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석춘의 소설 '아름다운 집'을 읽고......
어제 오늘 일이 있어 또다시 서울을 찾았다. 가고 오는 길에 읽을 책으로 이런저런 핑계로 미루어 두었던 손석춘씨의 소설 '아름다운 집'을 정해 가방에 넣어 두었다. 기차 안에서 올라가고 내려오면서 읽은 '아름다운 집'은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며칠 전 손선배는 손석춘씨의 소설을 보고는 '아름다운 집'은 그런대로 괜찮았지만 나머지 두 권의 소설은 결말이 뻔히 보이는 흐름과 손석춘씨의 논리가 교조적이라 비평을 해다. 아직 미처 다 읽지 못한 나로서는 그동안 그분이 보여준 칼럼과 '아직은 오지 않은 혁명'이라는 책에서 받았던 인상으로 그분은 원래 그런 분이라는 코멘트를 날려 보았다. 하지만 내가 그런식으로 코멘트를 던진 까닭은 아마도 지금 우리 나라에 그분만한 필력과 실천을 가진 언론인이 드물다는 점에서 그를 옹호하고 싶은 마음때문이었을 거다.
하여간 나는 차분히 기차 안에서 이선진이라는 인물을 통해 손석춘 자신의 철학과 사고, 언론인으로서의 삶의 자세를 보여주려 한 '아름다운 집'이라는 소설을 읽어 보았다. 순수하며 냉철했던 좌파지식인이 북한노동당에 가입하고 그 속에서 남로당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하는지 치열하게 사고하는 모습에서 나는 그 모습이 마치 나인양 소설 속으로 빠져 들었다.
이선진이라는 순수한 혁명가의 기록을 가지고 이야기 엮어나간 이 소설에서 무엇보다 나는 여린이와 아들 서돌이를 얘기하고 싶다. 미군의 폭격에 맞아 죽는 아내와 아들을 두 눈 똑똑히 지켜봐야 했던 한 가장과 아버지로서 겪어야 했던 피맺힌 이선진의 아픔은 내 마음도 무척 아프게 했다. 포탄에 온 몸이 산산조각난 광경을 직접 지켜보고서는 곧장 아내와 아들의 그 흩어진 살점들을 주어모아야 했던 한 인간의 처절한 모습을 상상만 해도 미칠 일이다. 그가 미치지 않았던 아니 미칠 수 없었던 그 까닭은 미제에 대한 원한이었고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확고한 의지때문이었을까.
하지만 이러한 그의 이러한 원한과 삶의 의지는 박헌영의 죽음과 김일성을 중심으로한 북한노동당의 개인숭배정책으로 정신없이 어지러워진다. 북한의 한 언론인으로서 인민의 이름으로 당당하게 모순된 현실에 비판을 가하지 못하는 자괴감 속에서 그는 일흔을 넘긴다. 끊임없는 혁명의지의 낙관이 그를 지배하지만 사회주의의 바탕을 뒤흔드는 개인우상화와 세습권력 앞에서 끝내 그는 외로운 죽음을 택하고 만다. 하지만 이 책의 감동에 덧칠을 한 부분은 그의 죽음보다 오히려 아내와 아들 대신 이선진의 나머지 여생을 옆에서 함께 지켜주었던 최진이의 고백에서 더 진하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 그 일은 참 대단한 일이라는 생각을 해 봤다. 비록 소설이지만.
이런식의 사회적인 소재를 바탕으로한 소설들을 읽게 되면 끊임없이 '나'의 모습을 돌아보게 한다. 반성아닌 반성도 하게 되고 사람으로서 아름답게 살며 죽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회의감, 허무함을 느끼게도 한다. 때로는 삶의 정당함을 의식적으로도 찾게 한다. 마치 내가 이 땅에 살다가 가는 명분을 찾기라도 하듯이.
하~ 아름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아직 나는 잘 모른다. 하지만 자기 인생을 후회없이 산다는 것은 죽음을 앞 둔 한 평범한 사람에게는 매우 의미있는 일인지도 모른다. 행복한 삶이 사회적인 삶과 동떨어져서는 안된다는 어느 철학자의 말이 새삼 떠오르기는 하지만 이 말을 그대로 실천하는 이들은 드물다. 아니 그러한 사상을 오랫동안 가져가는 이가 드물다는게 맞는지도 모르겠다. 아름다운 집짓기는 또다시 새로운 사람들에게서 새롭게 지어져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나머지 두 권의 소설도 마저 읽어야 할 말이 더 있을 듯 하다.
인상 깊었던 구절 몇 가지만 소개한다.
그러나 사람과 사회가 과연 별개일까?
사회를 도외시한 사람의 탐색이 한계가 뚜렷하듯 사람의 문제를 깊이 있게 고려하지 않은 사회성에 대한 과도한 집중은 결국 혁명의 길에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지 않은가.
다시 돌아보거니와 명백히 난 실패했다. 그러나 실패가 반드시 그르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실패했으나 그보다 더 분명하게 자부할 수 있다. 옳은 길을 걸어왔노라고. 내게 주어진 삶을 온 순간마다 사랑했노라고. 주어진 한계 속에서 최선을 다했노라고. 그 한계는 아직 오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언젠가 무너질 것을 확신하노라고.
나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우리 지금 어디에 있는가. 오늘 조선에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당신이 누구인지 저는 모릅니다. 하지만 이미 사라진 수많은 이들이 제 몸 속에 살아 숨쉬었듯이 저 또한 당신의 몸 속에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삶은 그 뿌리부터 나눔이요, 사랑인 까닭입니다. 아직 오지 않은 당신을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