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읽으면서 실시간으로 막연한 가난, 굶주림에 대해 떠 올려 보았다. 즉, 가난과 굶주림은 색깔로 치자면 무언가 어둡고, 냄새로 따지자면 칙칙하며, 살에 닿는 느낌을 말하자면 매우 차갑고 건조한, 때로는 습기가 가득 찬 그 무엇.
하지만, 나는 그러한 가난을 모른다. 그렇다고 그렇게 넉넉한 집안에서 자라지는 못했으나, 자식새끼 굶주려가며 키우지는 않겠다는 우리 아버지의 책임감 덕분으로 나는 그다지 잘 먹지도 입지도 못하는 유년을 보냈지만, 그것이 가난이었는지 조차 실감하지 못하고 지냈다. 더구나 적어도 중학교 때까지는 성적이 상위권이었음으로 내 주변은 언제나 공부 잘하는 부자 아이들이었다.
그 아이들 틈에서 잠시나마 나는 중산층 그 이상이었다. 그들도 나를 성적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로 나를 그들 옆에 끼워 주었고, 적어도 나는 그 때만큼은 중산층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더욱 가난은 나와 거리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머리가 굵고 대학생활을 지나 작은 농촌의 교사로 있으면서 나는 책에서 공부했던 가난의 근원과 폐해를 바로 지금 내 주변에서 이제야 눈과 귀로 보고 듣는다. 그 옛날 얼음골 쪽 산내초등학교에 있을 때도 그 가난은 들렸건만, 지금처럼 그렇게 와 닿지는 않았는데......
우리 반 기쁨이는 아직도 콘테이너 박스에서 여섯 식구가 농사를 짓고 살고 있고, 바쁜 농사일에 정신이 없는 부모 덕과 동생 뒤치다꺼리에 아침을 늘 거르고 온다. 그래서 그런지 이쁜 기쁨이 얼굴엔 언제나 내가 놀려대는 허연 버짐이 있다.
말을 하지 않고 우둔하다 하여 전에 있던 학교의 담임으로부터 짐승처럼 맞기만 하여 더더욱 선생님인 나에게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 중완이는 오직 하고 싶은 것이 아버지 농사일 돕기란다. 중완이 어머님은 작년 12월 학예회가 있다고 중완이가 직접 다른 아이들과 함께 수화(手話)공연을 한다고 바쁜 농사시간을 쪼개 학교로 찾아왔다(이전까지 중완이는 언제나 따돌림을 당했었다고 한다. 아이들과 심지어 선생님에게서조차). 내 앞에서 이러한 중완이 얘기를 꺼내며 그 육중한 몸을 가누지 못하고 그 어머님은 끝내 억수 같은 눈물을 한 시간이나 흘렸다. 그리고 나와 헤어지는 길 끝에서조차 '잘 부탁하십시더'를 연달아 내 뱉었다. 그 아이와 이제 2개월밖에는 남지 않았는데도.
이 밖에 우리 아내 학교에서 농사 타작 도중에 한 아이의 아버지가 손가락이 세 개나 잘려 나가 두 개는 봉합을 했는데, 나머지는 찾지를 못했다느니, 시골 길 근처 얕은 늪에서 놀던 어린 아이가 엎어져 일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죽어버렸다는 얘기, 도시에 살다 부모가 교통사고로 다 죽어 어쩔 수 없이 하나밖에 없던 그 손녀는 무관심하고 무지한 할아버지 내외의 보살핌으로 결국 가출을 하여 지금까지 어디에 있는지 소식도 없다는 얘기. 우리 주변의 가난은 화려하고 달콤한 텔레비전 속의 삶들과 그렇게 엄청난 거리를 두고 있었다.
이 책은 바로 이러한 가난을 얘기한다. 그리고 굶주림을 지나쳐 비굴한 인간들의 모습까지 까발린다. 조세희라는 그 옛날 70년대 이른바 '난쏘공'이라 불리는 책을 쓴 저자의 글솜씨로 포장이 되어 강원도 탄광촌이었던 사북 지역의 모습을 찍은 여러 장의 사진들과 함께 그는 가난의 억울함과 질곡, 비참함 그리고 나아가서는 읽는 독자에게 무거운 책임감을 요구하고 있었다.
'알리바이라면 우리 시대의 시민 모두가 갖고 있다. 그러나 우리 땅 어느 곳의 역사가 20년밖에 안 된다는 것은 곧 그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을 남에게 전가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라고 말이다.
사실 이 글은 1985년에 첫 출간이 된 것이라 시간적인 가난의 양상은 지금과는 분명 다르다. 그런데 가난이라는 낡은 옷의 그림이 70-80년대라는 것말고, 지금과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느낌을 받은 것은 왜일까.
이제 책 속으로 잠시 들어가 볼 필요가 있겠다. 이 글 본래의 취지는 책소개임으로.
조세희씨는 가난의 아픔을 얘기하는 출발로 '어린 왕자'라는 소품을 빌린다. 작가는 '어린 왕자'와 끊임없이 얘기하며 이 놈의 가난은 우리 땅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되묻고 있다. 이후 사북지방에서 어렵사리 얻은 아이들의 글모음집을 통해 아이들의 눈을 통해 본 사북지역의 가난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자 했다. 부모님을 잃고 작은 집에서 학교에 다닌 5학년 한식이의 아래와 같은 글은 너무 가슴을 시리게 한다.
어머니의 거짓말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나는 땅에서 울고 있는데 어머니가 "한식아, 이리와, 뭐 줄게" 해놓고 가면 안 주고 나를 꼭 붙들어 놓고 달랬다.
어머니
나는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속을 많이 썩였다.
과자 사달라 장난감 사달라 해서 어머니가 홀쭉해져 갔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사달라고 졸랐다.
형이 아팠을 때
우리형이 아파서 어머니가 요구르트 사주시곤 했다. 형은 안 먹고 나를 주었다. 그러면 나는 "형아, 먹어!"하고 밖으로 뛰어 나왔다.
우리 형 생일
우리 형들은 서울에서 일한다. 우리 작은 형, 큰 형 모두 생일을 안 한다. 지난 겨울 방학 때 서울 형들한테 갔다. 그런데 우리 작은 형 생일이었는데 알면서도 그냥 지나갔다. 나는 잠자리를 펴고 잘라고 하니 그 생각이 나서 잠이 안 왔다.
조세희는 이후 자신이 쓴 소설 중 <풀밭에서>의 일부를 소개하고, 쓰다 버린 작품 <1979년의 저녁밥>의 일부를 통해 엽기적인 부의 축적과 구토하고 싶은 그들의 행각, 그리고 중산층 계급의 환상을 드러내고자 한다. 조세희의 이러한 독특한 산문집은 사북지방을 직접 방문하여 찍은 낡은 사진들을 통해 '침묵의 뿌리'라는 책을 완성 짓는다.
그리고는 아주 소박한 소망을 드러내기도 하는데, 2003을 맞이한 지금 이 소망이 아직도 유효하다는 인식을 하면서도 조금은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그만큼의 지나 온 세월 덕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 누구나 달라진 환경에서 살 수 있어야 한다. 저녁놀을 받고 있던 할아버지가 갑자기 기품 있는 생활을 할 수 있게는 못하더라도 양곡과 연탄의 지급량을 올리고 어느 정도의 영양가를 지닌 부식이 이따금이라도 좋으니 그 어른의 식탁에 올라가게는 해야 한다 …… (중략) …… 그것은 국민학교에 갓 입학한 어린이까지 아는 민주주의를 더 이상 파괴하지 않으면서 고통받는 다수를 소수 쪽으로 옮겨 놓는 일이다. 어려운 사람들의 생명이 지친 몸에 깃들어 있지 않게 하고도 다른 환경에 닿을 방법이 우리에게는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에게는 있을 것이다'라는 말은 앞에서 언급한 '알리바이'와 맞닿아 있다.
내 이웃의 가난함이 결코 자신의 책임과 그다지 멀리 있지 않다는 표현의 '알리바이'. 우리 이웃의 가난이 나의 무관심이었고, 내 식구의 목구멍에 거미줄이 우선 급했기에 나는 그 원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그 '알리바이'. 적어도 나는 내 이웃의 가난에게 난 '사랑의 리퀘스트'라는 2000원짜리 양심을 끝임 없이 쏟아 부을 수 있다는 또 다른 '알리바이'. 조금 더 부풀려서 어느 교사친구의 말처럼 내가 가난한 농촌의 아이들과 함께 하지 않는 이유는 도시 아이들의 건강한 사회인식과 역사성에 대한 고민도 마찬가지로 중요하기 때문이라는 색다른 '알리바이'. 우리는 그렇게 내 알리바이를 짜 맞추려 애쓰지 않는가.
하지만, 우리들은 가난과 억압이 드러나고 횡행하는 그곳에서 아무도 자유로울 수 없음을. 그곳의 책임을 우리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말할 이는 그리 많지 않음을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나는 그러한 가난을 모른다. 그렇다고 그렇게 넉넉한 집안에서 자라지는 못했으나, 자식새끼 굶주려가며 키우지는 않겠다는 우리 아버지의 책임감 덕분으로 나는 그다지 잘 먹지도 입지도 못하는 유년을 보냈지만, 그것이 가난이었는지 조차 실감하지 못하고 지냈다. 더구나 적어도 중학교 때까지는 성적이 상위권이었음으로 내 주변은 언제나 공부 잘하는 부자 아이들이었다.
그 아이들 틈에서 잠시나마 나는 중산층 그 이상이었다. 그들도 나를 성적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로 나를 그들 옆에 끼워 주었고, 적어도 나는 그 때만큼은 중산층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더욱 가난은 나와 거리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머리가 굵고 대학생활을 지나 작은 농촌의 교사로 있으면서 나는 책에서 공부했던 가난의 근원과 폐해를 바로 지금 내 주변에서 이제야 눈과 귀로 보고 듣는다. 그 옛날 얼음골 쪽 산내초등학교에 있을 때도 그 가난은 들렸건만, 지금처럼 그렇게 와 닿지는 않았는데......
우리 반 기쁨이는 아직도 콘테이너 박스에서 여섯 식구가 농사를 짓고 살고 있고, 바쁜 농사일에 정신이 없는 부모 덕과 동생 뒤치다꺼리에 아침을 늘 거르고 온다. 그래서 그런지 이쁜 기쁨이 얼굴엔 언제나 내가 놀려대는 허연 버짐이 있다.
말을 하지 않고 우둔하다 하여 전에 있던 학교의 담임으로부터 짐승처럼 맞기만 하여 더더욱 선생님인 나에게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 중완이는 오직 하고 싶은 것이 아버지 농사일 돕기란다. 중완이 어머님은 작년 12월 학예회가 있다고 중완이가 직접 다른 아이들과 함께 수화(手話)공연을 한다고 바쁜 농사시간을 쪼개 학교로 찾아왔다(이전까지 중완이는 언제나 따돌림을 당했었다고 한다. 아이들과 심지어 선생님에게서조차). 내 앞에서 이러한 중완이 얘기를 꺼내며 그 육중한 몸을 가누지 못하고 그 어머님은 끝내 억수 같은 눈물을 한 시간이나 흘렸다. 그리고 나와 헤어지는 길 끝에서조차 '잘 부탁하십시더'를 연달아 내 뱉었다. 그 아이와 이제 2개월밖에는 남지 않았는데도.
이 밖에 우리 아내 학교에서 농사 타작 도중에 한 아이의 아버지가 손가락이 세 개나 잘려 나가 두 개는 봉합을 했는데, 나머지는 찾지를 못했다느니, 시골 길 근처 얕은 늪에서 놀던 어린 아이가 엎어져 일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죽어버렸다는 얘기, 도시에 살다 부모가 교통사고로 다 죽어 어쩔 수 없이 하나밖에 없던 그 손녀는 무관심하고 무지한 할아버지 내외의 보살핌으로 결국 가출을 하여 지금까지 어디에 있는지 소식도 없다는 얘기. 우리 주변의 가난은 화려하고 달콤한 텔레비전 속의 삶들과 그렇게 엄청난 거리를 두고 있었다.
이 책은 바로 이러한 가난을 얘기한다. 그리고 굶주림을 지나쳐 비굴한 인간들의 모습까지 까발린다. 조세희라는 그 옛날 70년대 이른바 '난쏘공'이라 불리는 책을 쓴 저자의 글솜씨로 포장이 되어 강원도 탄광촌이었던 사북 지역의 모습을 찍은 여러 장의 사진들과 함께 그는 가난의 억울함과 질곡, 비참함 그리고 나아가서는 읽는 독자에게 무거운 책임감을 요구하고 있었다.
'알리바이라면 우리 시대의 시민 모두가 갖고 있다. 그러나 우리 땅 어느 곳의 역사가 20년밖에 안 된다는 것은 곧 그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을 남에게 전가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라고 말이다.
사실 이 글은 1985년에 첫 출간이 된 것이라 시간적인 가난의 양상은 지금과는 분명 다르다. 그런데 가난이라는 낡은 옷의 그림이 70-80년대라는 것말고, 지금과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느낌을 받은 것은 왜일까.
이제 책 속으로 잠시 들어가 볼 필요가 있겠다. 이 글 본래의 취지는 책소개임으로.
조세희씨는 가난의 아픔을 얘기하는 출발로 '어린 왕자'라는 소품을 빌린다. 작가는 '어린 왕자'와 끊임없이 얘기하며 이 놈의 가난은 우리 땅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되묻고 있다. 이후 사북지방에서 어렵사리 얻은 아이들의 글모음집을 통해 아이들의 눈을 통해 본 사북지역의 가난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자 했다. 부모님을 잃고 작은 집에서 학교에 다닌 5학년 한식이의 아래와 같은 글은 너무 가슴을 시리게 한다.
어머니의 거짓말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나는 땅에서 울고 있는데 어머니가 "한식아, 이리와, 뭐 줄게" 해놓고 가면 안 주고 나를 꼭 붙들어 놓고 달랬다.
어머니
나는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속을 많이 썩였다.
과자 사달라 장난감 사달라 해서 어머니가 홀쭉해져 갔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사달라고 졸랐다.
형이 아팠을 때
우리형이 아파서 어머니가 요구르트 사주시곤 했다. 형은 안 먹고 나를 주었다. 그러면 나는 "형아, 먹어!"하고 밖으로 뛰어 나왔다.
우리 형 생일
우리 형들은 서울에서 일한다. 우리 작은 형, 큰 형 모두 생일을 안 한다. 지난 겨울 방학 때 서울 형들한테 갔다. 그런데 우리 작은 형 생일이었는데 알면서도 그냥 지나갔다. 나는 잠자리를 펴고 잘라고 하니 그 생각이 나서 잠이 안 왔다.
조세희는 이후 자신이 쓴 소설 중 <풀밭에서>의 일부를 소개하고, 쓰다 버린 작품 <1979년의 저녁밥>의 일부를 통해 엽기적인 부의 축적과 구토하고 싶은 그들의 행각, 그리고 중산층 계급의 환상을 드러내고자 한다. 조세희의 이러한 독특한 산문집은 사북지방을 직접 방문하여 찍은 낡은 사진들을 통해 '침묵의 뿌리'라는 책을 완성 짓는다.
그리고는 아주 소박한 소망을 드러내기도 하는데, 2003을 맞이한 지금 이 소망이 아직도 유효하다는 인식을 하면서도 조금은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그만큼의 지나 온 세월 덕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 누구나 달라진 환경에서 살 수 있어야 한다. 저녁놀을 받고 있던 할아버지가 갑자기 기품 있는 생활을 할 수 있게는 못하더라도 양곡과 연탄의 지급량을 올리고 어느 정도의 영양가를 지닌 부식이 이따금이라도 좋으니 그 어른의 식탁에 올라가게는 해야 한다 …… (중략) …… 그것은 국민학교에 갓 입학한 어린이까지 아는 민주주의를 더 이상 파괴하지 않으면서 고통받는 다수를 소수 쪽으로 옮겨 놓는 일이다. 어려운 사람들의 생명이 지친 몸에 깃들어 있지 않게 하고도 다른 환경에 닿을 방법이 우리에게는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에게는 있을 것이다'라는 말은 앞에서 언급한 '알리바이'와 맞닿아 있다.
내 이웃의 가난함이 결코 자신의 책임과 그다지 멀리 있지 않다는 표현의 '알리바이'. 우리 이웃의 가난이 나의 무관심이었고, 내 식구의 목구멍에 거미줄이 우선 급했기에 나는 그 원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그 '알리바이'. 적어도 나는 내 이웃의 가난에게 난 '사랑의 리퀘스트'라는 2000원짜리 양심을 끝임 없이 쏟아 부을 수 있다는 또 다른 '알리바이'. 조금 더 부풀려서 어느 교사친구의 말처럼 내가 가난한 농촌의 아이들과 함께 하지 않는 이유는 도시 아이들의 건강한 사회인식과 역사성에 대한 고민도 마찬가지로 중요하기 때문이라는 색다른 '알리바이'. 우리는 그렇게 내 알리바이를 짜 맞추려 애쓰지 않는가.
하지만, 우리들은 가난과 억압이 드러나고 횡행하는 그곳에서 아무도 자유로울 수 없음을. 그곳의 책임을 우리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말할 이는 그리 많지 않음을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출처 : 부산교대 맥
글쓴이 : 박진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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