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쌀함을 넘어 냉기를 느꼈던 월요일 아침. 평소보다 10분 일찍 교실로 들어섰는데도
웬일인가 싶을 정도로 아이들이 모두 교실에 들어서 있다. 반갑게 인사를 건넸는데, 여전히
서연이는 본 척 만 척이다. 확실한 건. 부끄러워 한다는 것. 서연이가 감추고 보여주지 않는 것이
많은데, 부끄러워 하는 것만은 오늘 확실히 느꼈다. 평소와 다름 없는 서연이 모습을 보면서
안심을 하고 이번 주 내 관심은 다른 아이로 옮겨보려 했다.
우리반 두 번째 등장인물은 현준이다. 1학년이라고 해도 뭐라 안 할 만큼 키가 작고 조금은 마른 체구에
머리는 까까머리인데다 작기만 하다. 눈은 작고 얼굴에 적지 않은 점들이 박혀 있어 누가 봐도 개구쟁이인
걸 단 번에 알 수 있는 아이다. 현준이를 처음 만난 건 지난 2월 24일이었다. 담임 소개를 조금 이른 날에
하겠다고 불러 모은 그날 아이들 앞에 서기 전 내 눈 앞에 보인 아이가 있었다. 눈에 띌 수밖에 없었던 건,
지난 3년 전 내가 맡았던 도현이라는 아이와 똑 닮았던 탓이다. 대뜸 물었다.
"너 형 있지? 이름이 혹시 도현이 아니니?"
"저요? 형 있어요. 맞아요."
내심 '야, 누가 형제 아니랄까봐. 저렇게 똑 닮을 수가 있지?' 하는 생각이 들며 웃었다.
나중에 그 아이가 내가 맡을 2학년이라는 걸 알고 또 얼마나 웃었는지. 형도 그렇게 공부하는 거 싫어하던
아이였는데. 장난도 심해 새로 단장한 학교 도서실 소파를 칼로 찍 끍어 놓아 교장선생님의 속을 뒤집어
놓았던 아이였는데. 자전거 타기를 좋아하던 아이의 형은 온 동네 자전거 바퀴를 재미삼아 터뜨리고 다니던 아이였는데. 그 형에 그 동생이라니. 아니나 다를까 현준이도 공부를 싫어하는데다 학교를 온통 돌아다니며
자신을 알리는 아이였다며 주위 선생님들이 다들 한 마디씩 조언(?)을 해주던 아이였다. 그런 아이가 나를 만난 뒤, 싹 달라졌다며 교장교감선생님은 다르다며 은근히 날 띄어주기도 했다.
사실 현준이가 1학년 그렇게 선생님 속을 썩이든 장난꾸러기였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요즘 학교 생활도 차분히 하며 나를 즐겁게 해주곤 한다. 책상에 가만히 있지 못했던 아이가 그나마 앉아서 내 말을 들어주는 척이라도 하고 있으니 고맙기까지 하다. 첫날 내게 걸려 뽀뽀 세례를 받았던 게 무언가 나와 관계를 맺는 데 도움을 준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아무튼 수업시간에도 나름 열심히 참여하는 것이 다섯 명 중에 내가 제일 마음에 들어하는 아이로 살아가고 있다.
지난 주 국어 시간에 일기쓰기를 배우고 현준이가 써 온 글은 차마 읽을 수 없는 글이었다. 띄어쓰기는 하나도 되지 않고 맞춤법은 7할이 틀리는 터라 처음부터 한글을 다시 가르쳐야겠다 생각이 드는 아이였다. 하지만 현준이는 글을 잘 읽는 아이들이 갖지 않는 게 하나 있다. 그건 현준만이 표현하는 감성이었다. 자유분방하게 사고를 하고 거침없이 자기 이야기를 한다. 서연이가 여러가지로 복잡한 틀에 갖혀 자기를 드러내기 힘들어하는 반면, 현준이는 남을 의식하지 않고 자기 얘기를 한다. 정답을 요구하는 교과서식 질문에는 약하지만, 그림책을 읽어줄 때나 일상적인 질문을 할 때는 다른 아이들이 쉽게 뱉지 못하는 말을 한다.
그래서 그런지, 다른 아이들이 아직 자기 삶을 이야깃거리로 뽑아내는 데 힘들어하는 반면, 현준이는 내용이 부실하지만 글감들은 상대적으로 잘 뽑아내는 편이다. 지난 주 목요일 일기가 대표적인 사례였다. <수리 부엉이>라는 제목으로 써 온 일기는 꽤 흥미로운 내용이었다. 그런데, 너무 간단하고 단순했다.
"현준아, 수리 부엉이는 어디서 발견한거니?"
"아빠가, 하우스 근처 밭에서 봤대요.'
"그럼, 그 얘기는 왜 빼 먹었어. 적었어야지."
"아버지가 불러서 따라 갔다고? 어디를"
"차 있는 데로요."
"그럼, 차에 부엉이가 있었네. 그 이야기는 왜 빼 먹었어."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됐어? 다음 이야기를 적어 주지 않으니까 궁금하잖아."
"새를 날려 주었다고만 했는데, 새는 어떻게 됐어."
"못 날 던데요."
"왜? 아빠가 부엉이가 오랫동안 움직이지 못해서 못 나는 거래요."
"그럼, 그렇게 말씀해주신 아빠 말씀도 입말로 적었어야지."
"자, 자세히 그 때 있었던 일을 입말도 넣고 적어 봐 줄래?"
이때부터 현준이는 곤란한 표정을 짓는다. 하기 싫다는 뜻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난다.
"그럼, 선물 하나 줄 테니 적어줄래?"
"뭐요? 전에 수수께끼 놀이 책 얇은 거 있었잖아. 그거 줄 게."
"싫어요. 그거 말고 열쇠하고 마술펜 있는 거 주면 안 돼요?"
"그건, 안 돼. 그건 큰 선물이라 쉽게 줄 수가 없어. 다른 아이들도 눈 독을 들이고 있는 거라."
'그럼, 싫어요."
전혀 통하지 않는다. 지난 주 금요일에 협상을 했지만, 끝내 타결되지 못하고
"알았어. 그러면 쓰지 마. 나도 그 선물은 곤란해."
재미있는 얘깃거리여서 꼭 써주길 바랐지만, 현준이는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선생이란
권위로 강제로 밀어 부쳤을 터지만 지금은 그렇게까지 하기 싫었다. 그러는 게 옳지도 않다 싶어서였다.
하지만 여전히 미련이 남았다. 오늘 써 온 현준이 일기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글씨도 엉망이어서
'현준아, 너 오늘 일기 엉망이다 야. 너 오늘 돌봄교실 가지 말고 일기 다시 쓰자."
"오늘 남아서 다시 쓰라고요."
"응, 근데 어제 일기 말고 전에 수리 부엉이 있잖아. 그거 다시 써 줄래."
마지 못한 듯, 알겠다고 하는 얼굴에 대고
"그러면, 대신 네가 갖고 싶어하던 그 선물 줄 테니 자세하게 써 줄래. 글자 틀려도 되니까 걱정하지 말고."
순간 현준이 얼굴이 싹 변하더니 서슴없이 알았다고 한다. 현준이 얼굴에 의욕이 솟아 오른다.
다른 일로 내가 교무실을 다녀 온 뒤에도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던 현준이는 선물을 갖겠다는 일념 하나로 열심히 부지런히 끙끙대며 나름 자세히 일기를 쓰고 있었다. 하도 대견 해 미끼였던 선물을 코 앞에
갖다 주며 나는
"열심히 써 내면 이거 니꺼 된다. 선생님은 약속 지켜."
씩 웃어보이던 현준이는 자랑스럽게
"자 보세요. 정말 많이 적었죠."
현준이가 내민 일기장은 한 장 가득히 내려가고 있었다. 틀린 글자도 한 가득 담긴 채.
그래도 그 때 기억을 되살려 써 보려 애 쓰고 있었다. 그러기를 20여분. 현준이는 자랑스럽게 일기장을 내 앞으로 들고 왔다.
"어디 보자. 야, 잘 썼네. 틀린 글자는 나중에 또 공부하면 되지 뭐. 자, 약속대로 선물!"
선물을 받는 순간, 현준이가 보여준 순수하고 희열에 가득찬 맑은 얼굴은 정말 사진을 찍어 누구에게라도 보여주고 싶을 정도였다. 읽기 편하게 맞춤법만 고쳐 쓴 현준의 일기는 아래와 같다.
이제 현준이가 쓰는 일기는 분명 이전과 다를 것이라 생각한다. 자기 삶이 얼마나 소중하고 다른 이에게 들려줄 이야깃거리가 되는지 조금씩 알게 될 거다. 나는 현준이를 그냥 보내지 않았다.
"선물도 줬으니 선생님한테 뽀뽀해줘야지"
스스럼 없이 다가와 내게 뽀뽀를 해주는 현준이 곁에서 나는 그렇게 하루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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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8일 목요일 날씨: 비가 줄줄
수리 부엉이 | 반곡초등학교 2학년 김현준
오늘은 학교 끝나고 아빠가 데리러 오셨다. 나를 집에 데려다 주고 다시 하우스에 가셨다.
그리고 잠시 후에 아빠가 다시 오셨다. 그런데 아빠가 새를 보여주신다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조용히 아빠 뒤를 따라 갔다. 그런데 아빠 차 안에 새가 있었다. 앞 자리에 있었다. 새한테 소방서 모자를
씌어놨다. 그래서 새 얼굴을 못 보았다. 모자 밑으로 새 발톱이 보였다. 엄청 날카로웠다. 몸도 아주 컸다.
"아빠, 모자를 벗겨도 되요?"
아빠한테 물어보았다. 아빠는 벗겨도 된다고 하셨다. 그래서 모자를 벗겨 보았다.
그런데 눈이 엄청 동그랗다. 아빠가 아빠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다 받고 아빠가 차를 몰았다.
"아빠, 어디 가요?"
하고 나는 물어보았다. 아빠는
"새 키우는 사람이 있는데 거기로 갈 거야."
했다. 그래서 나도 갔다. 아빠 친구집이었다. 아빠는 친구 집에 들어가서 새를 보여주었다.
그 집 아들.형이 새 날개를 쫙 펴서 잡았다. 그 상태로 사진을 찍었다. 나는 저 새 이름이 뭐냐고 아빠에게 물었다.
아빠는
"저 새는 수리 부엉이야."
하셨다. 그 때 아빠 친구는 수리부엉이는 너무 커서 집에서 못 키운다고 하셨다. 그래서 아빠는 살려주어야겠다고 하셨다.
살려주려고 수리부엉이를 날렸는데, 날지 못했다.
"아빠, 왜 못 날아요?"
하고 나는 물었다. 아빠는
"응, 원래 수리 부엉이는 많이 쉬고 잡혀 있으면 잘 못 날아."
하셨다. 그래서 나하고 아빠는 수리부엉이를 잡았던 밭에 그대로 놔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그 수리 부엉이가 자기 집으로 잘 날아갔는지 궁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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