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은실의 '2미터 그리고 48시간'을 읽고
정말 오랜만에 내 블로그에 서평을 싣는다. 책을 읽고 나면 책장을 덮어 버리면 무엇을 읽었는 지도 모르게 잊어 버리곤 해서 기록으로 남겨 두려고 했던 나만의 서평쓰기. 덕분에 한없이 보잘 것 없던 글쓰기 실력이 조금씩 늘고 이곳 저곳에 원고를 쓰게 되고 책까지 펴내면서 내 블로그에 서평을 쓰는 일도 멀어져만 갔다. 지난 20년동안 나는 너무도 바빴다. 바쁜 만큼 얻는 것도 많았지만 놓치는 것도 많았다. 그때는 그걸 잘 몰랐다. 사람이 모든 것을 다 얻을 수는 없으려니 여기며 애써 무시했지만, 많은 걸 놓치는 순간 모든 걸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은 너무도 갑자기 다가왔다. 두려움은 공포가 되고 고통으로 이어져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까지 했다.
아들이 방황을 하고 아내가 아프기 시작했다. 그래서 아들을 어떤 식으로든 위로를 했지만, 진심으로 다가가지 않았다. 아들과 제주도 올레를 한 바퀴 돌았지만, 어쩌면 그것은 아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여행이었다. 도무지 무엇을 해야 할 지도 모르고 자기가 선택한 것에 자신이 없었던 시절의 아들에게 고작 내가 던지는 말은 듣기 좋은 말이나 아들의 가슴에 안기는 말은 아니었다.
"무엇이 걱정이냐, 너를 도와줄 든든한 부모가 있는데. 니가 하고 싶은 것 마음껏 하며 살아."
공황장애에 우울증이 겹치고 갱년기에 불면증까지. 모든 것이 한꺼번에 닥쳐 와 힘들어 하던 아내. 언제나 당당하고 자신의 일을 잘 헤쳐 나가던 아내였기에 나는 이것도 다 이겨내리라 믿고 나는 내 일만 했다. 나를언제나 믿어주고 밀어주던 아내도 결국에는 그동안의 섭섭함과 아쉬움을 쌓아 나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너무도 힘들어 몹쓸 생각조차 했다던 아내의 말을 듣고서 비로소 나는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서럽게 우는 아내에게 마음을 담아 이야기 했다.
"우리 같이 오래 살자, 행복하게 같이 살자, 준우랑 같이 살자, 건강하게 같이 살자."
실은 나도 아팠다. 지난 10년을 앞만 보고 살다보니 나는 이미 많이 지쳐 있었다. 나는 그것을 노화라고만 여기고 웃어 넘겼다. 밖에서 힘들게 지쳐 돌아오면 우울한 아내를 보며 나도 함께 우울했고 이따금 피우던 담배에 손을 대고 끊기를 되풀이 했다. 스트레스는 폭식을 불러왔고 운동부족에 내 몸은 점점 더 망가져 갔다. 그나마 아들의 크고 작은 성공이 위로가 되어 주었지만, 나는 이미 지칠 때로 지쳐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학교로부터 잠시 도망치는 일이었다. 아내는 반대했지만, 어떻게 해서는 학교를 벗어나고 싶었다.
그렇게 반년을 보내니 아들은 다른 또래 친구들보다 일찍 자리를 잡았고 아내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안정을찾아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내 몸은 그제야 아파오기 시작했다. 폭식에 운동부족이던 나는 사무실에서 앉아 일을 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병든 닭처럼 점심시간 뒤로 졸기 시작했고 역류성 식도염에 이따금 몸살을 앓기 시작했다. 뒤 늦게 건강검진을 받고 초음파에 CT까지 찍은 내 몸은 심한 지방간에 동맥경화가 의심스러울 정도의 고지혈증이어서 당장 약처방을 받아야 한다는 진단까지 내려졌다.
교사로 행복하게 살고 싶어 달려왔던 지난 20여년. 나는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왔는지 문득 헷갈리기 시작했다. 며칠 전 강의 원고를 쓰면서 제목에 '공감'과 '삶'을 달아 놓았다. 국어교육의 목적이 타인에 대한 공감이어야 하고 자기 삶을 가꾸는 데 도움을 주는데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정작 내가 내 아들과 아내의 삶에 진정 공감을 하고 있었는지, 그들과 함께 살려는 노력을 얼마나 했는지 반성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 와중에 읽었던 책. 내가 좋아하는 작가 유은실의 청소년문학 장편소설 '2미터 그리고 48시간'. 이 소설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과 이해, 위로를 건네주는 이야기였다.
늘 동화로만 만나던 그의 청소년문학 소설은 처음이라 조금은 낯설었지만, 그의 시선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따뜻한 시선. 그레이브스라는 불치병을 앓고 사는 한 고등학생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고통 속에서도 타인(가족과 주변 친구들)을 배려하려는 한 어린 여자 아이에 치료과정을 생생하게드러내고 있다. 그레이브스라는 불치병의 근본적(?)인 치료는 방사선 치료 밖에 없어 결국에는 시술을 받아야 했던 주인공 정음. 방사선 치료 이후 2미터 간격에 사람이 오지 않게 하고 주변을 깨끗하게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주인공은 길을 걸을 때도 차를 탈 때도 주위 사람들이 피폭 당할까 걱정을 한다. 48시간 동안 이어지는 이런 상황이 때로는 지루하리 만큼 이어지는데.
그 때 독자인 나와 주인공을 반겨주는 이가 등장한다. 그것은 바로 주인공 정음이의 옆 짝 인애. 평소에 늘 함께 했던 친구들은 방사선 치료 이후 멀리했지만, 뜬금없이 나타나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인애의 존재는 독자인 나에게도 적지 않은 위로가 되었다. 그랬다. 우리 아들에게는 친구들과 부모. 우리 아내에게도 친구와 남편의 위로가 필요했을 터. 힘들 때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이들에게 나는 무엇을 했고 그런 위로와 격려가 필요한 이들에게 나는 무엇을 했는지 다시금 돌아보게 하는 소설의 한 지점이었다. 소설 속 인애라는정음이의 친구는 작가 유은실이지 않나 싶었다. 이 소설 끝에 실은 작가의 말 속에서 이러한 사실은 충분히 읽어낼 수 있었다.
놀랍게도 작가 유은실은 지금도 약을 먹고 살아야 하는 주인공 정음이와 똑같은 그레이브스 병을 앓고 있었다. 한창 병을 앓아 병원을 자주 찾을 무렵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한 여학생이 같은 병으로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복도에 앉아 있던 모습을 지켜 보며 언젠가 꼭 이 소설을 쓰고 싶어 했다고 한다. 그렇게 소설을 쓰는 유은실은 소설 속 인애라는 친구를 그렇게 닮아 있었다.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유은실이 작가가 된 계기가 곧그레이브스라는 병이었다고는 하지만, 그는 그렇게 병을 앓고 있는 이들에게 전혀 위로가 되지 못한다는 말로 일갈한다. 병으로 생기는 고통은 차마 이루 말할 수가 없기 때문이란다. 2미터를 사이에 두고 사람을 피해야 하고 48시간을 혼자 스스로 버텨야 하는 그 시간.
아픈 몸으로 살아가야 하는 이들은 그렇게 막막하고 외로울 거라는 것. 유은실은 아서 프랭크의 <아픈 몸을 살다>에서 다음과 같은 말로 고통 속에서 사는 사람들을 표현하고 있다.
"병자, 환자, 피해자, 희생자는 가장 멀리 여행한 사람이자 남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본 사람, 다른 시각과 경험을 가진 사람이 된다.
많은 교사들이 다양한 교육을 이야기 하지만, 타인에 대한 고통과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아이들로 키워내는 교육, 타인을 무시하고 자신이 가진 권력을 행사 하면서 기술적인 요소를 강조하는 교육은 진정 교육이 아니라 생각한다. 점점 세상은 이런 공감력이 부족한 아이들을 키워내고 공감력이 부족한 교사와 관료들이 교육행위를 하고 있다. 나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이 지점을 일찍 깨닫고 살지 않는다면 아마도 학교는 점점 위험하고 고통스러운 곳이 되어 갈 것이다. 문학은 타인에 대한 공감력을 키우는 훌륭한 도구라는 생각이 새삼 느껴지던 유은실의 소설을 읽고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던 날. 내 아들과 아내. 그리고 나와 함께 새롭게 일을 시작할 모임 선생님들을 떠 올려 보았다. 그들에게 위로 받고 살아갈 나와 그들에게 힘이 되어 주고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아야 할 나를 생각해 보았다. 공감은 함께 하는 것이고 함께 하는 것은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다. '공감'과 '삶'은 그래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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