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와 공감을 지나 ‘맞서 싸우는 희망’으로
2012년 3월. 미국은 후드티를 입은 17살 흑인 소년 마틴 트레이본 총격사건으로 큰 홍역을 치른다. 소년을 살해한 백인청년 짐버맨이 정당방위를 포괄적으로 인정해 가해자를 보호하는 ‘스탠드 유어 그라운드’법에 의거 무죄로 풀려났기 때문이다. 뿌리 깊은 인종차별의 그늘이 남아있는 미국사회에서 벌어진 이 사건은 흑인들의 대규모 시위를 이끌어낸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오바마 대통령까지 일부 공화당 의원의 비난에도 사건에 관한 공정한 수사를 촉구하기에 이르는데, 이후 새롭게 드러나고 밝혀진 정황에 따라 수사의 방향은 진실에 더욱 가까워졌다.《검은 후드티 소년》은 바로 이러한 사건을 바탕으로 작가 이병승이 창작해낸 동화이다.
처음에 이 책을 받아들었을 때에는 미국사회의 인종갈등을 소재로 한 동화를 한국작가가 썼다는 선입견 때문인지 쉬이 책장을 펴기가 어려웠다. 그럼에도 책상 위에 올려놓았던 이 책을 다시 펴든 까닭은 쌍용자동차 사태를 소재로 지난해 《여우의 화원》이라는 동화를 펴내 큰 감동을 주었던 작가 이병승에 대한 따뜻한 기억 때문이었다. 기대했던 대로 책을 읽기 시작한 지 채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그의 이야기에 흠뻑 빠져들었다. 이쯤 되자 픽션의 일부를 끌어온 이 동화가 사실을 얼마나 담아내고 있느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작가의 세계관과 창작 의도, 그리고 이어질 뒷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가 그저 궁금할 뿐.
《검은 후드티 소년》은 흑인소년의 가슴 아픈 죽음을 매개로 그를 둘러싼 새로운 인물을 등장시켜 인종차별만이 아닌 또 다른 차별과 편견에 관한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꺼내 놓는다. 작가는 한국계 입양아 ‘제이’를 통해 사회적 약자로 살아야 하는 해외 입양아들의 처지와 고통을 전해준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한 사회의 차별과 편견이 어느 한쪽에 치우쳐 있지 않음을 알게 된다. 한편으로는 ‘제이’의 눈을 통해 실존인물인 ‘마틴’의 실제 삶을 그대로 전해줌으로써 이 책의 모티브가 돼 준 마틴 사건의 본질을 잃지 않도록 독자들을 단단히 붙잡아 놓는다.
이 동화는 부당한 ‘차별’과 그에 따른 무조건적인 ‘폭력’에서 벗어나 등장인물 모두가 화해하고 웃으며 새로운 희망을 찾아 나간다는 아름다운 결말로 끝을 맺는다. 그러나 잔뜩 긴장하며 읽던 나는 이야기 끝이 한순간 전형적인 할리우드 가족영화로 변해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순간 아쉽기도 했다. 돌이켜 보니 마틴이 제이에게 한 말, ‘모두가 어울려 사이좋게 지내야 해.’와 마틴의 폭력에 대한 철저한 무저항이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다가와 때대로 수긍하기 어려웠던 기억도 떠올랐다. 자칫 아이와 어른 모두가 이 책이 사실이 아니라, 그저 책 속에서나 가능한 이야기라는 생각을 갖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마저 들 정도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우려는 이 동화를 행복한 결말로 끝나는 화해의 과정으로만 받아들였던 내 탓이 컸다.
나는 다시 이 책을 읽으면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점에 주목할 수 있었다. 그것은 ‘차별에 대한 이해와 공감’도 ‘화해로 마무리한 낭만적 희망’도 아니었다. 그것은 ‘제이’가 끝까지 사건 해결을 위해 나서는 불같은 ‘저항’과 동화 속 어른들에게서 찾아보기 힘들었던 부당함에 대한 ‘불복종’이었다. 이는 제이의 생각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건 뭔가 잘못됐어! 마틴을 살해한 범인은 체포되어 벌을 받아야만 해! 그런데 무혐의로 풀려나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 마틴의 죽음 뒤에 여러 이유를 들어 부당한 수사결과에도 모두들 입을 다물고 있을 때, 과감하게 용기를 내어 나선 이들은 어른이 아닌 바로 동화 속 아이들이었다. 제이의 친구 니콜뿐만이 아니라, 늘 이들을 괴롭히던 백인아이 하비가 한데 뭉쳐 어른들이 만든 차별과 편견의 세계에 단호히 저항하는 모습은 어설픈 화해가 아닌 강렬한 저항이자 불복종이었다.
동화이기에 아이들이 어른들이 해야 할 몫을 대신하는 그림이 그려졌지만, 그럼에도 이 그림은 분명 화해가 아닌 문제해결의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이 땅에서도 차별과 편견은 오랫동안 존재해 왔다. 인종뿐만 아니라 학벌과 외모, 경제적 배경으로 사람을 차별하고 편견을 갖게 하는 부당한 사회구조는 오늘도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따라서 공감과 이해라는 교훈과 교육만으로 오랫동안 차별을 받아온 이들과 차별받는 이들에게 감히 화해의 손을 내미는 것은 쉽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다. 그들과 함께 살 수 있는 방법은 어설픈 화해가 아닌 문제를 해결하는 길에 함께 나서는 연대와 실천이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이 동화에서 단순히 ‘차별하지 말자!’가 아니라 부당함에 맞서 싸우는 용기와 연대의 메시지를 읽어내길 바란다. 현실화된 미국의 백만 후디스 운동이 보여준 힘을 읽어내길 바란다. 내게 《검은 후드티 소년》은 분명 동화지만, 막연한 희망을 꿈꾸는 게 아닌 당당히 ‘맞서 싸우는 희망’의 가능성을 뚜렷이 보여주었다.
“마틴 형, 얼마나 더 오래 기다려야 할까? 얼마나 오래 참아야 차별 없는 정의로운 세상이 올까?”
“그런 모르지. 하지만 세상은 변할 거야. 아주 천천히.”_ 에필로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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