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내 책의 편집자였고 지금은 한 아이의 엄마가 돼 있는 유미씨에게 얼마전 전화를 걸었다. 세상 모든 일을 속으로야 모르겠지만, 겉으로는 허허롭게 넘기던 그가 사랑스런 아이에게 빠져 도통 소식을 전하지 않아 답답해 연락을 해 봤다. 사실은 다른 이유도 있었다. 무언가 하고 싶을 때 막힐 때면 늘 편한 대화상대가 돼 주었던 그였기에 연락을 했다. 이런 저런 안부를 묻고는 이내 속내를 드러냈다. 쓰고 싶은 글이 있는데, 도움이 필요하다 했다.
진지하게 들어주고 방향을 짚어주던 그가 며칠 뒤, 휴대폰 문자로 '4천원 인생' 추천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내가 쓰고 싶은 글에 도움이 될 지도 모른다며. 나는 서둘러 인터넷 서점을 뒤적거렸다. 대충 짐작이 가는 내용의 책이었다. <한겨레21>기자들이 몸소 노동현장에 뛰어들어 하루살이 노동자들의 일상을 밝혀낸다는 만화 같은 이야기에 구미가 더욱 당겼다.
한동안 시사IN만 받아 보았던 터라 일명 '노동OTL' 의 이야기는 금시초문이었다. 머리말을 쓴 한겨레21 편집장은 바로 본문으로 들어가라는 메시지부터 던졌다. 자기 글은 정말 사족에 불과하단다. 무슨 내용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종강선생은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고 했다. 박권일선생은 이것이 우리 시대의 리얼리즘이라 일갈한다. 도대체 무엇이 실려있길래?
내겐 너무도 크나큰 충격
1부 감자탕 노동일기_임지선 / 2부 히치하이커 노동일기_안수찬 / 3부 '불법 사람' 노동일기 / 4부 '9번 기계' 노동일기. 한 꼭지씩 읽어갈 수록 떨리는 가슴과 안타까움을 어떻게 해야할 지 당황스러웠다. 외식을 하면 흔히 만나던 일명 '식당 아줌마'들의 일상이 얼마나 처참한지 왜 그렇게 나는 무심했는지 부끄럽고 미안하고 한심스러웠다. 식당을 갈 때마다 내게 보이는 건 음식 맛이었고 종업원들의 불친절이었지 그들의 노동이 얼마나 힘든 지 상식에 어긋난 것인지 나는 솔직히 말하건대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었다. 그저 조금씩 부업을 하는 정도로 식구들을 먹여살리는 그저 그런 존재로만 무심코 바라보며 지나쳤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네들의 일상은 정말 노예와 다름 없었다. 단 4천원대의 시급을 받으며 사람 대접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고 쉬고 싶다는 말조차 꺼내지 못하는 그들. '그들!' 정말 내게는 '그들'이었다. '우리들'로 받아들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으니. 말로는 진보니, 노동이니, 계급이니 어설프게 주워듣고 읽은 지식나부랭이들로 나도 모르게 거들먹 거렸을 내 모습이 문득 부끄러웠다.
이어 기자들이 찾은 또 하나의 노동현장은 대형 마트였다. 대형 마트의 독특한 경영방식을 곧잘 주워듣기는 했으나, 그 속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어떤 구조 속에서 어떤 과정으로 채용되고 일을 하는 지는 이 책에서 처음 알게 됐다. 무엇보다도 그 청년들의 가정환경을 비롯한 성장배경들이 책을 읽는 내내 내 가슴을 아프게 했다. 도무지 헤어나올 수 없는 빈곤의 굴레. 가난을 가난으로 여기지 않고 그저 무심히 받아들이며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소박한 꿈을 꾸는 것으로 하루를 버텨가는 그들의 이야기에서 내 머릿속은 복잡해져만 갔다. 거대한 자본과 그 자본이 흘려주는 찌꺼기들에 그저 감사하며 기계처럼 무관심 속에서 일해야 하는 그들과 그들 가족들의 생은 그야말로 빈곤의 뫼비우스 띠였다. 이 두 이야기에 견주어보면 3부 '불법 사람' 노동일기는 오히려 평범해 보였다. 이주노동자들의 삶은 익히 주워들은 게 많았던 터였을까? 아님, 한국 땅에 사는 사람들의 핏줄이 그만큼 무서운 것일까? 하지만 글을 읽을 수록 그들이 외국인이라기보다 정말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만 절로 들었다. 왜 그들을 우리는 짐승처럼 대해야만 하는 것일까? 약자가 약자를 더 괴롭히는 이 지옥같은 세상을 우리는 정말 아무런 느낌도 없이 살아간다.
대학시절, 어설프게 친구따라 일용직 노동현장에 5일간 뛰어든 적이 있다. 일주일도 버티지 못하고 대충 약정했던 한 달도 채우지 못한 채 노동현장을 도망쳐 나왔던 그때를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공장 건물의 페인트벽을 새로 칠하기 위해 이전 벽에 묻어 있던 페인트를 긁어 내는 작업이었는데, 하루가 어찌나 시간이 가지 않고 힘들 던지 수많은 땀으로 하루를 보내 집으로 돌아오면 어머니가 의심의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곤 하던 그때. 그때를 떠올리기라도 하면 요즘도 나는 손발이 오그라들기만 한다. 4부 이야기 '9번기계' 노동일기는 읽는 내내 그때를 연상하도록 해 주었다. 사람이 아닌 기계. 아주 싼 노동값을 치루는 기계가 돼 가는 사람들이 아직도 우리 사회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정말 알고 사는 걸까? 이 모든 것이 내겐 정말 충격이었다. 잠시 잊고 아니 무심하게 지나쳤던 사람들. 세상들. 대학 등록금 절반으로 낮추자는 운동이 한창 벌어지는 시점에서 나는 대학의 근처도 못 가본, 잠시 머물다가 이내 나온 이들의 노동현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 모든 관심사가 사람에게로, 온전히 사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세계로 가야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만 들었다.
교육, 우리 아이, 내 아이
글을 읽으면서 내내 나는 이 사회를 어찌해야 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빈곤의 굴레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세상이 되 버린 이 사회를 우리는 어찌해야 할까? 그러면서 이내 교사인 내 모습을 돌아 보았다. 문득, 한 7-8년 전, 지역의 모교육연구소에서 해마다 초등학생과 중학생을 대상으로 열었던 역사기행에서 있었던 일이 떠오른다. 교육경력 2-3년차 되던 어느 여교사가 기차역에서 아이들을 인솔하다 노숙자들을 보고는 이내 이런 말을 던졌다 한다.
"너희들도 공부 제대로 안 하면 저렇게 되는 거야. 그러니 공부 열심히 해"
당시 우리 반 아이 입에서 들었던 얘기니 거짓은 아니었을 터. 더구나 그 녀석은 고개까지 끄덕였다고 한다. 노숙자를 실패한 사회인, 무능한 폐인으로 보는 어른들의 시선은 그렇게 아이들 의식을 나눔의 철학이 아니라 경쟁의 철학으로 오늘까지도 몰아왔다. 사회에서 낙오될 수밖에 없는 구조에서 낙오되는 사람되는 그들이 더불어 이 사회에서 함께 살 수 있는 고민을 함께 나누기 보다 우리는 철저하게 그들을 분리하고 차별해 왔다. 그런 어른들의 심리 속은 자부심으로 가득찼을까? 아니다. 그들은 불안했다. 내 자식도 언젠가는 실패의 나락으로 빠져 사회의 패배자로 낙인찍힐지 모른다는 불안으로 틈만 나면 아이들을 다그쳤다.
어른들은 이를 '현실'이라 표현했다. 모든 사람들이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함께 노력하기 보다 개개인의 능력을 어떻게 하면 극대화시켜 패배자가 되지 않을까에만 관심을 가졌다. 신자유주의의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오히려 이를 당연시 여겼다. 세상은 원래 경쟁 속에서 살 수밖에 없고 1등 밖에 기억되지 못하는 것이라 자신을 끊임없이 세뇌했다. 야근도 당연시 했고 자식을 위해서는 무슨 일도 해서 사교육비를 대려 했다. 저임금에 불만을 품었지만, 당장 급한 건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중노동을 감내하면서도 우리 어른들은 그 탓을 '간때문이야'라고 했다. 피곤하고 지친 내 삶을 모두 술 몇 병도 이겨내지 못하는 '간'으로 돌려 놓았다.
무한경쟁과 실패, 빈곤으로 이어지는 뫼비우스띠는 교육을 아이들의 성장도구가 아닌 끊임없는 교육노동의 도구로 끊임없이 변질시켰다. 이제 곧 거의 모든 아이들이 비정규직과 저임금의 굴레로 들어가야 할 이 시점에서 교육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순간 암울해졌다. 수업을 재구성하고 그들에게 오늘의 행복함을 즐길 수 있도록 해주는 내 학급운영이 과연 그들의 미래에 얼마나 도움을 줄지 자신이 없어졌다. 그래도 아이들이 오늘을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해야겠지만, 그러면서 살겠지만, 과연 내 노력이 알 수 없는 희망의 노래가 빈곤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많은 아이들에게 어떤 위로가 돼 줄 수 있을까? 이 즈음에서 내 아이의 모습도 내 아이의 미래도 불현듯 걱정으로 다가섰다. 대학을 보내지 않고서도 무언가를 해 내면서 세상을 즐기며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는 내가 잡아 놓은 계급적 위치에 대한 막연한 믿음때문은 아닌지 모르겠다.
우린 정말 알고 있는 걸까
이 책을 보면서 정말 우리는 이 세상을 정말 제대로 알고 사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몇 해 전 이계삼선생님의 어느 글 속에서 정말 우리는 세상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느냐며 반문하던 문구가 새삼 떠 오른다. 자본이 어떻고 진보가 어떻고 빈곤이 어떻고 양극화가 어떻고 노동 통일이 어떻고... 숱하게 듣고 들었던 말들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어느 새 세상을 머리로만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가슴 뜨거웠던 청년시절. 세상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며 앞 뒤를 가리지 않았던 그 시절. 마치 불나방처럼 자기 죽을 지도 모르며 달려들었던 그 시절. 우리는 세상 사람들의 작은 아픔과 상처에도 분노하며 살았다. 세상을 뒤집을 것처럼 함께 힘을 모으자 외치며 살았다. 그러나 어느새 우리는 내 삶의 작은 불이익에는 분노해도 사회의 부정의에 결코 분노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열심히 일해도 가난한 우리 시대의 노동일기, <사천원>을 읽으면서 나는 정말 세상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아주 절실히 깨달았다. 나는 아직도 세상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정말 모른다. 내 삶이 결코 내 것만은 아니라는 대학시절의 철학적 사유를 이제 다시 이 책을 통해 조심스럽게 꺼내 본다. 내 행복이 빈곤의 삶을 떨쳐내지 못하는 노동자들의 상처와 고통에 기반한 것이라는 상식을 다시금 돌아보게 된다. 등록금 반값 투쟁의 현장을 찾았던 김제동이 대학생을 향하여 외쳤던 말. 나만 행복하다고 행복한 것은 아니더라는. 내 주변 사람들이 행복해야 나도 비로소 행복하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생각해 본다. 지금 내가 해야할 일이 무엇일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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