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부터 메이저리그 내셔널리그 챔피언십 3차전에 출전한 류현진 때문에 출발을 조금 늦게 했다. 숙소에서 텔레비전으로 보다 16코스를 걷는 초반 스마트폰으로 진행상황을 보느라 바빴다. 짐작한 대로 잘 던져서 팀이 이기게 돼 무척 다행이었다. 물론 이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늘 양재성선생님의 남편인 제주생태사진작가 작업실이자 별장인 광령 ‘이소재’가 16코스 가는 길에 있는데, 그곳까지 거리가 멀지 않아 출발을 조금 늦추게 됐다. 오늘은 그곳에 머물기로 했기 때문이다.
16코스는 고내포구에서 구엄포구까지 애월 바다의 소박한 아름다움을 만끽하고 구암포구에서 길을 틀어 중산간 올레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애월해안로는 포장도로지만 바닷가 쪽으로 구간구간 흙길을 살려 놓아 지루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바다를 보며 걷는 걸음은 숲속을 걷는 걸음과 기분 자체가 다르다. 뻥 뚫린 가슴이란 것이 아마도 이럴 때 쓰는 것일 게다. 더구나 오늘은 날씨가 잔뜩 흐린 데다 바람까지 세차게 불어 파도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오솔길로 바닷가 쪽으로 더 내려간 바위 해안길이 아기자기하게 나타나 지금까지 지나온 해안길과 또 다른 느낌이다.
그렇게 길을 걷다보면 어느새 신엄포구를 만난다. 이 지역을 지나면 도댓불이라는 제주의 전통 등대가 보인다. 이어 예전 통신만의 하나인 남두연대가 보이고 해안로를 다시 걷다보면 아래로 중엄새물이 보인다. 중엄새물은 중엄리해안에서 솟는 용천수인데 규모가 매우 커 보였다. 겨울철에 넘나드는 파도 속에서 물을 긷는 게 매우 힘들어 1930년대에 지금의 방파제를 쌓았다고 한다. 해안올레는 커다란 물고리 조형물이 맞이하는 구엄포구에서 끝났다. 소금빌레가 펼쳐진 구엄포구를 지나면 이제 길은 다시 내륙으로 향했다. 마을에 들어서자 봉긋하게 솟은 수산봉이 보였다.
이쯤해서 아들과 나는 잠시 쉬었다 걸어다. 그러나 생각보다 수산봉은 금새 오를 수 있었다. 예전에는 수산봉 봉우리 위에 자연연못이 있어 물레(물미)오름이라고도 불렀는데 지금은 메워졌다고 한다. 오름이 아름답고 어질다 하여 영봉이라고도 불렀다고 하는데, 무거운 우리 발길을 가볍게 해 주었으니 이 이름이 딱 어울린다 싶었다. 목재계단, 목재테크와 산책로가 잘 닦여 있는 수산봉을 넘어 둘레길을 따라가면 커다란 곰솔이 지키고 선 수산저수지에 이른다. 높이 10m 둘레가 4m인 이 거목은 네 개의 가지를 뻗고 마치 저수지로 손을 내밀 듯이 서 있다. 400여 년 전 마을이 생길 때 심었다고 하는데, 이제는 마을을 지키는 수호목으로 보호되고 있었다. 눈이 내려 가지 윗부분에 쌓이면 마치 백곰이 저수지 물을 마시는 것 같다 하여 이름을 곰솔이라 지었다고 한다.
수산저수지는 수산유원지라고도 불린다 하는데 낚시터로 인기가 높다 한다. 특히 저수지 둑방 길을 걷는 기분이 정말 좋다. 둑방길 양쪽으로 억새가 가득해 바람이 많이 부는 오늘 같은 가을날에는 그야말로 환상이었다. 아들과 나는 이 둑방 길 끝 정자에서 저수지를 바라보며 아침에 편의점에서 준비해 온 김밥 한 줄로 배를 채웠다. 점심을 먹고 잠시 쉰 뒤 다시 우리는 출발했다. 돌담을 두른 밭길과 감귤밭이 가득한 길이었다. 아들과 나는 이 길을 걷다 돌담 밖으로 넘쳐 쏟아지듯 넘어진 채 가지를 늘어뜨린 귤나무에서 떨어진 아주 작은 귤을 발견하고 혹시나 해서 하나씩 들고 먹어 보았다. 좀 시긴 했지만 길을 걷는 우리 입에는 아주 제격이었다. 안 그래도 지나가다 잘 익은 귤 하나를 따먹고 싶었는데 그 마음을 올레길도 알았을까.
그렇게 길을 걷다 보니 우리는 어느새 항몽 유적 둘레길로 접어들었다. 이 주변에서 중간지점 스탬프를 찍고 나는 양재성선생님께 연락을 드렸다. 별장까지 머지않았기 때문인데, 선생님이 별장상황을 점검하지 못했다고 잠시 기다리란다. 본인도 깜빡하셨다며. 전화를 기다리던 아들과 나는 때맞춰 의논을 했다. 댁에서 머물 것인지 아니면 17코스로 내달을 것인지. 올레를 완주하고 한라산까지 오르려면 우리는 그냥 내달려야 했다. 나는 다시 양재성선생님에게 양해를 구하고 오늘 조금 늦은 도착이겠지만 무리를 해서라도 17코스 중반까지 걷기로 했다. 오늘 제일 무난한 할 것 같은 일정이 갑자기 무리한 일정으로 바뀐 것이다. 아들과 나는 힘을 내 다시 걷기 시작했다. 평이한 광령마을 길을 걸어 향림사, 광령초등학교를 거쳐 벚나무 가로수가 아름다운 16코스의 종점 광령1리사무소에 도착했다.
잠시 쉬면서 아들과 나는 17코스를 점검했다. 앞으로도 9km를 더 걸어야 한다. 이번 올레길 걸음 중 가장 먼 25km를 걷는 셈이다. 걱정은 됐지만 출발을 했다. 발바닥이 그만 쉬라는 신호를 계속 내렸지만, 욕심을 냈다. 17코스는 제주시 도심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광령교를 건너 오른쪽 무수천 트멍(틈새)길로 들어섰다. 무수천은 복잡한 인간사의 근심을 없애준다는 뜻의 이름이라고 한다. 때로는 물이 없는 건천이라 하여 무수천이라 부르기도 한다는데 실제로 이곳에는 물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다시 대로를 걷다보니 하늘로 비행기가 수도 없이 날아다닌다. 이 근처에 공항이 있기 때문인데 낮게 나는 비행기를 보는 풍경이 매우 낯설었다.
대로에서 다시 한 걸음 들어서니 광령천을 따라 이어지는 숲길이 나왔다. 숲길은 오후 5시를 향해 달려가는 시간 때문인지 깊고 그윽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숲 너머로 왼쪽 아래에는 강의 기암절벽이 보인다. 강에 이런 큰 바위들이 있다니 믿기지 않아 어디서 옮겨놓은 것은 아닌가 하고 의심할 정도였다. 강을 따라 작은 오솔길, 다리, 숲길 등이 번갈아 이어지는데 나는 발바닥이 아파 빨리 목적지로 가는데만 정신이 쏠려 마음껏 즐기지 못했다. 다행히도 아들은 씩씩하게 걷는다. 이번 가을 제주올레여행에서 우리 아들은 봄 올레여행 때보다 훨씬 마음도 너그러워지고 말도 많이 하는 모습이다. 덕분에 힘은 들어도 마음은 편하다. 아들에게 이런 말을 해주었더니 해죽 웃는다. 왠지 든든하다.
이제 창오교로 광령천을 건너 외도동 마을길로 들어섰다. 여기저기서 개가 짖는다. 어떤 놈은 달려 나와 쫓아오기도 하는데, 이제는 무섭기보다 귀엽기만 하다. 이제 길은 축구장 옆에서 광령천을 다시 만난다. 멀리 아파트촌이 보인다. 도시 인근으로 길이 이어지자 왠지 마음이 놓인다. 그러자 바로 광령천이 바다와 만나는 지점인 외도교를 만난다. 바다와 강이 만나는 지점을 직접 볼 수 있다니 신기했다. 바람에 밀려 큰 파도로 밀고 들어오는 바닷물이 대단했다. 강폭이 넓고 다리 아래로 물살도 거세 바다 위를 건너는 기분이 정말 남달랐다. 이어 내도동 자갈 해안길을 걷는데, 파도가 엄청 치는 통에 해안길까지 바닷물이 흩날리는 것이 가히 장관이었다. 일몰을 앞두고 있는 터라 그 분위기는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제주에서 이렇게 큰 파도를 치는 모습은 처음 봤던 터라 아들과 나는 사진을 찍는데 정신이 없었다. 폭풍이 불고 태풍이라도 몰아치는 날에 이곳이 어떨지 가히 짐작이 되면서 이곳에서 사는 사람들이 참으로 대단해 보였다.
그렇게 파도를 감상하면서 발바닥이 아픈지도 모른 채 걷다 우리는 마침내 이호테우해변에 에 도착했다. 이 해변은 제주시내에서 가장 가까운 해수욕장이라고 한다. 얼핏 들으면 외국지명 같기도 한 이 이름은 이호동과 테우를 합친 것이라 한다. 해변은 거무스름한 모래와 자갈로 덮여 있는데 삼양검은 모래해변과 더불어 모래찜질의 명소라 한다. 해는 이제 거의 져 어둠이 내리치고 있었다. 점점 걸음은 빨라지고 발바닥은 더욱 아파왔다. 어서 목적지가 나왔으면 하던 차에 도두항이 보인다. 횟집과 펜션이 잔뜩 모여 있는 이곳에 마침내 도착해 모나미 게스트하우스라는 곳에 숙소를 정했다. 참으로 오늘은 예정에 없는 여행이었다. 그만큼 힘들었지만 덕분에 시간도 벌 수 있었다. 이제 해물탕으로 배를 채운 아들과 나는 쉬면서 내일을 준비한다. 내일은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기대가 된다. 여행이라는 게 원래 이래야 하는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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