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반 현준이는 하루하루가 늘 즐거워 보인다. 책상에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는 현준이를 동료교사들은 문제아로 본다. 2학년인데 아직 글을 제대로 읽지도 쓰지도 못한다. 교과서 글이 현준이에게는 큰 부담이고 고통이다. 현준이는 문제아이인데다 학력부진아이다. 철 없는 현준이는 주위 어른들의 이런 시선들을 아직은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의식할 나이였던 내가 맡은 3년 전 현준이 형은 그제야 말이 없어지고 자신감이 없는 아이로 교실에서 살았다. 그 시절 경남에서 충남으로 넘어 온 나는 현준이 형의 마음을 이해하고 배려하지 못했다. 동생 못지 않게 말썽꾸러기였던 현준이 형은 그렇게 내 곁을 떠나갔고 지금은 어느새 중학교 3학년이 됐다. 어쩌면 현준이도 3년 뒤에는 형의 뒤를 밟을 지도 모른다. 학교 부적응아로 초등학교를 졸업할 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게 과연 현준이의 문제인가?
오늘 현준이는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힘들어하는 모습을 내게 보여주기 시작했다. 국어는 시간이 해결해 줄 수 있을 거라 일 년 내내 내가 보살피리라 마음을 먹어서 그런지 여유를 보였는데, 수학은 쉽게 넘기기가 힘들었다. 100이라는 숫자와 관련된 단원을 공부하는데 조작활동을 수십 번 해도 현준이는 띄어세기를 하지 못한다. 금새 이해하는 듯 해도 조작물만 없애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오기를 십여 차례를 반복하자 나도 무척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아이도 점점 자신이 없어지는 것이 그렇게 활개치며 다니던 녀석이 조금씩 내 눈치를 보기 시작한다. 그게 보기 싫어서
"현준아, 자꾸 선생님 눈치 보지 말고 지금 앞에 있는 문제만 생각해."
하며 잔소리를 했더니 현준이는 더 기어가는 목소리로 수를 읽는다. 아, 내 꼴도 이게 뭔지 모르겠다. 어느 정도 짐작했던 벽에 부딪히자 나는 너무도 쉽게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지난해 왕규식선생님의 수학 강의에서 들었던 내용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게 있다. 초등학교 3학년까지는 아이들에게 굳이 수학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을 괴롭히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이었다. 대안교육에서 아이들과 수학으로 씨름하며 터득한 그분의 경험담이었다. 고통스럽게 힘들게 공부한 내용을 4학년 나이가 되자 아이들은 의외로 쉽게 지난 교육과정을 이해하고 수학과 친해지더라는 것. 현준이도 충분히 4학년이 되면 100이라는 숫자를 경험으로 알게 되고 띄어세기도 쉽게 익힐 텐데, 각기 다른 모든 아이들이 똑 같이 똑 같은 나이에 똑 같은 교육내용을 공부하게 한다는 것은 이것은 일종의 폭력이 아닐까. 나는 현준이에게 폭력의 하수인으로 오늘 충분한 역할을 했음이 분명했다.
되풀이 하고 되풀이 한 결과, 현준이는 겨우 겨우 이해했다. 하지만 여전히 불안해 보인다. 현준이에게 미안해 안아 주었다. 이 녀석도 쉽게 안긴다. 분위기가 험악해져 뭔가 전환이 필요할 듯 해 현준이 볼에 대고 내 수염을 비벼주었다. 따갑다고 난리다. 웃는다. 그래 이렇게 웃으며 살 수 있는 걸. 이놈의 공교육, 그 공교육에서 선생이랍시고 아이들 앞에서 군림하는 나는 정말 위선자일까. 앞으로 현준이와 같이 지낼 일이 조금 걱정이다. 선생인 내가 나를 믿지 못하겠으니.
얼마 전 다 읽은 <심리학은 아이들 편인가?>에 담긴 수 많은 주옥같은 문장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우리는 이러한 생명 덩어리를 전체로서 보면서 발달이 아니라 생의 변화로 새롭게 보고, 어느 시기에도 생명을 둘도 없는 것으로서 정의하는 가치의 반전을 이루지 않으면 안된다."
현준이와 같은 아이들에게 이미 규정한 발달단계에 충족해야 할 교육과정을 강제하고는 서열을 매기고 나누고 분리하고 배제하는 작업을 하는 학교교육. 이를 거부하고 모든 아이들을 하나의 생명체로 존중하고 그들이 변화를 기다려 줄 줄 아는 진정한 교육과 그러한 가치 반전은 아마도 오랫동안 우리 곁에 다가오지 않을 것 같다. 지난해 우리 벗회지를 달구었던 '교육불가능'이 오늘만큼은 새삼 크게 다가온다.
그래도 나는 내일도 모레도 현준이를 만날 것이다. 그 때 나는 현준이를 문제아가 아닌 학습부진아가 아닌 소중한 생명으로 만날 것이다. 현준이의 변화와 성장을 존중하려 노력할 것이다. 이것이 내가 현준이에게 해 줄 수 있는 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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