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돕이야기 만들기/읽은 책 들려주기

[스크랩] 서근원의 '수업을 왜 하지?'를 읽고.......(2003.03.22)

갈돕선생 2005. 12. 29. 22:37

수업! 왜?

돌이켜 보면, 초임 발령때 나는 대단히 무엇을 아는 것처럼 학원 수업하듯, 교실수업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하지만 어느새 나는 늘 매시간 시지푸스의 바윗돌처럼 어김없이 돌아오는 이 수업이라는 굴레에서 갈팡질팡 허덕이는 초라한 나를 발견하게 됐다. 이내 차츰 아이들 앞에서 속으로는 무슨 큰 죄라도 지은 것처럼 부담을 가지게 됐지만, 겉으로는 아이들에게 해 줄 무엇이 나에게는 언제나 기본적으로 갖춰져 있다는 자만과 위선으로 10년을 버텨왔다.

이렇듯 그 자만과 위선의 종양 덩어리가 엄연히 내 몸 속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만성적인 게으름과 위선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몸짓을 하는 둥 마는 둥 교직경력만 차곡차곡 쌓으면서 늘어나는 호봉에 계산기만 두드리고 있는 것 같아 뒷맛이 늘 씁쓸하다.

수업! 왜?

경남의 젊은 교사라면, 한 두번 경남 독특한 연구대회로 각광(?)받는 '학습지도 연구대회'에 억지로 떠 밀려 나간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난 두 번이나 끌려 나가 한 번 부여된 일에는 책임감으로 일을 해대는 기본적인 나의 습성으로 그들의 구미에 맞춰 열심히(?)하다 보니 남들 하기 힘들다는 3등급과 1등급을 연이어 얻어내어 내 인사기록 카드 한쪽을 자랑스럽게(?) 잘 채워내고 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수업을 잘 모른다. 수업의 기술은 있을지 모르나, 수업의 본질과 특성을 나는 아직 모르며, 더구나 그나마 아는 지식도 아직 나의 교육관과 적절히 조화를 시키지 못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게으른 습성에 기인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지만, 한편으로는 초등학교 교사가 갖는 여러가지 사회적, 문화적 딜레마에 기인하는 것이 더 클 거라며 그 책임을 떠 넘기기도 한다.

이제 나는 이 후자와 관련해서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던 어느 퇴직초등교사의 책을 소개하고면서 게으름의 원죄를 저만치 던져버리고자 한다. 제목은 이미 소개했다시피 '수업을 왜 하지?'

이 책의 저자는 교육인류학이라는 학문에 이제 발을 들여놓은 초등교사 출신의 학자이다. 우리 나라의 새로운 연구흐름으로 자리잡고 있는 질적 연구, 즉 인류학적 접근을 교육에 접목시키려는 그룹에 함께 하고 있는 그는 교사가 떠 안고 가야할 수업에 관한 고민과 갈등, 모순과 전망을 얘기하며, 본격적인 수업에 대한 논쟁거리를 내놓고 있다.

그는 철저히 감춰 베일에 쌓여 있는 우리네 초등학교 교실수업의 모습을 다양한 아홉개의 수업장면을 통해 온전히 들어내고 있다. 우선, 아홉가지 수업 이야기를 간단히 정리하며 수업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자.

첫째 이야기는 어느 산골학교의 복식수업에서 비춰지는 전경이다. 작은 학교에서 벌어지는 중년교사의 무심한 수업준비와 행위는 반복되는 아이들의 무의미한 학습으로 무거움과 답답함만을 느끼게 한다. 그저 복식수업 방식을 누가 해결해 주길 바라는 그 중년교사의 무미건조한 말에 서근원은 과연 그 문제를 누가 해결해 준다면 모든 게 해결될 것인가라는 의문을 던진다. 교사 스스로의 노력과 의지가 없이 그저 누가 해결해 주기를 바라고 있는 우리네 교사들의 안일한 보신주의와 그저 밥벌이 수단으로 수업을 생각하는 일부 교사들을 비판하는 듯한 이야기였다.

두번째 이야기는 2학년 어느 한 교실에서 시작한다. 밖에서는 운동장에서 운동회 준비로 소란스럽고 아이들은 마지막 4교시를 선생님이 제시하는 시를 가지고 공부하고 있었다. 그 교사가 보여주는 시는 글쓰기 책을 읽은 사람에게는 익숙한 아이들의 시였다. 그는 이 점에 주목한다. 국어교육과정에 나와있는 지침을 어기고 자신의 교육관을 가지고 가르치는 이 교사를 어떻게 볼 것이냐 하는 것이다. 나아가 그는 교사의 자율성까지 거론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정부의 교육과정 통일성과 교사들의 자율성간의 대립되는 경계선에서 진정한 교사의 수업에 관한 논의가 가치를 가지기 위해서는 본질적으로 교육과정을 재구성하려는 교사의 노력에 있음을 얘기하고 싶어한다. 수업을 기술로만 보려는 의식을 던져버리기 위해서는 더더욱.

세번째 이야기는 즉흥적인 수업을 이끄는 어느 교사이야기다. 이 교사의 수업을 통해 저자는 수업이 고정된 규격화된 틀에 가두어 놓은 모든 변수를 차단시켜 놓은 지도서식 수업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수업이란 실로 많은 변수를 가지고 있다. 작게는 학생수, 교실환경, 학교환경, 넓게는 그 아동들의 가정 환경와 삶터, 학부모의 학력과 계급성에서 40분이라는 수업이 진행되는 동안 이 나라 모든 학생들은 각기 다른 반응을 보인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교사의 수업은 즉흥성에 의지할 수밖에 없으며, 그 아이들 아이들의 반응에 따라 새로 구성되어져야 하며, 수업 전에 교사는 이런 측면에서 교재를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아이들은 진정 배움의 폭을 넓히게 되고 교사 또한 그들을 통해 함께 배워나가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라고 질문을 던진다.

네번째 이야기는 교사가 왜 수업에 전념할 수 없는지에 대한 오래된 화두를 던진다. 한 남교사의 과학수업을 통해 우리가 늘 보이는 답답한 과학수업에서 우리가 왜 그런 기계적인 수업을 할 수밖에 없는지를 얘기한다. '수업은 기본, 업무는 우선'이라는 소제목을 통해 정부의 기본적인 수업에 대한 의식과 철학부족을 지적한다. 나아가 수업과 업무를 병행해야 하는 교육조건에서 교사에게 정부가 요구하는 사항은 효율적인 지도방법이며, 수업기술일 수밖에 없음을 비판한다. 한편으로는 정부의 변화와 함께 교사의 노력을 요구한다. 교과에 대한 철저한 이해와 가르칠 것에 대한 명확성을 강조하면서.

다섯째 이야기는 교사는 왜 학생을 통제하는가라는 화두를 던진다. 그는 교사가 학생을 통제하는 가장 큰 이유는 부족한 교재연구와 아동에 대한 어설픈 파악을 들고 있다. 이어 그는 단순한 교재연구와 기교재를 통한 수업은 아이들의 어떠한 변화도 줄 수 없으며, 그것은 그저 학생을 의자에 앉혀 하루종일 통제하는 것에 다름이 아님을 지적하며 교사의 직업의식 부족에 대해 아쉬움을 표한다.

여섯째와 일곱째 이야기는 우리가 가장 전형적인 수업의 형태로 알고 있는 아이들이 하는 사회수업, 즉 조사학습을 통해 자신들이 직접 발표하고 교사가 정리하는 식의 수업의 병폐와 독특한 교수기법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의 문제를 찾아내어 이야기 한다. 그 수업들을 관찰하며 저자는 그 반 아이들은 수업을 통해 무의미한 지식과 언어를 난발할 뿐 아무도 그 의미를 알려 하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아울러 우리 교사들이 수업형태와 기법에만 매달려 학생들의 이해가 배제된 수업이 진행될 때 그 수업은 아무 의미가 없음을 얘기하려 한다. 그는 말한다. 살아있는 나의 수업을 놓칠때, 그리고 수업이 구체성을 놓칠때, 학교에서 학생과 교사가 소외되는 일이 지속될 수 밖에 없다고 말이다.

여덟째 이야기는 수업시간과 교과서를 떠나 수학의 개념을 아이들 머리 속에 각인시키려는 어느 교사의 노력을 얘기한다. 그리고 이는 철저히 국가가 정한 교육과정을 정면으로 위반했지만, 저자는 수업시간이나 진도 등이 학생의 학습수준과 질보다 먼저 고려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알게 해주는 좋은 수업이었다라고 얘기한다. 맹목적인 수업시간 지키기와 진도나아가기의 무의미함을 지적한 좋은 내용이었다.

끝으로 글쓴이 진정한 좋은 수업은 만남에 이르는 수업임을 언급하면서, 자신의 초등학교 교사 시절을 떠 올린다. 당시로서도 파격적인 교육과정 재구성을 해 열심히 실천하다 교장과 학부모들로부터 한동안 질타를 받다 결국에는 그들로부터 인정을 받기까지의 이야기들을 꺼내고 있다. 하지만, 그는 과연 그러한 시도가 좋았던가에 대한 의문을 갖는다. 그 의문은 교사의 삶과 아이들의 삶이 만나지 않는 일방적인 교사의 강제가 갖는 문제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한다. 그는 좋은 수업이란 교사가 아이들을 자신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이해함으로써, 수업의 이면에서 그들과 교육적 관계를 맺으며 함께 살아가는 수업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장황하게 끄집어낸 이책의 요지를 통해 나는 나의 10년 교사생활을 주마등처럼 돌아볼 수 있었다. 이 아홉가지 이야기 속에서 저자의 끝이야기를 빼고 여덟가지는 내가 해 봤거나 고민했고 지금까지도 업보처럼 짊어지고 가는 이야기들이었다. 하지만, 내가 고민하고 있던 부분을 같이 고민하고 있던 한 사람을 책을 통해 만나게 되어 무척 반가웠고, 내가 어떤 교사로 다시 서야하는가하는 생각을 하게 해 준 좋은 책을 보게 된 것이 큰 소득이었다고 생각한다.

이제 이 책을 읽고 느낀 세 가지를 더 이야기하고 길고 길었던 책 소개의 끝을 맺어야 할 것 같다.

우선, 학급운영과 교과와의 관계다. 이글의 저자는 내가 작년부터 고민했던 문제를 너무도 쉽게 먼저 실천을 했었다. 즉, 초등학교 수업의 본질 문제다. 현재 주변 동료 선후배 교사들을 보면 아직도 학급운영과 교과수업을 별개로 놓고 일년을 보내는 경우를 많이 본다. 이는 무언가 잘못된 접근임에 틀림없다. 자그마치 팔백에서 천시간이 넘는 교과수업을 별개로 이벤트성 학급운영을 생각하는 시대는 이제는 지났다는 얘기다. 수업의 재구성을 통한 효율적인 학급운영을 제고할 때다. 반대로 개별교과중심으로 학급을 운영하는 방식에도 문제가 있다. 초등학교 수업이라는 자체가 통합적인 성격이 매우 강하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개별교과에만 매달리는 시도는 분명 그 적절성과 타당성에서 더욱 고려되어야 할 문제다.

다음, 이글에서 나오는 저자의 말 중에 교사의 노력을 강조하는 부분에 대한 분명한 선을 그을 필요가 있다. 그는 직업적인 프로정신에 입각한 교사의 노력을 제기하고, 업무와 수업의 병폐와 모순을 이러한 직업적인 노력을 통해 극복해 나가야 함을 강조한다. 하지만, 분명히 말하건대 이러한 전문성에 입각한 노력만 가지고 과연 이러한 병폐와 모순이 해소되겠냐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는 것이다. 학교와 교사에게 요구하는 각종 잡무들이 수업을 방해하는데도 헌신적인 교사의 직업적 노력만을 요구하는 것은 또다른 노동착취에 순응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우리는 여기서 교사의 전문성만을 얘기하는 것을 넘어서서 교직의 노동을 얘기해야 한다. 의식을 가지고 그 병폐 모순을 함께 이야기 하지 않는다면, 교사들은 언제나 그 병폐와 모순을 이러한 책 속에서만 부르짓고 있을 것이다.

끝으로, 망가질대로 망가진 우리 공교육에서 너무도 낭만적인 꿈을 꾸고 있는 마지막 문구 하나를 소개하며 마무리 짓는다. 정말 불가능한 꿈일지도 모를 그 꿈을. 하지만, 희망을 가져보아야 하지 않을까?

"교과가 내 안에 살아 움직이고, 아이들은 교과를 간접적으로 공부한다. 가르치지 않았으나 서로 배우게 되고, 배우지 않았으나 서로 가르치게 된다. 현재를 소외시키지 않고 함께 살아간다. 그러다보면 던져진 이 관계들이 만남을 향해 서로 나아가게 되겠지. 아! 이제 언제나 나는 그런 수업을 한 번 살아 볼 수 있을까? 그런 수업을 볼 수만 있어도 좋겠다. 나에게 그런 행복이라도 주어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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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익명회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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