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그 아련한 추억들/국외 연수 이야기

[북유럽여행기] 3부_ 8월 27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맞는 첫날!

갈돕선생 2013. 9. 24. 10:15

새벽에 안승문선생님이 들어오시고 이어 남자선생님 두 분이 들어오시는 소리에 잠이 좀 깼다 잠들어버린 뒤 다시 일어난 시각은 6시. 모처럼 그것도 배에서 푹 잤다. 일어나 이런 저런 짐을 정리하고 몸을 씻고 가방을 정리하니 어느새 아침 7시가 가까워졌다. 안승문선생님은 일찍 자리를 뜨셨는지 침대에 안 계시고 나머지 두 분 남선생님은 새벽에 들어오신 탓에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 좀 더 잔 뒤에 알아서 일어나시겠거니 생각을 하고 나는 식당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웬걸. 문이 단단히 잠겨 있다. 이어 내려온 외국관광객들이 문을 열고 두드려 보았지만 아침 7시 시간이 됐는데도 식당은 문을 열지 않았다. 이상하다 싶어 조금 뒤에 내려올 작정으로 12층 선상 갑판으로 올라갔다. 금방 해가 떴는지 일출광경이 참으로 평화롭다. 순간 ‘아!’하는 감탄사가 나도 모르게 나온다. 그때 번뜩 떠오르는 생각. ‘맞아. 이곳이 스웨덴 바다라면 한 시간 시차가 적용돼 지금 시각이 7시 10분이 아니라 6시 10분이야.’ 이제야 겨우 아침 식당 상황을 알 수 있었다. 마침 자녀분과 함께 이번 여행에 오신 식구들을 만나 전후사정을 이야기 하며 아침인사를 반갑게 나누었다. 다행스럽게도 시차를 착각한 덕분에 참으로 멋진 선상의 아침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아~ 정말 아름다운 풍경, 발트해여!

 

 

 

 

 

 

 

 

그렇게 아침 식사를 마치고 실야 라인 크루즈에서 내려서자 중년의 멋진 한국인 가이드이자 아름다운 여인이 우리를 맞아준다. 간단히 인사를 나눈 뒤, 우리가 찾은 곳은 스웨덴 스톡홀름의 외곽에 위치한 프레네학교이며 학교이름은 우리말로 알밤이라는 뜻의 카스타냐. 1학년부터 9학년까지, 유치원을 포함해 약 260명과 35명의 교사들이 함께 하는 자율학교. 정부의 공식적인 지원을 받는 이곳은 이민자 자녀들과 프레네식 교육을 받고자 하는 학부모들이 찾는 일종의 대안형 공립학교이다. 하지만, 스웨덴은 다른 북유럽학교처럼 자율학교라고 해서 차별받지 않는다. 일반 공립학교와 똑같은 지원과 교사들의 지위를 인정해 주어 이들의 교육방식을 존중하고 자율성을 주고 있다. 참으로 부럽기만한 그들의 역사와 철학이다. 이와 같은 철학만이라도 우리나라에 있었으면 하는 생각만 가득했다. 다른 것을 인정하지 않는 이데올로기 노예의 나라, 한국이라는 조국이 그저 부끄럽고 안타깝다는 느낌이 들었다. 스웨덴의 하늘은 참으로 예뻤다. 스웨덴에서 자주 만나지 못하는 참으로 좋은 날씨라는 오늘. 우리 일행은 스웨덴의 첫날을 반겨줄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 달렸다.

 

 

 

 

 

 

 

 

 

 

조금 일찍 도착한 일행은 약속한 11시를 지켜달라는 학교 측의 요구로 한동안 학교 바깥에서 맑은 공기와 하늘, 학교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창밖으로 아이들이 싸이의 ‘강남스타일’의 춤을 추며 한국에서 온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렇게 시간에 맞춰 들어간 카스타냐. 공립학교와 다른 구조와 시설. 마치 우리네 대안학교의 풍경을 느끼게 해주는 낡고 허름한 공간 안에는 파충류를 키우는 시설과 아이들의 작품들이 벽에 이어져 붙어 있었다. 이날 우리를 맞아주는 카스타냐 학교의 방식은 독특했다. 담당교사의 프레젠테이션으로 시작하는 것이 아닌, 이곳 학교 8학년 아이들이 이 학교를 설명해주고 질문을 받는 형식을 먼저 취했다. 살짝 당황한 안승문선생님은 스웨덴 언어로 풀어낼 아이들의 프레젠테이션 탓에 급히 가이드에게 요청을 했고 똑같이 당황한 가이드도 어렵게 수락을 해주었다. 물론 비용이 지불이 되어야 했지만.

 

그렇게 아이들로부터 시작한 프레젠테이션은 담당교사 패트릭씨까지 1시간이 넘게 이어졌다. 아이들은 준비한 내용을 외워 발표하는 탓에 긴장하고 실수가 조금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이 이 학교의 주인이 그들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그들의 학교를 소개하는 일에 아이들이 나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터. 우리는 늘 아이들을 뒷전으로 내몰고 마치 학교의 주인이 교장이고 교사인 것처럼 학교를 소개하지는 않았나.  학교에 온 손님을 맞을 때마다 고학년들이 번갈아가며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것이 이곳의 흔한 풍경이라 하니 그저 부럽고 감사할 따름이었다. 아이들과 교사들의 발표와 소개는 중복되는 부분이 많아 몸이 지쳐있는 선생님들에게는 다소 힘들었던 과정이기도 했다. 대강의 내용을 정리해 보면 이렇다.

 

프레네 교육은 자율적으로 지식을 찾아내는 교육, 책과 신문을 발간하면서 민주 시민 교육을 앞세우는 철학을 가지고 있다. 이곳 카스타냐는 이 철학을 그대로 따르려는 학교이다. 처음엔 60명으로 시작해 1살에서 12살을 받아 학교를 만들어갔지만, 지금은 1학년부터 9학년까지 260명의 학생과 35명의 교사가 모여 1994년부터 정부의 지원을 받은 이 학교는 프레네의 철학을 잘 지켜나가고 있다. 교육방법은 학생의 의견을 존중하고 책임을 똑같이 나눠 가지며 서로를 존중한다는 것. 다른 사람의 지식을 공유하며 서로가 서로를 가르쳐주는 협력학습이 매우 중요시 되고 있다. 이러한 철학은 개별 교육과정과 함께 특별한 프로젝트로 확장되는데, 대표적으로 일 년에 2주간 행해지는 캠핑을 통해 섬을 탐험하는 경험을 해보는 활동을 하고 있다. 이를 The island struggles 라고도 하는데, 이 캠프를 통해 6~12살의 아이들은 서로를 좀 더 알게 되고 15세~16세의 학생들이 리더가 되는 경험을 쌓는다고 한다. 나이가 각기 다른 아이들이 서로 협력하고 도와주며 세상을 함께 사는 법을 미리 익히는 것이다. 또 한 편으로는 일명 craft days라 하여 11월에 이틀간 4가지 종류의 만들기 활동을 하고 만든 것을 직접 팔며 자선바자회를 열어 나누며 함께 살아가는 의미를 되새기는 활동을 한다고 한다. 한편으로 프로젝트를 마무리 하는 활동으로 일명 ‘I' 프로젝트를 시행하여 아이들로 하여금 미래에 자기가 살고 싶은 집을 짓게 하기도 한다고 하는데, 크기는 그리 크지 않은데, 규모보다는 집을 설계하고 지으면서 자신은 누구인지, 어디로 가려하는 지에 대한 정체성을 찾는 과정으로 이 프로젝트를 진행한다고 한다. 자신만의 집을 구상하고 만들면서 자신을 발견하게 한다는 그들의 교육방식에서 우리는 과연 얼마나 학교교육을 통해 아이들이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아이들은 그야말고 지금 너를 알기보다 내일의 그 무엇을 위해 그저 달리기만 하라는 강요만 받고 있지 않은가. 자신을 제대로 생각하지도 않고 자란 아이들이 과연 어떤 미래를 꿈꿀 수 있을까? 과연 그들이 만들 사회는 어떤 사회일까? 우리는 바로 그런 사회를 지금 만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프레네 교육에서 강조하는 것은 협력이다. ‘무엇을 알게 되었을 때 왜 남에게 가르쳐 주지 않는가?’라는 그들의 의문과 질문만 보더라도 이 학교의 철학은 매우 뚜렷하게 그려진다. 남을 가르쳐 볼 때 더 잘 알 수 있다는 평범한 상식이 그들에게는 이미 현실이었다. 내가 안 것을 절대로 남에게 가르쳐 주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래서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생각으로 사는 아이들에게 우리 어른들은 참으로 이상하고 거만하게도 인성교육을 논한다. 학교폭력에 대한 걱정을 한다. 극단의 경쟁으로 아이들을 내몰아 놓고 상담교사만 배치하면, 억압적으로 벌점을 내리고 생활기록부에 나쁜 아이였다는 낙인을 찍어 사회진출까지 막아버리는 정책을 해 놓고는 그들은 감히 인성교육을 한다고 얘기한다. 참으로 오만하고 학생과 국민을 기만하는 그들에게서 어떻게 우리는 희망의 교육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교사와 부모들이 나설 수밖에 없다. 내 아이만 생각하는 부모, 나 자신의 보신만 생각하는 교사들로는 이 나라 교육을 절대로 바꿀 수 없다.남의 나라 교육을 부러워하기 전에 먼 미래의 후손들에게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고 생각해야 한다. 나는 이곳 카스타냐에서 더욱 절실하게 이 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조금은 힘든 프레젠테이션을 마치고 닭다리를 풍족하게 먹을 수 있었던 점심식사를 하고 학교시설과 분위기를 느끼기 위한 길에 나섰다. 이 길에도 학생들과 교사가 함께 했다. 운동장은 딱히 없지만 각기 다른 건물과 미로 같이 이어진 시설에는 우리에게는 없는 목공실과 각종 특별실이 가득했다. 목공실에 놓여 있는 각종 도구는 실제로 쓰이는 어른들도 쓰는 도구였다. 이어진 공간에는 학생들의 휴식공간도 있었고 식당, 또 다른 교실들을 만날 수 있었다. 나는 이 교실보다도 막 수업을 마치고 의자를 책상 위에 올리던 한 교실에 더 주목했다. 우리로 치면 5~6학년으로 보이는 교실. 그곳에는 다른 교실에서 볼 수 없었던 게시판을 가득 채운 손으로 글을 쓴 각종 보고서와 결과물이 가지런히 붙어 있었다. 프레네 교육을 조금이라도 접해 본 사람이면, 신문만들기와 자유글쓰기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그 활동을 자연스럽게 하고 있다는 듯, 그 교실은 모든 벽에 아이들의 글로 쓴 결과물들이 가득했다. 프랑스의 프레네 학교와 또 다른 풍경과 학습방법, 내용을 보여주는 곳. 프랑스의 프레네학교가 공립학교였다면 이곳은 그곳과 다른 자율학교. 그만큼 교육과정과 교육적 상상력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이것이 바로 프레네 정신이다. 발도르프학교가 슈타이너 사상을 철저히 따르며 교육과정을 통일 시킨 것과 달리 프레네는 개별 교사와 학교의 자율성을 최대한 존중하는 철학과 내용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어쩌면 프레네가 공산주의의 폐단은 물론, 특히 나치의 참혹성과 독재성을 경험한 터라 더욱 강조되는 부분일 것이다. 그래서 프레네 학교는 민주시민교육을 학교철학의 바탕에 단단히 심어두고 있다. 남을 존중하지 못하고 배려하지도 않으며 경쟁하여 이기려고만 하는 아이들은 프레네학교가 바라는 아이들이 아니다. 민주시민들을 길러내는 교육이야말로 학교가 해야 할 일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아이들과 교사들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하려는 것이 바로 프레네 정신이다. 단위 수업을 어떻게 할 것인지와 같은 개념으로 이러한 학교는 이해할 수 없을뿐더러 수업을 잘 해야 교사라는 편협한 생각에 머문 이상, 그러한 교사와 학교가 많은 나라일수록 어떠한 교육적 상상력도 발휘될 수 없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꽤 오랜 시간을 머문 우리 일행은 다시 버스에 올라타 짧은 시간 안에 스톡홀름의 경치를 훑어보아야 했다. 가이드의 말에 따르면 핀란드와 스웨덴을 비교하는 발언을 하는 자체가 스웨덴 사람을 자극하는 일이라 한다. 그만큼 스웨덴은 자국이 역사와 문화에 대해 그 어떤 북유럽국가와 비교자체를 할 수 없다는 자긍심을 가진 나라였다. 스톡홀름으로 돌아오는 길에 멀리서 스톡홀름이라는 도시의 풍경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에 내려 아이스크림을 물고 바라본 풍경은 가히 핀란드와 비교를 거부할 만 했다. 건물의 품격과 위세, 도시의 규모가 헬싱키와 견주기는 어려웠다. 인구수만 해도 50만과 200만의 차이이니 더욱 그러해 보인다. 그렇게 스톡홀름의 풍경을 지켜본 일행은 가이드의 지혜로운 안내에 따라 복잡한 거리(크루즈가 많이 온 날에는 스톡홀름의 시내가 매우 복잡하고 교통이 통제불능이라 한다.)를 이동하기보다 올트다운, 다른 말로 감라스탄이란 일컬어지는 스톡홀름의 구시가지를 방문했다. 왕궁 앞으로 옛 주택과 거리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감라스탄을 산책하며 쇼핑을 즐기는 일은 일반 패키지여행에서는 쉬운 일이 아니라 한다. 우리야 그 사실을 잘 모르지만, 이 일정이 모두 안승문선생님의 도움으로 가능했다는 가이드의 안내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감라스탄을 안내하여 노벨 박물관 앞까지 이르렀다. 그곳은 대광장이라 불리는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평화롭기 그지없지만 1520년 역사에 남은 ‘스톡홀름 대학살’이 일어난 곳이라고 한다. 당시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2세의 침입에 저항한, 바사 왕의 아버지를 포함해 약90명의 귀족과 고관 등이 단두대의 이술로 사라져 광장을 피로 물들였다고도 한다. 광장에는 모두 아파트로 개조돼 사람들이 사는데 한쪽 빨간 건물은 매우 역사가 깊은 곳으로 그곳 창문 사방으로 하얀 돌들은 이곳에서 죽은 사람들의 수를 뜻하는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스톡홀름자석에는 이 건물이 케릭터화 돼 있을 정도로 그들에게 이 건물이 어떤 의미인지를 잘 알 수 있었다. 광장 한편에는 1776년에 세운 증권 거래소가 있고 그곳 맨 위층에는 구스타프 3세가 창설한 스웨덴 아카데미가 있다. 스웨덴 아카데미에서는 매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를 선정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제 우리는 1시간 10여분의 시간을 받고 구시가지를 살펴보기 우해 각자 이동하기 시작했다. 나를 비롯한 이갑순선생님과 또 한 분의 선생님은 함께 길을 걸으며 감라스텐의 멋진 풍경을 즐겼다. 특히 스웨덴 발명 특허상품이라는 종이로 만든 행주에 꽂혀 한동안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이어 스톡홀름을 상징할 만한 말자석과 황제비누, 병따개를 샀다. 아쉽게도 한 시간은 정말 짧은 시간이었다. 가이드의 말마따나 이곳만 돌아보는데도 반나절은 족히 필요해 보였다. 온갖 상점들이 가득한 베스테를롱가판 거리를 지나 국회의사당을 거쳐 스웨덴 왕족들이 많이 잠들어 있다는 리다르홀름교회, 스톡홀름에서 가장 오래 됐다는 대성당을 바라보며 우리들의 감라스텐 산책은 그렇게 짧게 끝나고야 말았다. 그렇게 해서 우리들은 마지막 이동지로 발길을 옮겼다. 그곳은 바로 바사호 박물관.

 

 

 

 

 

 

 

 

 

 

 

 

 

 

 

현존하는 배로는 가장 오래된 전함 바사호가 유르고덴 섬의 스칸센 서쪽에 있다. 스웨덴의 국력이 막강하던 구스타프 2세 아돌프왕 시대에 건조한 이 전함은 독일의 30년 종교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1628년 8월 10일 왕궁 근처의 부두를 출발하여 첫 항해에 나섰으나, 스톡홀름 항구에서 돌풍을 만나 수심 32m의 바다 속으로 침몰해 버렸다고 한다. 침몰한 정확한 원인은 정확히 지금까지도 밝혀지지 않았다고는 하나 가이드의 전언에 따르면 배의 아래 폭이 지나치게 좁았던 탓에 균형을 잡기가 어려웠지 않았나 하는 것이 제일 유력한 주장이라고 한다. 바사호는 17세기의 군함치고는 규모가 아주 큰 배로, 전체 길이 62m, 최대 폭 11.7m, 높이 50m, 배수량 1900톤, 돛의 면적 1200제곱미터, 승무원이 437명에 이른다고 한다. 전함이라고는 하지만 배 전체가 180개에 이르는 조각으로 정식되어 있으며 특히 배의 꼬리 부분은 신들을 형상한 다양한 조각상들이 아름답게 모두 금색으로 덮여 있어 매우 화려해 보인다. 선체의 인영부터 복원까지의 과정을 추적한 다큐멘터리 영화도 상영할 뿐만 아니라 아래 지하에는 발굴한 시체들의 조각을 맞춰 놓았는가 하면, 그들의 얼굴을 디지털 그래픽으로 복원해 재현해 놓기도 했다. 박물관 전체가 이 전함을 위해 알차고 과학적으로 친절하게 구성돼 있어 이 전함의 역사를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었다. 스웨덴을 찾는 사람이라면, 스톡홀름을 찾은 관광객이라면 누구나 찾는다는 이곳은 그들의 조상들의 잘못과 노력으로 지금은 최대의 관광자원이 됐고 해마다 찾은 많은 관광객으로 큰 수입을 얻는다고 하니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우리는 하루 일정을 모두 마치고 경상도 남자와 전라도 여자가 결혼해 스웨덴에 살며 한식당을 운영한다는 ‘남강회관’을 찾아 맛있는 김치찌개를 먹었다. 내가 먹어본 유럽한식당 중 최고였다. 한국의 맛을 그대로 유지한 김치찌개를 이곳에서 만나다니 신기하기도 하면서 모처럼 밥과 김치로 배를 채워 한결 몸이 따뜻하고 힘이 났다. 맛난 저녁식사를 마친 우리 일행은 시내에서 20여분 떨어진 호텔을 찾아 길을 떠났다. 그곳은 한국으로 말하면 서울의 코엑스와 같은 곳 안에 있는 호텔로 안승문선생님의 전언에 따르면 이곳은 해마다 11월이면 스웨덴의 교육박람회가 열려 수많은 교사들이 참여하는 곳이라고 한다. 우리가 묵는 숙소를 그들이 쓰는 숙소라 한다. 그래서 그런지 들어선 호텔의 시설이 매우 단정하고 깨끗하면서도 힘이 느껴졌다. 들어선 호텔의 복도와 방 모두가 만족스러웠다. 이곳에서 나는 몸을 씻고 이렇게 또 오늘의 일기를 쓰고 마무리 한다. 오늘은 피곤해서 호텔에서 죽치고 생활하려 한다. 반가웠다. 스톡홀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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