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밤 12시까지 게스트하우스 주인 부부와 나 그리고 아들, 이렇게 넷이서 또 이야기꽃을 피웠다. 어제 오기로 한 손님이 취소를 하셔 엊그제에 이어 오늘도 너른 게스트하우스를 아이들과 나 둘이 쓰게 됐다. 그런 김에 주인네 부부가 우리와 소주 한 잔하며 이야기 좀 하자해서 만들어진 자리. 밤 8시부터 자정까지 생각보다 길어진 이야기들 속에서 그들 부부와 우리 부자의 정치의식이 비슷하다는 공통점까지 확인하며 정다운 이야기를 나눴다. 이들 부부는 아들에게 좀 더 너른 세상을 보라며 자신들이 겪었던 일본과 미국에서 지내며 살았던 경험도 들려주었다. 그러면서 제주도에 내려온 이야기, 제주에서 살아가는 이야기. 학생시절 때 이야기 등 참 많은 이야기들을 나눴다. 그렇게 밤을 보낸 탓일까? 아들과 나는 오늘 아침 몸이 조금 무거웠다. 하지만 오늘도 어김없이 길을 떠나야 했다.
이 숙소의 아침식사는 늘 그랬듯 맛난 꼬마김밥과 미소된장국. 이어 어제 부탁한 안주인이 직접 만들어준 정성이 담긴 김밥 도시락을 들고 올레 14-1로 길을 나섰다. 오늘 날씨는 그야말로 햇볕 쨍쨍. 제주어로 과랑과랑한 날씨였다. 하지만 오늘 길이 대부분 곶자왈 숲속길이어서 큰 부담은 되지 않았다. 저지마을회관 앞에서 출발해 저지밭길을 지나 농로사거리로 접어들어 언제 걸었는지도 모를 강정동산을 거쳐 폭낭쉼터에 도착했다. 이제 문도지 오름으로 올라서야 할 즈음. 우려했던 대로 아들과 나는 콘크리트길에서 길가 나뭇잎을 뜯어 먹는 말과 망아지를 만났다. 좁은 길이어서 옆을 지나가는 일 자체가 두려움이었다. 그 놈들이야 우리를 건드리지 않겠다 싶었지만, 그래도 알 수 없는 일이어서 긴장한 채로 그 놈들 눈치를 보며 살짝 비켜 걸어 통과를 했다. 이곳 주위에 말을 기르는 목장이 있는 데 방목해서 기르는 관계로 올레꾼들은 으레 말들과 길을 가운데 두고 서로 눈치를 봐야 하는 풍경이 자주 연출되는 곳이다. 이후로도 아들과 나는 두 번이나 이 말들과 맞닥뜨려야 했다.
문도지오름은 사유지로 소와 말 등을 방목해 오던 것이다. 마을 사람들에게만 알려진 숨은 명소였는데 제주올레에서 코스를 개척하던 중 탐사팀이 방문하였다 아름다운 풍경에 반해 14-1코스를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문도지오름은 억새와 소나무가 드문드문 자라고 있는 가파른 흙길로 산등성이를 오르면 이제 풀밭 사이로 구불구불 난 흙길이 정상까지 이어진다. 제주 가을을 그대로 맞을 수 있는 곳이었다. 정상에 오르면 사방이 온통 푸른 숲이 바다처럼 펼쳐져 있다. 일명 곶자왈의 지붕이라 불리는 곳이다. 구름 한 점 없는 날씨여서 저 멀리 한라산과 산방산, 이름 모를 아니 잊은 오름들이 듬성듬성 보인다. 정말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마침 정상에 있는 어느 젊은 부부의 제안으로 정상의 풍경을 배경으로 서로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이것이 가을 제주에서 아들과 내가 함께 찍은 첫 사진이었다. 사실 문도지오름까지 오르는데도 말 두 마리 때문에 고초를 겪었다. 정상에 이르는 바로 밑 길을 장악(?)한 큰 말 두 마리 때문에 도무지 정상에 발을 디딜 수가 없었다. 10분을 기다려도 비켜주지 않는 녀석들 때문에 우리 부자는 길이 없는 길을 내며 에둘러 올라갔다. 그 놈들 잘못은 없지만 앞으로도 이어지는 곶자왈 쪽 콘크리트길에 말똥 밭을 일궈 놓은 그들 때문에 조금 고생을 했다. 오늘 참 세상에 태어나서 참으로 많은 말똥을 보고 밟고 지났다.
14-1은 곶자왈도 곶자왈이지만 말과 말똥을 만나야 하는 또 다른 길이기도 하다. 문도지 오름을 내려오는 길에는 소나무들이 빽빽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2011년 여름 태풍 때문에 곳곳에 나무가 쓰려져 있다. 그 길을 지나면 이제 저지곶자왈이 시작된다. 저지곶자왈은 월림-신평 곶자왈 지대 중에서도 가장 식생 상태가 양호한 지역이라 한다. 제주올레본부에서는 한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너비로 덩굴을 잘라내고 울퉁불퉁한 돌을 평평하게 골라 길을 만들었다고 한다. 곶자왈에 휴대전화가 잘 터지지 않는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아무 이상이 없었다. 아무래도 2년 전에는 그랬던 것 같은데, 기지국이 곳곳에 들어서 있는 걸 보니 그다지 걱정할 것은 없어 보였다. 다만, 너무 늦게 곶자왈에 들어가면 어두워지는 밤을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생기니 극히 조심하라는 소리는 많이 들렸다. 14-1의 곶자왈의 오늘은 밝은 숲길이었다. 흙길과 돌길이 이어지며 굴곡이 있는 곶자왈 길은 저지상수원까지 이어지고 숲이 끝나는 곳에서 오설록의 녹차밭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오설록 녹차밭 옆으로 지나 티뮤지엄에서 휴식을 취할 수도 있는데, 아들과 나는 바로 앞 정원에서 들고온 김밥 도시락을 맛나게 먹었다. 정성스레 싸준 숙소 여주인의 정성이 돋보인 맛있는 김밥이었다. 이어 티뮤지엄 아이스크림이 맛있다 하여 10분 남짓 줄을 서서 간신히 아이스크림을 맛볼 수 있었다. 중국인들이 워낙 많이 온 탓이었다. 티뮤지엄을 전세 내 놓은 양 그 넓은 곳을 다 차지하고 있는 그들 모습을 한동안 멍하니 지켜 보았다. 정원을 지나 정문으로 나와 도로를 건너 푸른 녹차밭에서 사진을 찍었다. 규모로만 보면 보성 녹차밭 보다 넓다하는데 가히 그럴 만 해 보였다. 오설록에는 이밖에도 이니스프리 제주하우스도 있고 각종 체험장이 있어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었다.
이제 오설록을 지나 다시 청수곶자왈쪽으로 향했다. 시간은 오후 1시쯤이었다. 큰 도로를 따라 사거리에서 직진하여 쭉 도로를 따라가면 오른편으로 청주곶자왈 입구가 나온다. 하지만, 책자의 설명대로만 하기에는 중간에 리본과 알림표시가 없어 가는 길이 맞는지 계속 의심해야 했다. 이곳에 좀 더 친절한 표시가 돼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수곶자왈은 마을에서 공동으로 소나 말을 방목해 온 곳으로 입구의 길이 넓고 평형하게 잘 닦여 있었다. 무슨 숲길 공원을 걷는 듯한 한적하고 편안한 느낌이었다. 말똥만 없다면 더 좋았겠지만, 이 길의 주인은 원래 그놈들이기에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청수곶자왈에 들어서 첫 번째 삼거리에서 남쪽으로 쭉 내려가다 두 번째 삼거리에서 북서쪽으로 향했다가 다시 삼거리에서 다시 남쪽을 향해 무릉곶자왈에 이르렀다.
이제부터 숲이 좀 더 깊어졌다. 남쪽으로 이어지던 곶자왈 길은 봉큰케(영동물)에서 서쪽으로 뻗어 있다 한다. 이제 곶자왈도 거의 끝나가는 셈이다. 오늘 가는 곶자왈 길에는 생각보다 사람들이 보였다. 부부로 보이는 사람들. 식구가 함께 온 사람들. 혼자 걷는 사람들. 토요일이어서 그런지 올레길을 걷는 사람들이 꽤 보였다. 그래서 오늘 길이 그다지 부담이 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더구나 18km라는 짧은(?) 거리가 마음을 더 편하게 해 주었다. 올레길을 걸으면서 아들은 내게 다음 달부터 이어질 서울생활에 대한 자기 생각을 제안했다. 그러면서 내년부터는 아르바이트도 해 봤으면 한단다. 믿고 할 만 한 데가 있으면 하라 했다. 북유럽 교육에서도 느꼈지만, 아이들에게도 자기 진로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 어른들은 그저 그들이 갈 길을 돕고 제한할 뿐이다. 아이의 모든 생을 책임질 것처럼 달려드는 부모들 때문에 망가져 가는 자식들이 요즘 부쩍 많이 늘어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봐야 한다. 어젯밤 숙소 부부들에게서 들은 내용이 문득 떠오른다. 서울서 직장 생활 할 때 가장 이직률이 높고 일 못하며 투정이 많은 젊은 사람들은 대게 SKY출신들이었다는.
곶자왈을 빠져 나오니 강한 햇살이 마치 굴을 빠져 나오는 이를 비추듯 우리들에게 내리쬐었다. 오늘 날이 무척 밝고 강한 햇살 탓에 곶자왈 전체 분위기도 밝았다. 흐린 날이었던 11코스의 곶자왈이 음습했다면 오늘 곶자왈은 경쾌했다. 숲은 이곳이 더 우거진 듯 했는데도 말이다. 그러게 곶자왈을 빠져 나오니 바로 농로가 나온다. 출구 앞에 이름 모를 정자 앞에서 30분간 신발을 벗고 편안히 쉬었다. 그래도 오후 3시. 다시 밭길을 따라 걸어가니 인향동으로, 마을을 지나 대한로 큰 길으로 나오니 종점인 인향동 버스정류장이 보였다. 이곳에서도 스탬프를 찍는 곳이 있었다. 아들과 나는 다시 걸어 무릉생태학교 쪽까지 갔다. 그곳에서 숙소 바깥주인이 우리를 픽업하길 기다렸다. 그렇게 우리 부자는 14-1코스를 마무리 지었다. 생각보다 싱거웠던 길이었지만, 제주 곶자왈의 지붕에 올라도 보고 또 다른 곶자왈의 모습을 만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좋은 추억으로 남을 것 같다. 내일은 이제 4일이나 묵었던 이 숙소를 떠나야 한다. 14코스 한림항까지 걸어가야 한다. 20km 넘게 걸어야 하는 길이라 아침 일찍 서둘러야 한다. 이제 발바닥이 좀 아프기 시작한다. 앞으로 10일이 남았다. 참아야 한다. 잘 이겨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 안녕, 곶자왈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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