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돕이야기 만들기/행복을 꿈꾸는 삶

울었다. 속으로 많이 울었다.

갈돕선생 2009. 2. 20. 20:38

결국 떠나야 하는 날이 왔다. 그동안 2월 들어 이틀에 사흘에 한 번 꼴로 송별회를 했지만, 그리 실감이 나질 않아 제대로 된 이별도 못했다. 그런데, 어제 김해 어방초등학교를 떠나는 날에 나는 하루 종일 우울했다. 가슴도 울렁 거리는 것이 눈물만 흐르지 않았지 나는 속으로 울고 있었다. 아침 일찍 시청각실에서 마지막 직원 모임이 있었다. 떠나는 선생님들 대표로 말하라는 권유로 나는 갑작스레 단상에 올랐다. 떨리는 목소리로  말 끝에 '고마웠노라, 행복했노라'말을 했지만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어쩌면 영원히 볼 수 없을 우리 반 아이들과 헤어질 때는 나는 더욱 크게 울고 있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아이들과 헤어질 때 모든 아이들과 포옹을 했다. 아이들도 헤어짐이 아쉬웠던 탓일까 다른 때보다 나를 훨씬 꼭 끌어안아 주었다. 한 명 한 명 나는 한참을 끌어 안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울었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몰랐다. 그저 슬프고 아쉽고 떠나기 싫고 떠나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웃으며 나를 보내는 2학년 1반 갈돕 4기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속으로 속으로 많이 울었다.

 

서둘러 송별회에 참석하러 부산으로 갔다. 회식하는 곳에서도 신이 나지 않았다. 두루두루 다니며 인사를 해야 하건만, 2학년 동학년 귀퉁이에 앉아 나는 멍하니 있었다. 그러자 오히려 교장, 교감선생님이 술을 따라주며 이별 인사를 건네셨다. 고마운 교장선생님. 생각이 다른 부분이 있었지만, 언제나 내 교육활동을 믿어주시며 몰래 도와주셨던 분. 교장선생님 모습을 보자, 지난 행정실장님이 하시던 말이 문득 떠 올랐다. "교장선생님이 박진환선생님이 부탁하는 건 다 들어주라 했습니다." 내가 조금만 더 철이 들었다면, 좀 더 살갑게 대하며 예의를 갖춰야 했던 분과 이렇게 어설프게 헤어지는게 못내 죄송했다. 내년 퇴임하실 때 꼭 찾아뵙겠다는 말조차 나는 속으로 삼켜야 했다. 회식자리에서 떠나실 때 내 손을 오랫동안 꽉 잡으시며 아쉬운 이별을 말없이 드러내셨던 교장선생님. 내년에 꼭 찾아 뵙겠습니다.

 

뒤이어 동학년선생님들과 두 시간동안 차를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거의 말 없이 앉아 있던 나는 또 그렇게 선생님들과 헤어졌다. 여덟명 동학년 교사 중에 막내였고 유일한 남자였으며 튀는 학급운영으로 미운 털이 박힐만도 한데, 은근히 좋아하고 배웠다는 덕담을 건네주는 부장선생님 말씀을 듣자 어찌나 죄송스러웠는지 모른다. 특히 우리 부장선생님은 나와 3년동안 함께 했던 분이셨다. 아이들과 지내는 시간이 많아 동학년 모임에 조차 자주 드나들지 못했던 나를 미워하지 않으시고 믿어주셨던 분. 헤어지고 난 뒤 아쉬워 손전화 문자로 죄송하다 고맙다 문자를 보냈더니 무슨 말이냐며 원했던 곳으로 가게 돼 정말 축하하고 우리가 더 많이 배웠고 좋아했다며 행복하게 살라 답장이 날아왔다. 부장선생님, 정말 고맙습니다.

 

학교를 떠나고 보니, 내가 학교 일에 지나치게 소홀하고 선생님들과 벽을 쌓고 살지 않았나 하는 반성도 하게 됐다. 그것도 오늘에서야 말이다. 오늘 나는 새벽에 김해를 떠나 금산이 아닌, 광주로 차를 몰았다. 광주에 학급운영 강의요청이 오래전에 있어서였다. 서둘러 어렵게 도착한 전교조 광주지부 강의실에 들어서서 30명 남짓한 광주지역 선생님들 앞에서 학급운영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내가 김해를 떠나는 일을 얘기하면서 순간 깨닫게 된 걸 그대로 말해 버렸다. 이제껏 나는 내 학급운영 결과가 내가 만들어낸 나와 아이들만의 작품이라 여겼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아니었다고. 앞과 뒤에서 도와주셨던 교장선생님을 비롯한 동학년선생님들의 암묵적인 지지가 이제야 보였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나는 어제 회식자리에서 3학년 부장선생님이 내게 다가와 조용히 말씀해주시던 말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박선생님, 선생님은 나보다 나이가 어리지만 참 존경했습니다. 진짭니다. 멀리서 선생님 하는 거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나가 그렇게 살지 못하지만, 정말 보기 좋았습니다. 멀리 가셔도 변함없이 꼭 그렇게 살았으면 합니다."

 

늘 나와는 다른 생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 여겼던 분들이 나를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으며 자신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하는 것에 믿음이 갔다는 말씀을 듣고 어찌나 송구스러웠는지. 내가 새롭게 출발할 충남에서는 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다짐했다. 이래서, 이래서 나는 시간이 갈수록 우울하고 가슴으로 울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결국 강의하는 도중 울컥해서 눈물을 찔끔 보이고 말았다. 강의 듣는 선생님들이 순간 당황해 하셨고 나 또한 빨리 수습해야 했다.

 

강의를 마치고 광주지역선생님들과 함께 점심을 먹고 이내 금산으로 차를 몰았다. 어제는 비, 새벽에는 안개비, 낮에는 바람과 눈이 우울함을 더해주었다. 두 시간 넘게 달려 와 금산 집에 짐을 풀어 놓았다. 그런데 나는 또 울어 버렸다. 바빠서 미쳐 풀어보지 못한 선물과 편지들 때문이었다. 먼저 이정아선생님이 건넨 국어모임선생님들의 선물을 풀어 보았다. 작은 붙임쪽지에 적어 놓은 이정아선생님의 간단한 글귀마저 왜 이렇게 가슴을 아리게 하는지. 선생님 가르침 잊지 않고 좋은 교사되겠다는 이정아선생님의 글을 읽고 나는 울어버렸다. 김해 모임선생님들, 그동안 정말 고마웠습니다. 선생님들 덕분에 제가 더 아이들을 생각하는 교사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멀리 있지만, 우리는 늘 함께 할 겁니다.^^

 

이어 하영이어머님이 살짝 건네신 선물을 풀어 보았다. 고맙게도 아주 예쁜 부부 숟가락이었다. 새집에 사는 나를 생각한 선물이라 생각하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어제 전화를 주시며 아쉬움을 전해 주시던 생각이 났다. 역시 편지가 담겨 있었다. 구구절절 가슴에 와 닿는 고마운 말들이어서 나는 또 울어야 했다. 또 한가지! 짐을 풀면서 나오는 커다란 작품들. 준승이 어머님이 새로 가는 학교에서 쓰라며 피오피 게시판 작품을 여러 가지가 눈에 띄었다. 마치 멀리 떠나는 철없는 아들 챙겨주시듯 주섬주섬 보따리를 챙겨주셨던 많은 어머님들께 어떻게 이 고마움을 전할까.  이 밖에도 많은 어머님들의 전화와 문자가 있었다. 고맙고 고마웠다. 그때마다 순간 순간 내가 정말 이곳을 떠나야 했던 가 하는 후회마저 들었다.

 

돌이켜 보면 지난 5년 김해, 아니 지난 16년간의 경남생활은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시간이었다. 충남으로 가는 내 모습에서 그 16년이라는 소중한 시간을 마치 내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는 것 같기도 해 어쩌면 나는 더욱 슬펐고 울었는지도 모른다. 언제 이 우울을 이겨낼지 모르겠지만, 물론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 생각하지만, 도무지 가라앉지 않는 이 슬픔은 여전히 나를 힘들게 하고 있다. 울었다. 나는 어제 오늘 많이 속으로 많이 울었다. 내일도 아마 울 것 같다. 나는 지금 아주 힘들다.

 

미처 인사드리지 못하고 온 분들이 많아 죄송하고 또 죄송하다. 끝으로 아쉬운 마음을 담아 지난 2주간 아이들과 했던 활동과 나를 무척이나 좋아해주시며 도와주셨던 우리반 어머님들과 찍은 사진 한 장을 올려 본다. 2학년 우리 꼬마들, 선생님 너희들 참 사랑했다. 어머님들 이 자리를 빌어 다시 인사드립니다. 정말 고마웠습니다. 어머님들이 저를 잊지 못하겠다고 하셨듯이 저도 어머님들을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지난 일 년 참 행복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했던 만둣국 잔치>

 

 

 

 

 

 

 

 

<나만의 초만들기>

 

 

 

 

 

 

<선생님의 선물 - 나무목걸이>

 

 

 

 

 

<담임이 마련한 식사자리에 기꺼이 찾아주셨던 우리 반 어머님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