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돕이야기 만들기/읽은 책 들려주기

윤지관외 '영어, 내 마음의 식민주의'를 읽고.....

갈돕선생 2007. 9. 2. 17:58

 부산교육연구소 정기 간행물에 실릴 리뷰입니다. 2005년부터 해마다 두 편씩 부산교육연구소에 '박진환의 책읽기, 글쓰기'로 책 서평을 싣고 있습니다. 이번이 다섯번째네요. 점점 글을 쓰는 일이 버거워지는 요즘, 정말 성찰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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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의 억압에서 나를 성찰하다

- <영어, 내 마음의 식민주의>를 읽고



박진환 | 김해 어방 초등학교

부산교육연구소 정보자료국장




억압과 욕망의 메커니즘, 영어


얼마 전, 우리 모임 선생님들에게서 올해 계획이 무엇인지 물었더니 꽤 많은 선생님들이 영어공부가 있어 놀랐다. 굳이 왜 영어공부가 필요한지 묻지는 않았지만 답답한 마음은 남아있었다. 사실 초등 교사들이 영어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일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가만히 우리네 초등학교 안을 들여다보면, 영어가 교사들의 삶을 어떻게 바꿔 놓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임용과정에서부터 이른바 프리토킹에 익숙해 온 신규교사들은 곧잘 영어회화 능력 때문에 교사로서 능력을 너무나도 쉽게 인정받곤 한다. 비단 신규교사들만이 아닌 경력이 있는 교사들도 능력을 인정받고 싶거나 또는 자기 성취 욕구를 채우기 위해 영어를 선택하는 일이 잦다. 이른바 영어실력이 있으면 학교에서도 그만큼 대우를 받고 교육기관에서도 그에 걸 맞는 혜택(?)을 주기 때문이다. 초등교사에게 필수인 학급운영이나 교과운영 문제는 영어 능력이 있는 교사에겐 관심사에서 멀어지기도 한다. 때로는 개인의 영어활용 능력과 영어수업 진행 능력이 구분이 되지 않는 경우도 있어 실제로 아이들의 언어능력 향상으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 어느새 교사의 전문성을 영어 능력으로 재단하는 일이 우리초등학교 교사문화에 자리 잡아 가고 있다. 결국 영어에 익숙지 못한 초등 교사들은 무언가 무능력해 보이고 영어교육이라는 말만 나와도 자기도 모르게 주눅 드는 일이 이제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졌다. 우리네 초등교육의 정체성마저 뒤흔들고 있는 영어는 점차 교직사회 전반에 걸쳐 억압과 욕망의 메커니즘으로 자라 잡아 가고 있다.


사실 영어 광풍이 학교를 비롯한 우리 사회 전반을 규정하고 지배하는 현상은 이미 오래된 일이다. 영어 발음 교정을 위해 부모가 어린 아이의 혀 수술을 한다는 소식이 공공연히 우리 주변에서 나돌 즈음, 해외 언론들은 신기한 듯 이 소식을 앞 다투어 보도하며 영어에 미쳐가는 한국을 비웃었던 일이 있은 지도 한참 전의 일이다. 특히 IMF 경제 위기 이후, 생존의 절대적인 수단으로서 영어의 위치는 더욱 확고해져만 갔고, 김영삼 정부서부터 도입한 3학년 이상의 초등학교 영어교육은 영어 사교육 시장의 엄청난 팽창과 초등학생 해외영어연수 열풍을 일으켰다. 자연스럽게 국민의 사교육 부담은 점점 늘어갔는데, 노무현 정부가 내 놓은 대책이라고는 고작 초등학교 1학년으로까지 영어교육을 확대하는 것이어서 우려만 키워내고 있다. 더구나 이러한 광풍은 대학으로까지 번져가 영어로 강의하는 학과가 점차 늘어나는가 하면, 영어졸업인증제를 도입하여 토익과 토플 점수가 대학이 정한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면 졸업을 시키지 않겠다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대학졸업의 판단기준이 일정한 학문의 도달도가 아니라 영어 성취도에 달린 것처럼 보이는 우스꽝스런 일이 바로 우리 앞에서 벌어지고 있다. 우리말과 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주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나라. 자기나라 말보다 영어를 잘 해야 사회 권력과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는 나라. 심지어 영어 공용화론까지 들먹여도 하나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나라. 또다시 우리는 새로운 식민시대로 접어든 것일까. 올 초 세상에 나온 ‘영어, 내 마음의 식민주의’는 영어로 인해 드러난 이러한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들을 살펴보며 이 시대 영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우리 자신을 성찰할 기회를 던져주는 이야기로 가득하다. 이제껏 ‘영어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공부할 것인가’와 같은 학습서와 교양서 수준은 넘쳐났지만, 영어를 둘러싼 우리들의 모습을 성찰할 이야기들은 보기 힘들었다는 점에서 이 책은 분명 이전의 영어책들과는 다른 시각과 색깔을 보여준다.


우리에게 영어는 무엇인가


정말 영어는 우리에게 무엇일까? 이 책의 1부 제목이기도 한 이 질문은 이 글을 읽는 분들 모두에게 던지는 물음이다. 당신에게 영어는 무엇인가? 단순히 의사소통의 수단인가? 내가 처한 위치에서 한 발 더 올라서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도구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비주류에서 주류에 들어서려는 계층 상승 욕구를 지닌 나를 위한 필수품인가? 아님,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이른바 중산층의 불안을 극복하려는 나를 위한 장식품인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을 풀어내기 위해 1부에서는 ‘영어의 억압, 그 기원과 구조’, ‘한국에서 영어의 수용과 전개’, ‘식민지 시대 영어교육과 영어의 사회적 위상’, ‘한국사회에서 영어실력은 문화자본인가’, ‘영어: 근대화, 공동체, 이데올로기’라는 꼭지들로 이야기를 채워가고 있다. 이들의 주장 가운데 설득력 있는 주제를 정리하자면 결국 ‘영어의 중립성’과 ‘문화자본으로서 영어’로 모아진다. 이제껏 우리는 ‘영어’에 ‘정치’라는 개념을 넣는다는 자체를 생각해 보지 않았다. 이는 마치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 논쟁과 똑 같은 괘를 가지고 있다. 교육을 둘러싼 집단 간에 벌어지는 팽팽한 긴장은 물론, 제도적으로 권력을 가진 집단이 교육을 통제하는 것이 엄연한 사실인데도 그 사실을 애써 외면하거나 그럴 리 없다고 우기는 과정을 우리는 오랫동안 지켜 봐 왔다. ‘교육은 정치다.’라는 외침은 이제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영어도 똑 같은 논리로 가치중립성을 이야기 한다.


실제로 영어교육의 이데올로기는 처음부터 영어를 ‘중립적’이고 ‘자연스러운’것으로, 말하자면 그 정치적․사회적 맥락을 배제한 순수하고 추상적인 언어체계인 것처럼 가장하는 데 있다. 언어는 언어이지 정치가 아니라는 것이다. 영어의 가르침과 배움이 일어나는 공간에서 영어에 담긴 모든 정치학이 휘발되고, 순수한 기술로서의 언어라는 환상이 작용한다.(38쪽, 윤지관)


무엇보다 영어는 우리들에게 세계 자본주의의 주축으로 나서야 할 한국에게 세계화의 공통어로서 편리하고 필수적인 소통도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즉, 영어는 중립적이면서도 기능적인 의사소통의 하나로서 언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이 때 영어는 세계적으로 유용한 도구이니만큼 사람들이 스스로 찾은 것이지 억지로 강요한 것이 아니라는 선택의 문제로 정리된다. 결국, 영어가 확산되는 현상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어서 정치성이 개입할 여지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꼭 그렇게만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겉으로는 영어가 ‘정치적 중립성’을 띤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 뒷면에는 철저하게 지배층의 의도와 자본의 논리가 관철되고 있기 때문이다. 영어는 더 이상 무언가를 전하는 그릇만은 아니다. 그 자체가 계급을 나누는 기재로 작동하고 있을뿐더러 커다란 하나의 상품으로 기능을 충실히 하고 있다. 특히 영어라는 상품을 둘러싼 산업과 사교육 시장은 점점 영어를 왜 배워야 하는지도 모른 채 공부하는 아이들과 어른들의 삶을 왜곡하고 억압하고 있다. 이는 전 세계적인 신자유주의 흐름의 확대와 한국의 독특한 천민자본주의적 속성과 맞물려 점점 더 심화되고 있다. 이 책은 지금 성행하고 강화되고 있는 영어교습 형태에 담긴 이념성격에 대한 인식을 고찰하여 내 마음속의 억압을 철저하게 들여다보길 바라고 있다.

  더불어 최샛별 교수는 ‘문화 재생산’ 또는 ‘문화자본’이라는 개념을 도입해 마르크스의 계급분석에 혁신적인 전환을 가져온 프랑스의 대철학자 부르디외의 이론을 끌어와 우리 사회에서 영어실력이 문화자본으로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 지, 그것이 계급의 양극화를 어떻게 가속화 시키고 있는지 분석하고 있다. 사실 이러한 접근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미 이 논문에 앞서 김왕배 교수는 <산업사회의 노동과 계급의 재생산>(한울, 2001)을 통해 영어교육이 문화자본으로서 기재가 어떻게 발휘되고 있는지 간략한 사례 연구로 계급의 분화와 양극화를 예단한 적이 있다.


영어가 단지 미래에 좋은 직장을 얻고 외국인과 대화할 기회에 대비하자는 그런 종류의 수단에 불과할까? 한국의 상류계급에게 ‘서구’는 타 계급과 자신들의 계급을 ‘구별 짓기’ 위한 핵심적인 자원이며, 상류계급의 자녀들은 자신들의 계급을 ‘구별 짓기’ 위한 핵심적인 자원이며, 상류계급의 자녀들은 예외 없이 유학을 떠나고 있다. 사립학교에서 영어교육을 이렇게 차별화하고 있는 것도 이와 같은 논리로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즉, 서구=우월한 것이라는 문화적 코드가 팽배해 있는 이 사회에서 영어라는 서구의 언어를 뛰어나게 습득함으로써 타 계급과 자신들을 구별하려는 전략인 것이다.(김왕배, 181쪽)


부르디외에 따르면 의도한 것이든 의도하지 않은 것이든 관계없이 각각의 계급들은 자신들의 계급문화를 타 계급들과 구별하고자 하는데, 상류계급인 경우에는 특히 사회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자신들의 경제력으로 구별 짓기가 가능한 예체능과 영어를 새로운 재생산 기제로 삼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도 점차 이러한 구별 짓기는 영어의 중립성과 세계화의 논리로 포장돼 마치 영어를 사이에 두고 경쟁하는 것이 마치 공정한 게임인양 보여 지고 있는데, 어떻게 됐든 영어를 잘한다는 것은 곧 사회적 성공과 사회 지배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렇다면 영어실력이라는 것이 이렇게 문화자본으로서 사회적인 정당성을 인정받을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문화자본을 얻기 위해서는 장기간에 걸친 투자가 필요하기 때문이고 경제적 자본과 달리 수량화가 어렵고 사회구성원들이 잘 인식할 수 없어 사회 재생산에 있어 문화자본은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문화자본의 소유 여부는 경제자본과 달리 사회적 지위의 차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해 계급저항을 그만큼 줄이는 효과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경제자본과 문화자본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경제자본과 문화자본의 유기적인 결합은 자녀의 문화자본이 되면서 이것이 다시 경제자본으로 전환되는 재생산의 방정식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이 책은 영어가 이제는 또 하나의 지배권력 유지 장치의 문화자본으로서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음을 확실히 보여준다.


영어, 어떻게 배우고 가르쳐야 하나


적어도 나에겐 영어는 학업성취감을 안겨줬던 교과로 기억한다. 교육흐름에 발 빠르게 대응을 했던 우리 아버지는 그다지 열악한 경제상황에서도 초등학교 6학년 시절 1년 동안 영어 과외를 시키셨다. 1년이 지난 뒤에는 나의 게으름과 이어진 과외 금지령 때문에 그만 두어야 했지만, 그 과외 덕에 중학교 영어 과정 3년을 편하게(?) 보낼 수 있었다. 이후 성인이 돼서까지 숱하게 돈을 들여 사 모았던 수많은 영어 관련 참고서와 테이프만 따져도 적지 않은 양인데, 나는 아직도 글은 그나마 읽되 말은 하지 못하는 반쪽 영어실력만 가지고 있다. 교사가 돼서는 영어에서 좀 먼 생활을 할 것 같았으나 초등교육과정에 영어가 들어오고 난 뒤에는 다시 영어연수를 받게 되었고 담임교사도 기본적인 교실영어를 습득해야 한다는 끊임없는 교육기관의 압력을 받으며 무자격(?) 영어선생으로 오늘도 난 아이들 앞에 서 있다.


영어교육의 원로 가운데 한 분인 김진만 교수는 교양 없이 실용영어교육만으로는 영어실력의 향상을 꾀할 수 없다는 점, 내용 있는 글 읽기와 회화의 필요성, 조기 영어교육이 왜 가망성이 없는지, 깨져야 할 원어민 교사에 대한 신화와 같은 이야기로 우리들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반면, 이병민 교수는 영어가 학교교육의 울타리를 벗어나고 있다며 국가 단위의 접근과 전사회적인 차원의 접근을 요구한다. 그는 우리나라 영어교육의 문제점의 하나로 영어에 노출된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한 언어에 집중적인 노출시간은 2~3천 시간이지만 약 730정도 시간밖에 없는 학교교육으로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다는 주장을 편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모국어만 가지고 평생을 살아가도 그다지 어려움이 없는 우리 언어 환경에 있다고 지적한다.


결과적으로 쉽게 배울 수도 없고, 쉽게 상당한 수준의 영어능력을 보여줄 수도 없으며, 우리의 언어사용 환경이나 영어에 대한 수요나 필요성을 고려하면 상당한 수준의 영어능력은 일부 소수의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그런 수준의 영어가 모두에게 필요하다고 믿게 되었다. 조금은 불편하다 해도 별 무리 없이 나름대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면서 생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어의 필요성을 지나치게 침소봉대한 결과이다.(이병민, 178쪽)


이병민 교수는 초등학교 조기 영어교육이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고 말한다. 영어교육 실패의 가장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조기 영어교육이라는 것이다. 더불어 지금까지 초등학교 영어교육이 실질적으로 영어교육에 기여한 부분은 거의 없는데, 1,2학년 조기영어 까지 도입하려는 정책은 또 하나의 실효성 없는 무의미한 일이 될 수밖에 없다며 쓴 소리를 내뱉는다. 그에 따른 근거로 정부에서 배정한 1,2학년 시기 동안의 영어노출 시간은 약 30시간뿐인데, 이는 하루 8시간씩 진행되는 영어마을 프로그램에서 불과 4일이면 해결될 시간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무의미한 정책이 오히려 사교육시장의 팽창과 학부모의 부담만을 가중될 것이라 걱정한다. 결국 그의 근본적인 대책은 영어교육을 보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시작한다. 영어에 덧씌워진 이데올로기나 우상화를 거두어내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며, 더불어 정확한 영어 수요 예측을 통해 사회적 손실을 줄이는 병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여러 주체가 참여하는 개별 수준에 맞는 영어교육과정 종합적인 기획과 검토가 반드시 마련될 때라야 비로소 억압으로서 영어가 아니라 삶의 일부로서 영어로 질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 믿고 있다.

 

영어의 지배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이 밖에도 이 책 마지막 3부에서는 오래 전 소설가 복거일의 영어 공용화 주장을 비판하고 재조명하기도 한다. 아울러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일본, 아프리카의 사례를 깊이 다루고 있는데, 박거용 교수의 서평(우리교육, 2007. 5)에서 드러나듯 지나치게 많은 지면 할애가 마치 공용화론을 새롭게 담론화 하는 것 같아 답답하기도 했다. 차라리 초중등 현장 교사들의 목소리나 사회 각계각층에서 영어라는 것이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작동하는지 구체적인 사례가 덧붙여졌으면 더욱 좋지 않았을까 싶었다. 이 책의 대부분이 영문학자들과 사회학자들이어서 한쪽의 목소리들만 너무 강하게 들린다는 느낌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동안 내가 대학사회에서 이른바 영어 전문가라는 사람들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들과 다른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은 무척 반가운 일이었다. 사회학자는 그렇다 치더라도 영문학자나 영어교육자들 가운데 일부겠지만, 나름의 철학을 가지고 사회적인 안목으로 우리 사회에서 ‘영어’라는 화두를 풀어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아직 우리 사회의 건강성이 남아있다는 얘기가 아니겠는가.


한국사회에서 영어는 매체로서의 기능을 넘어서서 이미 ‘물신(物神)’이 되어 버렸다. 한글도 제대로 못 깨우친 유치원 아이들부터 정년을 앞 둔 기업간부들에 이르기까지 영어는 개인의 능력과 적성을 가늠하는 보편적 잣대로 군림하고 있다. 타자의 언어이면서도 언제나 우리의 타자성을 상기시켜 주는 영어. 우리 스스로를 ‘결핍’과 ‘부재’로 규정짓고 일상을 불안과 강박으로 짓누르는 영어야말로 한국인의 사회적 (무)의식을 지배하는 ‘초월적 기표’이다. 또한 영어실력에 따라 ‘인간다운’ 삶의 등급이 매겨지고 ‘훌륭한’ 부모를 만나야만 영어에 접근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영어는 우리 사회의 모순된 계급구조를 재생산하는 일종의 ‘문화자본’이다.(이경원, 362-363쪽)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영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고 대응해야 할까. 이경원은 영어의 전유나 영어의 거부냐는 이분법적인 접근은 현실적으로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오히려 상호배타적 관계로 받아들이지 말고 수단과 목적의 상호보완적 관계로 파악하여야 할 것이라 주장한다. 방법적으로는 교양영어를 무시하고 실용영어만을 강조하는 절름발이 영어교육에서 벗어나야 한다. 철학적으로는 언어가 단순한 의사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정치적이면서도 문화적인 차원의 의미가 담겨 있는 도구라는 인식을 교육적으로 풀어내 사회적인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 윤지관 교수의 말처럼 영어를 한마디 못하더라도 자기 존재의 충일함을 견지하고 실현하는데 도움을 주는 교육이 영어지배의 세상일수록 더욱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이에 대해 박거용 교수는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일은 영어 광풍을 잠재우는 것이 아니라 길들이라는 것이라 말한다. 그들의 말 속에서 어렴풋이 길은 찾은 듯 보인다. 하지만 우리 시대의 아웃사이더처럼 보이는 그들의 주장을 물신화된 영어 사회에서 오늘을 사는 보통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까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구체적인 움직임과 실천이 무척 아쉬워만 보인다. 그건 이 책 속에 담긴 많은 논문들의 대부분이 4-6년을 넘기거나 심지어 10년 전의 것이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는 영어 광풍에 휩쓸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저 이 책을 펴낸 것으로도 이제 작은 첫 발을 내디딘 것이라 생각하며 만족해야 할까.


영어에 대한 숭배에 빠져 모국어가 자신의 삶에서 가지는 의미조차 망각하는 사람들은, 김남주 시인의 의역을 빌리자면, “자기의 언어에서 유배당‘한 것이다. 이산(離散)이 하나의 흐름으로 이루는 세계화의 시대이지만, 누가 강제한 것도 아닌데 자신의 땅에서 스스로를 이산의 올가미에 빠뜨리는 것이야말로 은밀하게 진행되는 식민화 과정의 한 극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윤지관, 40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