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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우의 '지식의 구조와 교과'를 읽고......

갈돕선생 2010. 9. 18. 09:36

지식의 구조와 교과

 

대학시절 교육학을 이야기할 때 부르너는 빠짐없이 등장하는 핵심인물이었다. 특히, '지식의 최전선에서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 내는 학자들이 하는 것이나 초등학교 3학년 학생이 하는 것이거나를 막론하고 모든 지적활동은 근본적으로 동일하다'는 주장과 논리는 지식의 구조를 외치는 부르너 교육철학의 처음이자 끝이었다. 하지만, 아직 교사가 되지 못하고 교육이 무엇인지, 가르친다는 것, 아이들이 누구인지, 배움이 무엇인지 모르는 교대생에게 이런 주장은 그저 기말시험을 치러내기 위해 줄을 치며 읽어서 외워두어야 할 하나의 문장에 불과했다. 이는 당시(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여기지만) 교대의 교육과정과 교수들의 질적인 수준이 교대생들을 배움으로 이끌지 못한 탓이 커 보인다. 그래서 그럴까? 그 시절 교육학은 왜 그렇게 따분하고 고리타분한 것이지, 차라리 동아리에서 선후배가 모여 공부하는게 더 재미있고 배움의 욕구도 생겨났다. 교육이 무엇인지, 교사가 무엇인지, 그나마 머리로 알게 된 것은 대학 교육과정도, 대학교수들도 아닌 학교 밖 교육이론들과 동아리 학습에서였다.

 

내가 대학 다닐 적에는 보수적인 교육이론들에 맞서는 비판적이고 진보적인 교육이론들이 불같이 일어날 시절이었다. 당연히 나도 대학교재에서나 보는 보수적인 교육이론들보다는 비판적이고 진보적인 교육이론에 더 손이 갔다. 자연스럽게 그쪽의 이론에 기대어 보수이론들을 힐난하고 비난하는 일도 잦아졌고 때로는 한쪽으로 치우쳐 내 생각을 잃어버리거나 객관적인 시각을 얻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도 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대학원에 진학해 교육사회학을 다시 공부하고 교사생활 18년째 접어들면서 요즘 나는 교육이 무엇이고 내가 가르치는 것이 무엇인지 정리하고 되돌아 볼 필요를 느끼기 시작했다. 보수적인 시각을 가졌지만, 열정적으로 학문의 깊이를 더한 학자들의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여 보아야겠다는 생각도 하게 됐다. 대표적인 인물이 이홍우교수다. 사실 이홍우교수 이전에도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행동주의 교육학자인 정범모교수의 글을 한 편 읽고는 몇 해 전 큰 감명을 받은 적이 있다. '시험, 왜 보나?'라는 제목으로 어느 심포지움에 실은 글들을 엮은 책에 정범모의 교수를 읽는 순간, 정말 대학자들은 글을 이렇게 쉽고 이해하기 쉬게 쓰시는 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아울러 교육을 보는 관점이 행동주의적 관점에 고착된 게 아니라 크고 깊구나 하는 생각도 하게 됐다. 물론 강단의 학자로 사는 한계가 보였지만.

 

<지식의 구조와 교과>라는 책은 이홍우교수의 대표적인 저작물이다. 그가 학자로서 평생 기대어 주장하고 연구를 했던 것이 부르너의 '지식의 구조'여서 교육과정과 교과를 다시 생각하고 공부하는 내게는 아주 적합한 책이었다. 증보를 거듭했지만, 다소 오래된 책이어서 이따금 보이는 고루한(적어도 내게는) 이야기와 장황한 전개가 글을 읽는 속도를 떨어뜨리기는 했지만, 곳곳에서 드러나는 교육과정과 교과에 대한 그의 깊이 있는 고민과 생각은 충분히 받아들일만 한 것이었다. 이 책은 중학교 사회과 과학과 도덕과 수업을 사례로 들며 '수업한다'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첫 장 끝에 아주 의미있는 글을 써 놓았다.

 

"아동중심의 의미는 무엇인가? 교육에서 아동중심의 원리를 따른다는 것은 교육활동이 전체적으로 '아동의 이익'에 기여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교사가 자신의 수업을 '아동중심'의 수업이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1차적으로 그 수업의 결과가 아동에게 어떤 '이익'을 가져다주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익'은 '교육적으로 의미있는' 이익이어야 한다."(p.28)

 

2장의 제목은 '교과란 무엇인가'이다. 가장 흥미로운 장이었다. '교과'를 교과답게, 또는 '그 교과의 성격에 충실한 형태'로 가르치지 않는다는 걸 지적하는 이 장은 지금 내 모습을 충분히 반성하게 만드는 글귀였다. 교과를 '잘못' 가르친다는 것은 교과를 '교과답지 않게' 가르친다는 뜻이라는 그의 주장은 오래됐지만 지금도 달라진 것 없는 오늘날 우리교육도 돌아보게 만들었다. 나를 비롯한 우리나라의 많은 교사들은 가르치는 방법이 크게 다르지 않다. 국어를 가르치는 것이나 사회를 가르치는 것이나 차이가 없다. 이 책에 나오는 '중간언어' 즉, 개념과 원리에 바탕을 둔 교과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학문의 결과를 그저 일방적으로 전달하고 익히게 하는 활동으로 교과를 가르치는 식은 아이들을 결코 배움의 길로 안내하지 못한다. '주입식 교육'에 대한 그의 주장은 색다르게 다가오기도 했다.

 

"이른바 '주입식 방법'으로 가르쳐진 지식은 학습자의 바깥에 머물러 있을 뿐, 학습자의 '안'에 들어가지 않는다. 여기서 학습자의 '안'에 들어간다는 것은 학습자의 마음의 한 부분으로 된다는 뜻이며 학습자의 '보는 눈' 또는 '안목'으로 된다는 뜻이다. .....(중략)..... 일반적인 의미에서 주입식 교육은 이 문제에 대한 좋은 해결채이 아니다. 주입식 교육은 지식을 가르치되 그것이 학생의 마음 속에 들어갈 수 없는 방식으로 가르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략)...... 지식을 가르치되 그 안목으로 현상을 볼 수 있도록 하지 못했다는 뜻으로 해석되되어야 할 것이다. 다소 극단적으로 말하여 이것은 지식을 가르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이다."(pp.46-48)

 

그에게 있어 '교과란?' 교과답게 가르친다는 의미를 학자들이 하는 일로서 가르친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지식의 구조'라는 용어로 교과를 잘 가르친다고 할 때 그는 그것은 가르치는 내용과 같다고 말한다. 그 가르치는 내용은 단순하게 지식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탐구하고 이해하는 일이어야 하며 교과에 대한 안목, 즉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힘을 기르는 것이어야 한다.

 

이렇게 지식의 구조를 밝히던 그는 여러 이야기들을 거쳐 259쪽에 주제 색인이라는 한 꼭지를 만들어 이 책의 모든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해 놓는다. 사실 이 부분만 봐도 이홍우교수가 하고 싶은 말의 핵심이 무엇이지 잘 알 수 있다. 그리고는 이 책의 끝에는 오래전에 번역해 놓은 부르너의 '교육의 과정' 전문을 실어 놓았다. 부르너의 글을 읽다보면 이홍우식의 지식의 구조 해석법에서 그리 벗어나지 않는다는 걸 잘 알 수 있다. 1960년대의 글이어서 당시 시대상황도 이해해 가며 볼 수 있어 좋다. 가장 흥미로운 건 당시 미국교육상황이 지금 우리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 이걸 반갑다고 해야할지 우울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우리 모습을 되돌아 볼 수는 있겠다 싶었다. 294쪽에는 '수월성 교육'에 대한 부르너의 관점도 주장도 실려있다. 부르너는 '수월(excellence)'의 뜻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 말은 좀 더 뛰어난 학생들을 길러내는 것만이 아니라 각 개인으로 하여금 최고의 지적 발달 수준에 도달하도록 도와주는 것을 의미'한다. 교과의 구조를 충분히 고려하는 훌륭한 수업은 아마 머리 좋은 학생들 보다 능력이 모자라는 학생들에게 더 가치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졸렬한 수업때문에 피해를 입는 학생들은 머리가 좋은 학생들이 아니라 능력이 모자라는 학생이기 때문이다."

 

부르너는 '실력지상주의(meritocracy)'에 대한 우려도 깊었다. 경쟁제도를 내포하는 실력지상주의는 학교가 사회진출의 절대적인 교두보가 되며 교육기회와 취업기회가 모두 이전의 학교성적 때문에 고정돼 뒤늦게 머리가 트이는 학생이나 어려운 가정 환경에서 자라는 학생들은 모두 희생자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아울러 실력지상주의가 교육풍통에 몇 가지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초래할 것임을 예측하며 그 가운데 가장 큰 것이 바로 시험을 지나치게 강조하게 된다는 것라고 주장한다. 21세기를 하는 오늘 우리 사회를 그대로 읽어내는 부르너의 혜안과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는 오늘을 사는 우리가 반드시 곱씹어 봐야 할 주장이었다.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은 미안하게도 이홍우교수의 말보다 부르너의 말이었다. 특히 '교육의 과정'의 재음미라는 짧은 글은 부르너라는 사람을 개인적으로 높이 평가된 계기가 됐다. 지식의 구조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내세우기 시작했던 '교육의 과정'이 출판된지 10년이 지난뒤 그는 미국교육개혁의 방향과 강조점이 엄청나게 변화하는 시점에서 새로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거싱 바로 이 '교육의 과정'의 재음미였다. 이홍우교수도 증보판 머리말 끝에 이 글을 유심히 살펴보라 할 정도로 이 꼭지는 이 책을 끝까지 읽는데 보람을 주었다. 부르너의 이 글은 50년 전에 쓰여졌다고 믿을 수 없을 만큼 그의 사회관과 교육관이 지금 우리 사회와 교육을 읽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내게 보람을 준 그의 글은 세 가지 지점에서 마음에 들었다.

 

첫째, 지식의 구조를 이해하는 일은 개인적인 학습에서가 아니라 협동적인 학습에 의해서 더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협동체는 효과적인 학습에 큰 힘을 가지고 있다. 학생들은, 만약 그렇게 하도록 권장하면, 서로서로 굉장한 도움을 줄 수 있다. 학생들은 세포와도 같으며 이 세포는 혁명적인 인자를 담고 있는 세포이다. 이 세포는 상호학습과 상호교수가 일어나는 세포요, 학습구성원에 대한 그 자체의 공명감과 책임을 가지고 있는 단위이다. 우리는 교육과정을 어떻게 구성하는가 하는 문제만을 생각하였기 때문에 소위 '학습의 상호성'에 관해서는 미처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또한 우리는 우리의 실험실은 물론, 교육과정 개발사업 그 자체가 일종의 공동체라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둘째, 불평등한 사회를 개선하지 않으면 근본적인 교육개혁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불평등은 교육만으로 제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지난 10년 동안에 우리가 배운 또 하나의 교훈이다. 뿐만 아니라 학교는 대게 빈곤의 영향을 영속화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빈곤은 말만으로 제거되지 않으며 실지로 학교를 졸업하면 어떤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사회가 자신있게 보장할만큼 일자리도 있어야 한다."

 

셋째, 교육은 절대 중립적이지 않고 근본적으로 정치적이라는 그의 주장은 정말 마음에 들었다. 대학시절 그렇게 부르너를 주장했던 교수님들 심지어 이글을 옮겨 놓은 이홍우교수조차 교육의 정치성에서는 한 발 물러서 있다. 아니 아예 관심 밖에 있는 것 같다. 부르너는 심지어 속죄고백까지는 아니지만, 지식의 구조에 대한 강조를 줄여야 한다고 선언한다. 그보다 우리가 당면하는 여러가지 사회적 문제와 관련해 교육과정을 다루고 싶어한다. 이어 어디서 어떠한 형태로 발견한 지식이든지 간에 지식을 적용하여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한다. 교육과정의 개혁으로는 불충분하며 학교제도의 개혁으로도 불충분할 것이라 주장한다. 이에 대해 이홍우교수는 부르너의 주장을 도덕교육의 필요성과 강화로 재핵석한다. 글쎄,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을 보려 하는 것일까?

 

아무튼 이 책은 지식의 구조와 교과, 교육과정에 대한 새롭지 않으나 새롭게 바뀌어야 할 우리네 교과관, 교육관을 재정립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책이었다. 더불어 한쪽 측면으로만 바라보았던 부르너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어 더욱 기뻤던 책이었다.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혜안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시대를 초월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된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