 순례자의 교회라는 아주 작은 교회가 보였다. 이제껏 본 교회 중 가장 작은 교회가 눈길을 끌었다. 왜 이런 교회를 만들었는지는 어느 책자에도 나와 있지는 않았다. 교회를 지켜보던 아들 녀석은 교회는 저래야 한다며 최근 사회 악(惡)으로 자리한 큰 교회에 대한 비판을 쏟아냈다. 대통령 선거를 거치면서 미디어를 통해 사회문제와 역사문제에 크게 관심이 커진 아들이 이제는 교회의 폐단까지 이야기 한다. 대견하기도 하면서도 좀 더 깊은 독서와 경험을 더 쌓기도 전에 비판하는 모습만 먼저 배우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도 했다.
그렇게 작은 교회를 곁을 떠나자 뒤이어 차를 몰고 온 여자 여행객 두 사람이 사진기를 들고 달려오는 모습이 보인다. 이 교회가 다른 이들에게는 그런대로 알려진 곳인 모양이다. 조금 더 걷자마자 용수저수지가 나온다. 1957년 인근 논에 물을 대기 위해 제방을 쌓아 만든 인공저수지인데 소나무숲, 갈대밭과 부들발, 인근의 묵논습지 등이 어우러져 망망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준다고 한다. 그러나 내 눈으로 본 용수저수지는 태풍이 언제 왔냐는 듯 마른 저수지의 모습이었다. 조금은 아쉬웠지만, 매번 풍경이 보는 이들을 충족시키지는 못할 거라는 생각으로 넘겼다. 상상컨대, 겨울철 철새들이 보금자리라는 이곳은 분명 찬 날씨에 찾은 새들이 와서야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올레 안내 책자에는 13코스의 진면목은 특전사들이 길을 내준 숲길에서 본격적으로 시작한다고 전한다. 50명의 특전사 대원들이 이틀 동안 총 3km 7개 구간에 걸쳐 사라졌던 숲길을 복원하고 정비하여 만들어 낸 길이라 하는데, 쪼른 숲길, 고목나무 숲길, 고사리 숲길, 하동숲길, 고망숲길 등 지루할 새 없이 각각의 개성이 넘치는 아기자기한 숲들이 계속 이어진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찾은 이곳은 쭉 이어진 길이 아니라 도로를 끼고 뜨문뜨문 이어지는 길이어서 그렇게 인상적인 면은 보이지 않았다. 특히 13코스는 콘크리트와 아스팔트길이 많은 데다 숲길도 이어지는 것이 아니어서 아쉬운 점이 많은 길이었다.
그럼에도 고목나무 숲길은 가늘고 긴 나무들이 군락을 이룬 점이 이채로웠고 고사리 숲은 짐작한 대로 고사리들이 양쪽 길로 한 가득 보였다. 하동숲길 끝에는 마을주민들이 마련해준 작은 무인카페도 보였다. 무료로 차와 커피를 마실 수 있도록 깨끗하고 맑은 물과 차 재료를 예쁘고 아담하게 제공해 준 마을 사람들의 따뜻함이 느껴져 지금까지 심심하게 걸은 길을 모두 잊을 정도였다. 무인 카페 옆으로는 제주시에서 세운 비석이 보인다. 그 비석에는 4.3 이후 하동이라는 마을이 어떻게 사라졌는지에 대한 안타깝고 슬픈 역사가 적혀 있었다. 아픈 제주의 역사를 이곳에서도 어김없이 만날 수 있었다.
이렇게 숲길을 모두 빠져 나오자 포장도로가 나오고 낙천리 아홉굿마을이 나온다. 굿은 샘이라는 뜻의 제주어로 낙천리 아홉굿마을은 아홉 개의 샘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라 한다. 한경면 낙천리는 30여 년 전 제주에서 처음으로 불미업(대장간)이 시작된 곳이라 한다. 불미의 주재료인 점토를 파낸 아홉 개의 구멍에 물이 고여 샘이 되었고 그때 소와 말, 제주 아낙네들의 물허벅 행렬이 장관을 이루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지금은 이 샘들은 민물낚시와 농업용수를 조달하는 수원지로 쓰이고 있다고 한다. 이 마을에 들어서면 거대한 의자 조형물이 보인다. 2007년~2009년에 마을사람들이 모두 모여 목재를 자르고 다듬어 3층 높이의 의자로 문을 삼고, 모두 1000여개에 이르는 의자조형물을 만들어 의자공원을 세웠다고 한다.
이곳에 들어서니 길 양 옆으로 빼곡하게 늘어선 각양각색의 의자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의자공원이라니 참으로 독특한 곳이었다. 의자마다 재미있는 글귀가 적혀 있고 모양도 다양해 지루함이 없다. 다만, 오늘은 체험마당들이 없어 한적해 보였다. 아들과 나는 이곳에서 옛날 도시락과 보리버거로 점심을 해결했다. 그렇게 나선 길은 낙천잣길. 낙천잣길의 돌담은 아주 두텁고 탄탄하게 쌓은 데다 길에도 자갈을 골라 쭉 깔아놓은 터라 제주에 돌이 많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해주는 듯 했다. 이 잣길을 지나 농로를 따라 용선달리 물통을 지나는 길이 그리 쉽지 않다. 어렵지는 않으나 평탄하지 않다. 그렇게 길을 지나나 올레본부에서 이름을 지었다는 ‘뒷동산 아리랑길’이 나온다. 저지수동 뒷동산 자락을 구불구불 이어 올라가는 길이라 붙였다 한다.
길 양 옆으로는 소나무 숲이 따라오는데, 이 길은 이계오름, 마오름 등 오름들 사이로 이어지면서 13코스의 마지막 관문 저지오름(표고 239.3m)으로 오른다. 저지오름을 올라 정상부의 분화구 숲길을 한 번 둘러 걷고 중간의 둘레길을 둘러 내려오면 되는 길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조금은 높게 이어진 길을 따라 저지오름 전망대까지 올라 제주 서부일대를 쭉 둘러보고는 내려가는 길을 가다 길을 잘못 들어 분화구 숲길을 따라 한 번 둘러 걷는 바람에 실제로는 두 번 정상에 오른 것. 둘다 어이가 없어 하며 다시 내려가는 길을 정확히 둘러보니 아들과 내가 착각했던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만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조금 더 제주올레에서 신경을 써서 이정표를 만들어 놓으면 이곳을 처음 찾는 이들이 고생을 덜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는 내리막길을 걷는 내내 그랬다. 정말 꼼꼼히 안내해야 할 부분에 이정표나 리본이 부족하거나 애매한 지점에 걸려 있는 것은 문제였다. 이게 제주올레 본부의 인력 탓인지 아님 올레꾼들이 리본을 떼 가는 것인지 하여간 13코스 후반부 안내는 점검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게 헛수고를 하고 길을 헤매다 겨우 아들과 나는 저지마을회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착시간은 3시 20분. 13코스 스탬스를 찍고 14코스 출발지점을 찍고 14-1 출발지점까지 모두 한꺼번에 도장을 찍었다. 그러고는 인근 편의점에 들어 음료수와 귤을 사먹었다. 그런데 웬걸 귤 몇 개가 들어간 작은 한 망에 5천원이라니. 그나마 귤이 시원하고 맛이 있어 용서가 됐다. 귤이 나는 철에 오지 못한 것이 내내 아쉽다. 그렇게 편의점 바깥에서 음료수와 귤, 여주인이 싸준 삶은 달걀을 먹으며 금악오름을 올라갈까 말까 하는 생각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때 마침 게스트하우스 바깥주인의 연락이 왔다. 곧 우리가 있는 곳으로 갈 터이니 숙소로 가잖다. 지금 시각에 금악오름을 오르는 것은 무리란다. 안 그래도 스마트 폰으로 검색을 해 보니 우리가 있는 곳에서 금악오름을 왕복하는 것은 오늘 우리가 걸은 거리와 비슷해 엄두를 내기가 힘들었다. 아쉬웠다. 하지만 언젠가는 한 번 쯤 오르고 싶은 오름이어서 내 머릿속에 꼭 간직해 둘 생각이다. 이렇게 13코스도 마무리를 지었다. 천천히 여유 있게 시작한 3일째 올레. 아들과 나 모두 지난 4월보다는 조금 쉽게 길을 걷고 있다. 앞으로도 10여일을 더 걸어야 하는데 무리하지 않아야 한다. 내일은 곶자왈이 10여 km 이어진다는 14-1코스를 걷는다. 다른 어떤 올레길보다 기대가 된다. 조금은 일찍 도착한 숙소에서 아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밤을 보낼 생각이다. 우여곡절이 좀 있었던 13코스. 아마도 이래서 내 기억에 더 오랫동안 남을지도 모르겠다.
이제 좀 쉬자. 내일 14-1코스를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