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돕이야기 만들기/읽은 책 들려주기

조정래의 '허수아비춤'을 읽고....

갈돕선생 2010. 10. 17. 23:19

허수아비춤

 

태백산맥의 조정래씨. 그가 쓰는 글을 이렇게 읽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시대를 사는 나는 행운아다. 앞으로 그의 책을 읽을 많은 이들도 문학을 통해 그가 전하려 했던 우리네 아픈 역사와 질곡, 수치와 역겨움을 생생하게 느낄 것이다. 문학을 하는 사람의 사명이 바로 이것이었다고 말하는 조정래의 삶과 철학을 그의 작품을 통해서 읽어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태백산맥, 한강, 아리랑이 전해준 충격과 감동은 지금도 사라지지 않고 내 가슴 속에 남아있다. 문학이 주는 힘이 어떤 것인지 조정래씨 만큼 확실하게 보여준 작가가 또 있을까? 박경리의 토지보다 좀 더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뚜렷한 조정래의 작품을 나는 훨씬 더 좋아한다.

 

오랜만에 또 하나의 장편소설, 허수아비춤도 그런 기대감으로 인터넷 서점에서 사인본 예약판매를 하자마자 나는 곧바로 신청을 했다. 책 표지에는 '한강이후 10년간 품어온 경제민주화의 청사진을 제시하다!', '성장의 빛과 그늘, 자본과 분배의 문제를 현란한 필치로 파헤친 핵폭판급 서사!'라며 이 책의 가치를 읽기도 전해 서둘러 표현해 댔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읽었을 책인데, 지나치게 요란함에 내심 기분은 좋지 않았다. 언제나 조정래선생님식 단락은 특징이 있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상황묘사를 풍성하게 가져간다는 것. 태백산맥에서 익히 보던 패턴이어서 오히려 친숙했다. 하지만, 조금은 실망이었다. 금기와 성역의 중심인 우리나라 재벌의 문제를 다루어 파헤쳐 나가려 했다는 점에서는 높이 평가했지만, 대하소설이 아닌 한계인 탓인지 등장인물들의 모습이 뚜렷하게 다가오지도 않았고 긴박감이나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힘도 무척 약해 보였다. 어쩌면 그가 하고 싶은 얘기들을 여러 매체들을 통해서 익히 듣고 알고 있었던 탓인지도 모르겠다.

 

천박한 자본주의의 나라인 우리나라 경제시스템에서 빚어지는 재벌들의 범죄와 비리, 그리고 모순들을 몇몇 인물들에 담아 전하기에는 444쪽은 너무도 짧아 보였다. 조정래선생님에게는 무리셨겠지만, 풍부한 실증자료와 검증자료로 10권짜리 대하소설로 엮어 냈다면 좀 더 감동적이었고 대중들에게 주는 충격도 더 컸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은 여전히 남는다. 수박 겉핥기로 슬쩍 다룬 작품으로만 받아들이는 건 대작가에 대한 지나친 모욕일까? 물론, 더이상 우리 국민들이 재벌들의 손아귀에 놀아나는 허수아비이길 바라지 않는 작가의 메시지를 읽어내 내 삶에서 크게 작은 변화를 이끌어내야 함은 당연하다. 이 책을 계기로 좀 더 그런 면에서 주의와 관심을 기울이자 마음은 먹었으니. 그래도 조정래씨를 존경하는 평범한 독자의 아쉬움은 어쩔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