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조금 일찍 잔 탓인지 눈도 일찍 뜨였다. 오멍가멍 게스트하우스 주인장은 아침을 언제 먹겠냐 묻는다. 토스트나 알아서 해 먹으면 될 줄 알았는데, 닭죽을 끓여 주겠다 한다. 연세 있는 분과 스텝으로 보이는 젋은 남자가 함께 준비한다. 어제도 이곳 게스트하우스에는 우리 밖에 없었던 것. 10월 중순, 제주올래는 비수기였다. 하여간 맑고 심심하게 끓여주신 닭죽을 든든히 먹고 준우와 나는 또 다시 길을 떠났다. 15코스 출발점을 어제 이미 지나왔던 터라 오늘은 지난 온 지점을 새롭게 찾기 위해 스마트폰으로 검색을 했다. 다음지도에 올레길이 표시 돼 있다는 것을 며칠 전에야 알아낸 나는 지도를 보고 한 1km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걷다 보니 대림안길 입구가 보인다. 어제 조금 걸었던 탓에 오늘은 2km를 먹고 들어가는 날이 된 셈. 천천히 쉬면서 걸어도 목적지인 고내포구까지 3시 이전에는 도착할 듯 싶었다.
대리안길 입구에서 서회선 일주도로를 건너 중산간의 귀덕리 마을과 밭길로 쭉 이어진다. 마을에 들어서면 영새샘물이라는 곳이 보였다. 암반 위에 물이 고인 연못으로 수심이 깊은 곳은 1m가 넘는다고 한다. 옛날 이곳의 찰흙을 파내어 집을 지었는데, 흙을 파낸 자리에 물통이 생겨 물이 고였다고 한다. 염세서물, 영서생이물, 영새성물, 영세성물 등 여러 이름으로 부르는데, 옛날에는 제비들이 찾아와 노는 모습을 구경하러 마을 사람들이 자주 찾았다고 한다. 그렇게 영새샘물을 지나 버스정류장이 있는 성로동 농산물집하장을 지나니 중산간의 밭길이 끝없이 펼쳐진다. 곳곳에 억새가 조용히 바람에 흔들리며 아들과 나를 반겨주는 듯하다. 그렇게 해서 선운정사까지 걸어 그곳에서 약 20분간 쉬었다. 한창 절을 추가로 짓는 탓에 다소 시끄러운 분위기였는데, 절을 짓는 지붕 꼭대기 위에 사람이 아무렇지 않게 걷는 모습이 신기하기도 했다.
선운정사에는 신라말 고려초의 불상양식을 계승한 11세기의 석조약사여래좌상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나는 열심히 오늘 묵을 게스트하우스를 찾아 연락을 했다. 하지만 역시나 인기 있는 곳은 월요일이라도 꽉 차 있는 모양이다. 남자 둘은 받을 수 없단다. 아들과 나는 일단 고내포구에서 찾아보기로 했다. 여관이나 모텔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운정사에서 밭길이 다시 이어지고 버들못 농로까지 이르렀다. 버들못 근처의 짧은 흙길을 지나자 다시 포장된 밭길이 나온다. 오늘은 내내 포장된 도로를 뙤약볕에 걷는 터라 아들과 나 모두 목이 마르고 좀 더 지쳐가는 듯했다. 발바닥도 살짝 살짝 아파오는 것이 빨리 쉬고만 싶었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납읍숲길로 들어갈 수 있었다. 포장된 길을 걸어온 터라 흙길이 반갑기만 했다. 이 숲길은 대로 옆에 위치하고 있는데 수풀이 울창하고 굴곡이 있는 오솔길이다. 일부러 만든 길인 것 같은데 들머리에 사유지임에도 빌려준 산주인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는 문구와 그에 맞게 올레꾼들이 조용히 그리고 깨끗이 이 숲길을 지났으면 하는 바람을 담은 표지판이 눈에 띈다.
숲을 나오자 납읍리 마을길로 들어와 비로소 납읍초등학교 앞 금산공원 입구에 이르렀는데, 몸이 힘들었던 아들과 나는 납읍초등학교를 둘러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이 학교에서 아름다운 학교운동본부에서 10여 년 전에 지정한 기념석이 세워져 있었다. 작은 학교였는데 하얀 색으로 예쁘게 단장한 모습이 파란 하늘과 함께 매우 돋보이는 자태를 보여주고 있었다. 가히 아름다운 학교라 할 만 했는데, 이곳에도 운동장 잔디가 인조라는 게 정말 아쉬웠다. 운동장 가장자리로 허름한 양복을 입고 인상을 잔뜩 쓴 채 운동기구와 놀이기구를 살펴보는 교감이나 교장선생님으로 보이는 분이 지나간다. 아들과 내가 반갑게 고개 숙여 인사를 했으나 그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까딱하며 지나간다. 학교를 찾은 올레꾼들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교직원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아이들에게도 우리에게 했던 대로 대하지 않을까 괜한 걱정도 해 보았다.
학교에서 잠시 쉬며 물과 며칠 전 먹다 남은 과자로 배울 살짝 채운 아들과 나는 다시 길을 떠났다. 이내 나오는 납읍리사무소를 지나면 큰 도로가 과오름을 바라보며 뻗어 있다. 과오름에 오기 전에 큰 길 왼쪽으로 여름 내내 붉은 꽃이 피는 백일홍길에 접어든다. 백일홍(배롱나무)는 나무껍질을 손으로 긁으면 잎이 움직인다 하여 간즈름나무라고도 부른다고 하는데 양지바른 곳에서 잘 자라고 뿌리가 길게 뻗지 않아 무덤가에 많이 심는다고 한다. 그런데 제철이 아니어설까, 아님 내가 보지 못한 탓일까. 백일홍길에 백일홍이 보이지 않는다. 이제 과오름둘레길로 올라서려 하자 올레 리본이 잘 보이지 않아 멈칫했다. 그때 트럭을 몰로 가던 아저씨가 지금 가는 길로 쭉 가면 된다며 도움을 주신다. 과오름은 크고 작은 세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한다.
소나무 숲이 울창한 둘레길로 과오름의 동쪽면을 지나가는데, 참으로 아름답고 웅장하기가 어떤 국립공원에 온 듯한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아들이 먼저 앞장서기에 잠시 서서 아들의 뒷모습을 폰으로 찍었다. 한적한 소나무숲길을 걸어 내려가는 아들의 뒷모습이 아름답다. 이제 곧 다시 서울로 떠나보내야 하는 아버지의 심정을 이 녀석은 알까? 부디 이제 제 앞길을 스스로 깨쳐 나가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그렇게 해서 과오름 둘레길을 마치고 다시 우리가 만난 숲은 도새기 숲길. 이름처럼 인근 축사에서 풀어놓고 키우는 돼지를 만날 수 있는 숲길이란다. 말보다는 낫겠지 하는 마음으로 돼지를 만날 기대를 품고 들어선 도새기 숲길은 들어서자마자 벌목으로 나무가 잘려져 있고 엉켜 있어 도무지 올레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짐작한 대로 움직여 겨우 찾아낸 길은 마치 곶자왈처럼 음습한 기운이 드는 곳이었다.
옆에서는 갑자기 꿩이 날아가고 우리는 덩달아 놀래며 걸어간 도새기 숲길. 그러나 이곳은 도무지 돼지를 풀어 놓을 만한 곳이 아니었다. 아니 이곳에서 돼지를 방목해도 아무런 일이 없다는 듯이 다시 축사로 돌아간단 말인가. 허나 끝내 우리는 돼지를 만나볼 수도 돼지축사 냄새조차 맡을 수 없었다. 벌목작업으로 돼지를 풀어놓지 않았던 탓인지 아님 축사를 거두어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방목하는 돼지를 직접 보지 못했다는 점이 아쉽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돼지를 만나 피해갈 걱정이 없었다는 점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도새기 숲길이 끝나자 알로에 농장을 지나 다시 큰 길이 나온다. 이 길을 따라 좀 더 걸어가니 고내봉으로 안내하는 표지판이 보였다. 다리가 아픈 아들과 나는 이곳에서 또 20분을 쉬어갔다.
고내리 남동쪽에 자리 잡은 고내봉은 그리 높지는 않으나 한라산을 가리고 있어, 고내리는 제주에서 한라산이 보이지 않는 몇 안 되는 마을 중의 하나라고 한다. 고내봉은 고니오름, 고노오름이라고도 보르는데 크고 높은 주봉을 중심으로 세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어 주봉 서쪽을 방애오름, 남쪽을 진오름, 남서쪽은 너분오름이라고 따로 부른다고 한다. 다시 길을 나선 고내봉 정상으로 오르는 길에는 왕벚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마치 공원처럼 꾸며 놓은 고내봉 가는 길은 암자와 운동기구들이 있어 주민들이 이곳을 자주 찾는 곳임을 알 수 있었다. 오르는 길에도 짚으로 엮은 바닥 천을 깔아 놓아 길을 오르는 이들이 발을 편안히 해주었다. 고내봉은 그리 높지 않아 누구나 운동 삼아 오를만한 곳이었다. 마침내 고내봉 정상에 오르자 전망대가 보였다. 그곳에 오르자 앞으로 애월읍과 애월항을 감싸는 푸른 바다가 보였다. 순간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뒤로 보여야 할 한라산이 구름에 가려 볼 수 없었다는 게 아쉬웠을 뿐.
아들과 나는 또 다시 이곳에서 20분간을 쉬었다. 오늘은 자주 쉬기로 했다. 무리를 하지 말아야 할 상태들이었다. 다시 길을 나서 고내봉을 거의 내려왔을 즈음, 아침부터 미리 점심 먹을 장소로 마음으로 정해 놓은 ‘고내촌 숲소리’라는 고즈넉하고 아담한 분위기의 음식점이 보였다. 계속 길을 가려던 아들을 붙잡아 이곳에서 나물비빔밥을 먹자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이곳은 아주 정갈하고 단정하게 꾸민 음식점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분위기였다. 이번 가을에 제주에 들어선 이후 음식점 중에서 제일 편안하고 안정돼 보였다. 비빔밥을 시키자 따뜻한 물이 나온다. 마치 누릉지 알갱이가 둥둥 떠다니는 듯한 독특한 물이었는데, 처음에는 시원한 물이 아니어서 물리쳤다가 다시 물맛을 보니 자꾸 손이가고 끌리는 물이었다.
이윽고 반찬과 비빔밥이 나왔다. 정갈한 반찬과 풍성한 나물. 이것만으로도 이곳이 음식을 잘하는 곳인지를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아들과 나는 고추장을 넣어 맛있게 비벼 먹었다. 이곳에는 이것말고도 종류가 다른 한정식들과 수제비음식, 보쌈 등이 있었고 셀프로 돈을 내먹는 아이스크림과 차 종류도 있었다. 두 분이 여주인이 열심히 음식을 만들며 서빙을 하고 있었다. 아들은 밥을 먹고는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이곳에 문재인의원과 박원순서울시장, 배우 김혜수도 다녀갔다는 말을 했다. 나중에 계산을 하며 음식점 가운데 부분을 보니 역시나 그들의 사진과 사인이 가득하다(나중에 제주선생님들에게 들은 즉슨, 주인이 참여연대와 관련이 있었던 분이라고 한다. 어쩐지!). 모처럼 제주에서 기대도 하지 않게 맛집을 발견했다. 서귀포 올레시장의 우정횟집과 함께 이곳을 아들과 나는 우리들이 찾은 맛집으로 선정했다.
그렇게 맛난 음식을 먹고 걷는 나머지 2km 거리는 한결 가볍기만 했다. 고내교차로까지 넓은 포장도로를 걷는 것이 좀 부담이고 위험하기는 했지만, 저 멀리 바다가 보이는 것이 이제 조금만 더 걸으면 된다는 생각만 들었다. 고내교차로를 건너면 자갈길로 이루어진 배염골 올레로 마을로 들어선다. 자갈길이라 역시나 힘들다. 더구나 이렇게 오래 걸은 사람들에게 자갈길은 큰 고역이다. 그렇지만 어쨌거나 종점에 다다랐다. 15코스의 종점 고내포구다. 이제 아들과 나는 주변 검색을 해서 화연이네 펜션을 찾아냈다. 2인에게는 5만원을 받는 숙소였는데 게스트하우스가 아니어서 다소 비싼 값을 치렀지만, 일단 들어가 보니 독방에 TV에 넓은 침대에 3bay로 이곳 고내포구를 둘러 볼 수 있는 최적의 숙소였다. 오늘은 이곳에서 아들과 단 둘이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주변에 편의점과 카페, 음식점이 괜찮아 저녁시간도 즐겁게 보낼 수 있을 듯했다. 무엇보다 바다가 보이는 숙소여서 오늘 일몰을 제대로 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에 모든 게 만족스럽다.
낮잠에 푹 빠져 있는 아들을 뒤로 하고 나는 해질녁 아름다운 고내포구를 사진에 담고 싶어 숙소 밖을 나왔다. 잔잔한 파도에 해가 지는 고내포구 풍경이 정말 한가롭다. 등대 근처에서 낚시를 하는 사람들과 저 멀리 보이는 마을과 불빛들. 정말 평화로웠다. 그렇게 고내포구의 해질녘도 지나고 나는 다시 숙소로 돌아와 저녁식사를 해결하기 위해 아들을 깨웠다. 저녁식사는은 인근에 있는 치킨점에서 해결했다. 청년 둘이 장사를 하는 그곳은 매우 깨끗했다. 국산 닭에 날마다 기름을 바꿔 깨끗하고 맛있는 치킨을 만든다는 그들의 음식에는 닭뿐만이 아니라 셀러드, 그리고 감자와 닭똥집도 튀겨나와 별미였다. 아들은 콜라를. 나는 시원하게 호프 두 잔을 마시며 배를 채웠다. 오늘은 모처럼 푸짐한 식사로 하루를 보냈다. 아들도 썩 만족한 표정이다. 제주에 와서 가장 배부르고 맛있게 먹은 날이란다. 한적하고 작은 고내포구에서 맛있고 편안하게 보낸 하루를 오랫동안 기억하고 추억할 것 같다.
내일은 이제 16코스로 향한다. 양재성선생님의 별장 ‘이소재’를 쓰는 날이다. 기대가 된다. 오늘은 여기서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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