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그 아련한 추억들/아들과 제주올레를!

[제주여행] 4월 18일 이야기- 2

갈돕선생 2013. 4. 25. 19:41

9코스의 종점 화순지역은 원래 지금 한창 논란 속에 군사기지 건설 중인 강정을 대신하는 곳이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원래 해군기지는 화순이었다는 것. 제주 현지인도 제주에 군사기지가 들어서면 가장 적당한 곳이라고 인정할 만큼 군사의 요지라고 한다. 그것이 밀려 밀려 강정으로 들이닥쳐 지금까지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찾은 이곳 화순에는 또다른 플레카드가 보였다. 해양경찰기지 건설 반대! 올레꾼으로 걷는 이 길이지만 참으로 답답하고 안타까운 심정이었다. 저 아름다운 자연을 군사와 경찰들의 기지로 만들기 위해 뭉게고 깨뜨려야만 하는지.

 

 

 

 

 

 

 

멀리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는 산방산을 바라보며 화순금모레해변을 지나 소금막을 지나면서 만나게 되는 참으로 독특한 풍경은 퇴적암지대다. 8코스의 해괴한 해변가 검은 돌 바위처럼 마치 외계에 온 듯한 착각을 일게 하는 퇴적암들의 끊임없는 행렬은 이 길이 과연 올레길인가 싶을 정도였다. 그 길을 걸어야 다음 길을 갈 수 있어 힘들게 넘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이 퇴적암을 올레꾼들에게 내준다면 크게 상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길을 지나면 흙길을 넘어 긴 모래밭길이 이어진다. 그다음은 다시 숲길. 바닷가의 모습이 계속해서 다양하게 바뀌어가는 흥미로운 길이다. 완만하고 평탄한 숲길에 이어 산방연대를 지나면 산방산의 위용이 새롭게 보인다.

 

 

 

 

 

산방산은 80만 년 전에 형성된 종모양의 용암덩어리로 제주 서남부 어느 곳에서나 우똑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산방연대에서 내려오면 관광객들이 꽤 몰려 오는 용머리 해안쪽으로 들어선다. 마침 수학여행차 내려온 학생들과 교사들이 너나할 것 없이 이곳을 차지해 올레길을 걷는 게 아니라 관광지 중심을 걷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지금은 공사중으로 보이는데, 이곳에 큰 배가 하나 있다. 이곳이 바로 하멜 전시관이다. 배를 지나 목재 울타리를 두른 산책로로 조금 걷다가 흙길로 들어서는데, 바닷길은 송악산까지 쭉 이어진다. 풀밭길, 검은 모래밭길, 바윗길 등 다양한 길을 걷다보면 아름다운 사계포구에 이른다.

 

 

 

 

 

 

 

사계포구를 돌아 나가니 해변도로가 송악산까지 이어진다. 다양한 형태의 길을 걷다보면 사계화석발견지를 만나게 된다. 이곳이 중요한 까닭은 바로 사람 발자국 화석이 있기 때문이다. 길을 걸으며 안내판을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이어 송악산 편의점에 들렀다. 시원한 음료수를 한 잔한 우리는 서둘러 길을 나섰다. 조금씩 발걸음이 무거워진 탓에 더 힘을 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송악산을 둘러가는 길을 가려다 휴게소에서 스탬프를 찍고 놔둔 패스포트때문에 휴게소 직원이 또 연락을 주었다. 벌써 두 번째. 아들에게 살짝 짜증을 냈다. 오래 길을 걷다보니 서로가 자꾸 집중력이 떨어진 탓인데, 순간 나는 아들 탓을 했다. 아들을 휴게소에 보내놓고 괜히 미안했다.

 

 

 

 

 

 

 

 

 

 

다시 패스포트를 찾아 송악산을 두르는 길을 떠났다. 송악산 둘레를 따라 걷는 길은 바다를 내려다 보는 전망이 정말 아름답다. 절벽을 따라 걷는 곳이 많아 나같이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적지 않은 두려움을 주는데, 그런데도 경치를 바라보지 않을 수 없는 건, 그만큼 이곳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왼쪽으로 바다풍경이 보인다면 오른 쪽으로는 산 아래 너른 평지에는 말들이 보인다. 송악산 북쪽으로 가면 잔디가 깔린 너른 벌판이 보이는데, 이곳에서 말소리도 들리고 목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그야말로 자연그대로의 말들이 마치 그림처럼 뛰어 노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참으로 영화나 사진에서 봤던 장면을 보니 정말 환상적이었다.

 

 

 

 

 

 

 

 

 

 

송악산을 지나 다시 섯알오름쪽으로 방향을 틀면 숲길이 나온다. 이 숲길을 지나다 보면 일제의 흔적을 적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이 못지 않게 섯알오름에는 슬픈 역사가 있는데, 책에 나온 글처럼 참으로 제주는 정말 아름다운 곳에서 가장 처참한 사건과 상처들이 많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섯알오름에는 한국전쟁 발발후 전국적으로 보도연맹원을 학살 할 때, 모슬포를 중심으로 한 제주 서부지역의 예비검속자 210명이 학살당했다고 한다. 2001년 2월. 유족들이 희생자 시신과 유물을 재발굴하면서 큰 구덩이가 패였는데, 섯알오름의 내리막길 끝에는 바로 이 사건에 대한 안내판과 현장, 위렵탑이 있다. 사람이 이토록 잔인할 수 있는지 믿기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을 지나면 알뜨르 비행장이 나온다. '아래에 있는 너른 들'이라는 뜻의 제주어로 일제감정기 대륙침략을 위해 항공기지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일본은 이곳에 1926년부터 대대적인 비행장 건설을 했다고 한다. 지금은 일제의 잔혹성을 알리는 역사교육장으로 쓰고 있다는데..... 이곳을 지나 해안가로 넘어가는 길이 또 참으로 아름다웠다. 멀리 보이는 길 가의 나무 몇 그루가 너른 들판과 어울릴 듯 말듯 조화를 이루는 모습은 그야말로 한폭의 그림이었다. 어딘가 사진에서 본 듯한 그 그림. 길을 가다가 나는 연신 사진을 찍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하멜이 표류했다는 하모해수욕장을 지나 10코스의 종점인 모슬포에 도착했다.

 

 

 

 

 

 

 

 

 

 

 

모슬포에 도착해 안내소에서 스탬프를 찍고 아들과 나는 지친 다리를 끌고 예약한 숙소로 갔다. 멀지 않은 곳에 다행히 숙소를 정해 놓은 탓에 반갑게 숙소를 찾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곳 문 앞에는 태극기와 영국기가 나란히 걸려 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곳 여주인과 영국인 남편이 결혼해 정착해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는 곳이었다. 친절하고 시원시원한 일처리. 이른바 양옥집을 게스트하우스로 꾸며 많은 사람들을 초대하는 이곳은 입소문을 타고 많은 분들에게 잘 알려진 곳이어서 나 같이 우연히 찾는 사람들 말고 오늘만 해도 여러번 찾는 객들이 적지 않았다.

 

 

 

 

 

 

 

 

 

 

그렇게 짐을 풀고 아들과 나는 저녁을 먹으러 이곳 모슬포에서 유명하다는 나중에는 줄을 서서 먹어야 한다는 홍성방이라는 중국집을 찾았다. 다행히 조금 일찍 서두른 탓에 우리가 앉을 자리는 있었다. 점심을 라면으로 때운 우리는 정말 배가 고팠다. 또 면을 먹는 것이 그랬지만, 이런 맛을 또 언제 볼까 싶어 충분히 먹으려 했다. 짜장 곱배기, 해물짬뽕, 해물볶음밥. 이렇게 주문을 하자 주문받는 직원이 혹시 한 분 더 오냐고 물어 아들과 나는 웃었다. 10여분이 지났을까. 우리가 주문한 음식이 나왔는데, 정말 생물을 넣어 만든 음식이어서인지 푸짐도 푸짐이지만 정말 맛있었다. 볶음밥에 들어간 해물, 짬뽕 위에 얹어진 엄청난 해물, 짬뽕보다 맛있던 짜장면까지 우리는 충분히 먹었다. 모슬포 대정초등학교에 계신 김경남선생님의 추천이 과하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이렇게 배를 두드리며 숙소로 들어서자 거실 탁자에 안주인과 젊은 여자손님 한 분이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그리고 막걸리 한 잔 하잖다. 며칠 만에 들려오는 반가운 소식인지. 그동안 게스트하우스에서 너무도 조용히 보낸 것 같아 아쉬웠는데, 이렇게 반가울수가. 옷만 살짝 갈아입고 나와 그들과 기쁘게 술 한 잔을 했다. 마침 감귤막걸리가 있어 고맙게 받아 먹었다. 나중에 점점 손님들이 한 두 분씩 들어와 게스트하우스 거실은 후끈 달아올랐다. 제주에 여행을 온 두 부부. 제주에 남편 몰래 집을 사두고 틈날 때마다 찾아온다는 어느 중등 여선생님. 직장인, 학생, 나중에는 게스트하우스 영국인 남편(볼튼 출신이라 게스트하우스 벽에는 이청용사진과 사인이 걸려 있다)과 어린 18개월 아기까지 매우 흥겨운 분위기가 연출됐다.

 

 

 

 

 

술이 모자라고 안주가 모자라자 주인장은 자신이 캐온 쑥으로 전을 붙여 내놓고 나는 한라봉을 쏘고 뒤늦게 합류한 사람들은 막거리를 더 사면서 밤 11시까지 흥겨운 이야기 꽃을 피웠다. 이렇게 낯선 공간에서 낯선 사람들이 만나도 이렇게 즐겁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 이번 제주여행을 통해 겪은 최고의 경험이 아닌가 싶다. 이제는 조금 나아졌지만, 낯가리고 쉽게 사람을 사귀지 못했던 지난 날의 나를 돌아보면 이 상황을 내가 즐기고 있다는 건 정말 놀라운 일이다. 스스로에게 말이다. 어쩌면 그만큼 나이가 들었다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하여간 이번 제주여행의 마지막 여행길에서 나는 또 한 번의 아름다운 경험을 했다. 주인장에게는 올 가을 11코스 출발지점부터 시작해야 하기에 이곳을 한 번 더 찾겠다고 했다. 시설은 편한 곳은 아니지만 정을 나눌 수 있어 이곳은 정말 다시 찾고 싶은 곳이다.    

 

아, 이제 내일 가파도를 간다. 이곳을 끝으로 아들과 함께 한  제주 봄여행도 이제 막을 내릴 것이다. 몸은 힘들지만, 아쉽다. 가을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