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만에 학교로 돌아왔는데, 일 년만에 내 아이들을 만났는데.
낯설기보다 설렘이 앞서는 것이 이게 모두 세월 탓만은 아닌듯 싶었다.
딱 10년 전, 밀양에서 일곱명 4학년 아이들과 만났던 일이 문득 떠 오른다.
그래서 그런지 작은 학교 2학년 다섯 명과 새롭게 만나는 일도 그리 낯설지 않다.
다만, 조금씩은 달라진 근무환경과 주변 사람들이 낯설 뿐.
오히려 그들이 나보다 더 이 환경을 낯설어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지난 주 다섯 명 아이들 가운데, 세 명을 만났는데, 오늘은 네 명만 먼저 보게 됐다.
걱정했던 한 아이가 오늘도 역시 첫날부터 학교를 나오지 않는다.
나중에 알아보니 오늘 학교 오는지도 몰랐다한다.
그 아이의 동생이 오늘 입학하는 날인데, 홀로 키우는 아이의 아버지가 술로 하루를 보낸
어제 일로 미처 챙기지 못한 탓이었다. 진작에 아이의 가정환경을 익히 들었지만, 씁쓸했다.
나머지 네 명 모두 귀여운 녀석들인데, 오늘 오지 않은 한 아이에 대한 생각으로 나는 그렇게 하루를
보낼 형편이었다. 입학식이 시작될 무렵, 행정실장이 급히 차를 몰아 입학할 1학년 아이와 우리 반 아이를 데리고 들어와 내게 아이들 넘겨주었다.
아직 잠이 덜 깬 얼굴. 윗옷과 바지가 모두 때에 쩔여 있고, 윗옷에 달려 있는 모자를 눌러쓴 채 한 곳만 응시한 채 잔뜩 심드렁해 있었다. 입학식이 진행되던 중 나는 찬찬히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아이를 다시 보았다. 때가 덕지덕지 붙어 시커먼 손이 살짝 터져 핏기가 보이는 아이는 얼굴이 빨갛게 상기 돼 있었다.
"반갑다. 내가 너랑 일 년을 지낼 담임선생님이야."
아이는 시선을 내게 주지도 않는다. 강당의 단상만 지켜 볼 뿐. 도무지 아이의 상태를 알 수가 없었다.
일단 시간이 필요한 듯 했다. 하긴 오늘 처음 보는 아저씨가 자기 보고 담임이라고 했으니......
교실서 다시 인사를 나누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학식을 마치고 돌아온 교실에서 나는 다시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반가워. 선생님은 너희들과 처음 만나고 헤어질 때 꼭 악수를 하는데, 인사로 악수나 할까?"
아이는 입을 벌리지도 않고 역시나 내 얼굴을 보지 않은채 무뚝뚝한 표정으로 책상만 응시한 채
보일락 말락 싫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나는
"에이, 다른 친구들 하고는 다 했는데, 좀 해주라. 어때?"
이제는 아예 손을 배에 떡 하고 붙이더니 치고들어올 빈틈조차 주지 않는다.
"자꾸 이렇게 말을 안 들으면 뽀뽀할 거야."
"현준이는 이미 선생님한테 당했는데, 맞지?"
히히 거리며 웃는 현준이는 내게 뽀뽀 당한 걸 은근히 좋아하는 눈치였다.
누구에게.. 그것도 담임선생님에게 관심을 받는 것이 좋았던 탓일까. 지난해까지만 해도
늘 말썽쟁이로 낙인이 찍혀 있던 이 녀석과 처음 만나 정을 나누는 행위가 뽀뽀였으니
이 아이에게는 적잖은 충격(?)이었을 터. 그것이 두려웠던 탓일까? 이 녀석, 대뜸 손을 내민다.
때를 놓치지 않아야겠다는 마음으로 나 또한 성큼 손을 내밀어 잡았다.
"와, 고맙다. 정말. 이제 잘 지내보자."
손 내밀지 않으려 꽉 쥐고 있던 손에는 이미 땀이 잔뜩 배여있었다. 땟국물이 흘러내리는 아이의 손은
생각 밖으로 따뜻했다. 억지로 받아낸 악수였지만, 아이는 아마도 내게 손을 내밀고 싶었던 것으로 보였다.
손을 잡고 나서는 조금은 안심이 됐다. 나만 열심히 하면 이 아이는 내 편으로 만들 수 있겠다 싶었다.
그 뒤로 아이들에게 옛이야기 한 편을 들려주며 마음을 여는 시간을 마련해 보았다.
누구나 좋아하는 옛이야기로 이 아이의 마음은 살짝 열어보았다. 결국 입을 벌리고 크게 웃어 보인다.
아이들에게 자기 소개서도 받았다. 도시 아이들, 2학년과 달리 아이들이 글을 적고 읽는 게 서툴게만 보였다. 세 명은 그런대로 괜찮았는데, 나머지 두 명은 상태가 심상치 않다. 뽀뽀한 녀석과 겨우 악수를 받아낸 이 녀석이 그랬다. 소개서에 드러난 아이들 모습은 우울했다. 도무지 부모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 같지 않다.
도시 아이들 못지 않게 심각해 보인다.
자기가 무엇을 잘하는지 관심도 없고 하고 싶은 것 가지고 싶은 것도 모르겠다고 써내는 아이도 있었다. 부모가 자기에게는 별로 관심도 없어 한다는 아이들이 대부분이다. 사랑과 관심이 필요한 아이들. 이 아이들 입에는 지금부터 뭐 할 거냐는 눈빛만 가득하다.
'그래 너희들과 일 년 신나게 놀 거다. 됐냐?'
함께 점심을 먹을 때였다.
"밥 다 먹어야지. 남기고 뭐 하냐?"
뒤에서 들리는 투박한 목소리로 나는 순간 그 아이의 아버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내 옆자리에서 함께 밥을 먹는 아이 곁에서 아버지는 똑 같은 소리를 되풀이 한다.
"밥 다 먹어야지, 남기면 안 되야."
담임이 옆에 있는 데도 아이의 아버지는 머쓱한지 가만히 있다. 나는 얼른 일어서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아이 담임이라는 뜻에 인사였는데, 악수만 받고는
"언제 수업 마칩니까?"
며 어색한 상황을 넘어가려 했다. 덩치는 산만한 어른이었는데, 술과 노동에 찌든 까무잡잡한 얼굴이 보였다. 이를 어쩌나. 순간 그의코에서 코피가 흘러내리는 것이 아닌가. 그는 빠르게 손을 코 근처로 가져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뭉게 버렸다. 난처해 할까 싶어 나도 아는 척을 하지는 않았다. 2학년은 수업 마치려면 더 기다려야 한다는 말에 그는 급식실 밖으로 조용히 나가버린다. 인사도 없이. 막노동으로 생계를 꾸려가며 엄마 없이 두 아이를 키워야 하는 힘겨운 삶을 사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내가 맡은 이 아이가 문득 걱정이 되었다.
부모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하고 자라는 이 아이는 낯선 이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몸을 잘 씻지도 않도 조금은 자기와 다른 모습에 나머지 네 명이 이 아이를은 싫은 표정이 역력하다.
지난해 이런 저런 사건도 있었다는 말을 들었는데, 조금만 주위 어른들이 신경을 쓰면 될 일을 너무 크게
만든 것은 아닌 가 싶었다. 지난해 복식학급이었던 이 아이들의 학력은 이제 갓 1학년 입학한 아이들과
크게 달라보이지 않았다. 처음부터 다시 차근차근 시작해야 할 형편이다.
교장선생님님 잠깐 교실로 들어오시더니 왜 2학년을 맡겼는지 알겠지 않냐며 수고 좀 해달라 한다. 이미 나를 알고 있는 학부모들은 나를 6학년 담임으로 맡겨달라고 했단다. 하지만 지난해 문제가 많았고 학력이 떨어지는 2학년 아이들을 보살필 임무는 내가 적당했다 생각했단다. 덕분에 내가 신청한 2학년을 하게 돼 사실 나는 불만이 없다.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어떤 아이든 맡아서 내가 책임지고 아이 곁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 공교육 교사의 삶이 아닌가.
아이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알아보기 위해 바른생활 첫 단원을 다뤄 보았다. 첫 단원 주제는 가정이나 학교에서 스스로 할 일을 찾을 수 있고 해낼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생각보다 아이들은 집에서 자기 일을 곧잘 해내고 있었다. 부모의 도움을 잘 받지 못하는 가정에서 자라는 아이들이어서 그런지 평범한 도시 아이들보다 훨씬 많은 일을 하는 아이도 있었다. 문제의 그 아이가 그랬다. 아빠, 할머니, 동생의 빨래까지 책임져야 하는 그 아이는 이제 갓 2학년 여학생이다. 오늘 놀란 건 점심시간이었다. 우리 학교는 보통 넉넉한 점심시간을 이용해 간단히 교실 청소를 하는데, 잠깐 내가 일을 보는 사이에 교실을 쓸고 물걸레질까지 한바탕 청소를 해대는데 어찌나 잘하는지 그저 놀랄 뿐이었다. 지난해 1학년 입학 이후부터 줄곧 해왔던 일이라 한다. 도시학교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견하다 칭찬을 해주었지만, 한편으로는 왜 이렇게 씁쓸한지.
수업을 마칠 즈음 6학년 아이들이 교실에서 짐들을 챙겨갔다. 한 녀석은 슬그머니 와서
"선생님, 왜 2학년 하셨어요. 6학년 하기로 했잖아요."
"사정이 그랬어. 미안해."
쭈뼛쭈뼛 교실을 서성이다 나가는 또 한 녀석은 듣지도 않는 2학년 아이들 뒤통수에 대고
"너희들 좋은 선생님 만난 줄 알아."
하고는 문을 닫고 나간다. 나를 기다려 준 아이들과 부모가 있었다니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이 아이들은 정과 사랑에 배고픈 아이들이다. 그건 예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 내가 사는 이곳은 딸기농가로 유명한 곳이지만, 빈부격차가 꽤 큰 지역이기도 하다. 빈농, 빈민의 아이들이 많은 지역에서 아이들과 지내는 교사로 사는 일이 한 편으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조금 더 큰 학교에서 똑똑한 아이들과 지내는 일도 즐겁고 또 다른 행복을 주지만, 교실 속 교사의 정과 사랑에 굶주리고 일단 마음만 열면 모든 걸 던져주는 이 곳 아이들과 지내는 올 일 년이 내게 또 어떤 기쁨을 줄 지 기대가 크다. 오늘 아이들과 헤어지면서 악수를 했다. 내가 뽀뽀를 한 열 번을 해 주었던 현준이는 악수를 하고 난뒤,
"현준아, 오늘 선생님이 너한테 뽀뽀 많이 해줬는데, 너도 나한테 한 번은 해줘야지."
그랬더니 씩 웃으면서 내게 다가와 수줍게 볼에 뽀뽀를 해 준다. 다른 녀석들은 '으~'하면서 징그러워하지만, 내심 다들 부러워 하는 눈치였다. 나만의 착각일지 모르지만. 하하하.
오늘 내 마음을 송두리채 빼앗은 아이는 맨 마지막에 남아 내가 내민 손을 잡아 주었다.
"선생님은 올 해 너랑 제일 친해지고 싶은데, 어때?"
"난 싫은데요."
아쉽지만, 말과 표정이 다른 그 아이 얼굴에서 애써 희망을 찾아 본다. 그래도 오늘 그 녀석과
말을 하고 악수를 하고 함께 웃었으니 첫 날치고는 진도가 빠르지 않나 위안을 삼아 본다.
아~ 이번 주 잘 준비해서 다음 주 월요일 다섯 명 아이들과 신나게 놀아 볼 란다.
놀면서 공부하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 했으니 첫 주부터 약속은 지켜야 하니 말이다.
낯선 듯 낯설지 않았던 하루도 보슬보슬 내리는 비와 함께 그렇게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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