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격월간 《오늘의 교육》 2012년 7 ․ 8월호
두 얼굴을 가진 친절한 심리학 씨 이야기
《심리학은 아이들 편인가》, 오자와 마키코 씀, 박동섭 옮김, 서현사
박진환 충남 반곡초 k950108@hanmail.net
마치 새내기 교사가 된 것마냥 2학년 아이들 다섯 명 곁에서 설레는 마음으로 하루를 산다. 아이들 곁을 잠시 떠났던 지난해에는 그렇게 읽지 않던 책을 다시 읽고, 그렇게 쓰기 싫어하던 글을 새롭게 써 보고 있다. 아이들이 내게는 보약이다.
준서는 이상한 아이일까?
“선생님, 이거 잘 모르겠어요.”
나머지 공부를 하는 2학년 우리 반 준서(가명)가 수학 문제를 들고 왔다. 7월로 들어가는 이 시점까지도 준서는 크게 나아진 게 없다. 여전히 읽기, 쓰기, 셈하기 3종 세트를 힘들게 해내고 있다. 무더운 날씨 탓인지 살짝 짜증까지 나던 그날, 끙끙대며 1학년 수학 문제를 풀어내는 준서를 대하는 내 얼굴은 점점 굳어 갔다.
“뭔데? 음, 준서야. 이거 며칠 전에 했던 거야. 잘 봐봐.”
“…….”
“숫자가 어떻게 이어지는지 잘 봐봐. 빈 곳에 들어갈 수가 어떤 건지 생각해 보고. 뭔가 규칙이 보이지 않니? 2, 4, … , 10, …. 이어지는 숫자들을 보면 뭔가 느낌이 오지 않아? 잘 생각해 봐.”
재촉하듯 빠르게 말을 내뱉는 나를 본 준서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그런데 준서의 대답이 들리지 않는다. 입을 열어 말하지 않는 버릇까지 있어 쉽게 알아듣기 힘들다. 반대로 내 목소리는 점점 커져만 갔다. 몇 번이나 되물은 끝에 준서 입에서 얻은 답은 “숫자가 하나씩 없어요”였다. 순간 나는 멈칫했다. 잠시 동안 멍하니 수학 문제만 뚫어지게 봤다.
“아! 맞다 맞아. 그것도 맞는 말이네. 맞다 준서야. 준서가 말한 것도 틀리지 않았어.”
딱딱하게 굳어 있던 내 얼굴이 갑자기 환히 웃는 얼굴로 바뀌자 준서의 입가에도 웃음기가 돌았다. 지난 4개월 동안 함께 지내면서 준서가 배우는 속도가 조금 느리고(매우 상대적이지만), 사물을 보는 눈이 남다르다(그림책을 보면 다른 아이들이 발견하지 못하는 지점에서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낸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나는 곧잘 이런 사실을 잊고 수업을 할 때 준서를 자주 다그치곤 했다. 그렇게 이번에도 하나의 답만을 기대하는 모자란 나를 준서가 따끔하게 혼을 내 주었던 것이다.
“맞아, 준서야. 그런데 여기서는 숫자와 숫자 사이에 규칙적으로 빠진 수를 채워 넣어야 해. 이곳에 빠진 수는 뭔지, 이어질 수는 또 뭔지 잘 생각해 봐.”
잠시 뜸을 들인 준서는 문제에 맞는 답을 찾아내고는 만족한 듯 곧장 제자리로 돌아갔다.
올해 내가 맡은 아이들은 다섯이다. 이 가운데 학습 부진아로 분류된 아이가 둘이고 그중 하나가 준서다. 그래도 한 아이는 조금씩 나아지는 기색이 보이는데 준서 녀석은 도무지 요지부동이다. 빈농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제대로 보살핌도 받지 못하고 자란 터라 준서는 그야말로 자연 그대로의 아이, ‘날것’ 그 자체였다. 준서가 우리 학교에 입학한 뒤 펼친 활약(?)은 참으로 대단했다고 전해진다. 자기 체구만큼이나 작은 학교를 날고뛰며 친구들과 선생님을 힘들게 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말싸움도 잦고 장난도 잘 치는 준서는 교사들이 보기에 문제가 많은 아이였다.
얼마 전에는 학교폭력 예방을 위해 교과부의 강제로 모든 아이들이 ‘아동 정서 · 행동발달 선별검사’를 받아야 했다. 준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졸속적으로 급히 시행된 질 낮은 1차 검사에서 결국 준서는 ‘관심’ 대상에 올랐다. 검사 항목을 직접 점검한 부모의 눈에도 준서는 교정 대상이고 학교에 적응을 하지 못하는 아이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담임인 내 눈에는 그저 ‘나는 개구쟁이야!’라고 쓰인 귀여운 얼굴을 가지고 있는 아이일 뿐이다. 조금만 기다려 주고 배려해 주면 걱정 없이 자기 길을 갈 수 있는 아이다. 누가 함부로 준서를 비정상이라 말하는가? 발달이 늦다며 준서를 비정상이라고 보는 어른과 학교에 오히려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준서에게 불리한 학교
《아이들은 왜 실패하는가》의 저자 존 홀트는 실패에 대한 원인을 아이들의 깊고 깊은 두려움에서 찾고 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학교에서 실패자로 낙인 찍혀 살아가야 하는 공포감이 배움으로부터 아이들을 달아나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배워야 할 것이 있고 학교만이 그것을 가르칠 수 있다는 오랜 신념이 깨지지 않는 이상, 아이들은 결코 배우지 않을 것이라 그는 단언한다.
지금 준서는 학교에 들어오기 전에는 겪지 못한 실패를 날마다 경험하며 살고 있다. 늘 밝고 당당하던 아이가 수업 시간만 되면 전혀 다른 아이로 변하는 모습에서 나는 날마다 실패하는 준서의 모습을 읽는다. 학교는 지금껏 준서가 살아왔던 세계와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이 넘쳐 나는 곳이다. 배우기 싫은 것을 배워야 하고 그렇다고 배우고 싶은 것도 얼마 없는 학교에서 준서는 알게 모르게 조금씩 자신감을 잃어 가고 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심리학은 아이들 편인가?》는 이런 나의 의문과 딜레마를 단번에 날려 주었다. 일본의 심리학자인 오자와 마키코가 쓴 이 책은 출간 후 1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우리 사회와 학교를 해석하고 반영하는 데 전혀 무리가 없다. 이 책에서 오자와 선생은 크게 두 가지 점에서 심리학과 교육의 관계에 대해 매우 강한 의심을 드러낸다. 이는 기존 주류 심리학에 대한 일종의 경고이기도 하다. 그가 제기하는 첫 번째 의심은 “심리 테스트는 아이의 발달이나 내면 측정에 목표를 두는데 그것이 결과적으로 아이를 예컨대 정상/비정상, 건강/장애, 그리고 우등/열등 등으로 나누어 차별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1960년대 후반, 급속한 경제성장을 향해 앞으로만 내달았던 일본 사회는 학교 교육과정에 손을 대기 시작한다. 교육 내용은 크게 어려워졌고 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아이들이 빠르게 늘어났다. 이들을 학급에서 선별하여 다른 학급으로 이동시키는 상황도 자주 일어났다. 학교는 학부모를 설득해야 했고, 이에 따라 지능검사와 전문성 있는 심리 상담사가 더욱 필요해졌다. 자연스럽게 일본은 심리학과 관계된 일이 점차 늘어나 공교육 내 상담 기관의 일자리가 부쩍 늘어났다. 그러나 아이들은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학교를 떠나는 아이들이 늘어 가기만 했다.
심리학은 아이들의 내면을 치유하기보다 오히려 신자유주의가 내세우는 경쟁의 논리를 정당화해 주었다. 과학이라는 중립의 가면을 쓴 심리학의 개입으로 학교가 다루는 기호는 학부모와 교사들에게 전혀 의심을 받지 않았을 뿐더러 합법적인 지위까지 얻었다. 심리학은 학교의 입장에서 아이들의 능력을 구분 짓고 차별하는 데 기여할 뿐이었다. 결국 학교는 기호를 잘 다루는, 이른바 공부 잘하는 문화에 익숙한 아이들에게 더욱 더 유리한 곳이 돼 갔다.
준서는 안타깝게도 차별과 배제라는 근대의 역사를 지닌 학교에서 오랫동안 실패자로 살아가야 할 운명에 놓인 셈이다. 그리고 준서와 비슷한 운명에 놓인 많은 아이들이 오늘도 학교에 적응하지 못한 채 순응하거나 체념하며 살아가고 있다. 어떤 아이들은 새로운 길을 찾아 탈출을 꿈꾸기도 할 것이다. 전자의 아이들은 부적응아, 부진아, 특수아라는 낙인이 찍혀 학교를 다니고 있을 것이고, 후자의 아이들은 자퇴, 퇴학, 등교 거부의 길로 학교를 벗어나려 하고 있을 것이다. 이는 준서를 비롯한 이 땅의 많은 아이들이 다니고 있는 학교라는 공간이 결코 준서와 같은 아이들에게 유리한 공간이 아님을 보여 준다.
자기 세계에선 통용되던 준서의 능력은 학교에선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학교의 오래된 신념과 ‘지능검사’, 그리고 각종 ‘평가’에 묶여 제 힘을 잃어 가고 있다. 지능을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 기호를 조작하는 사고의 움직임을 측정하는 것이라 여겼던 심리학자 타일러에 따르면 준서는 분명 학교에서 사용하는 기호에 전혀 적응하지 못하는 ‘능력이 부족한 아이’이다. 수학 문제를 푸는 동안 각종 계산과 기호에 빨리 적응하지 못해 늘 시간에 쫓기며, 지금까지도 한글을 제대로 읽지도 쓰지도 못하니 말이다. 그러나 이 모든 걸 준서 개인의 능력 부족으로만, 가정의 문제로만 설명해도 되는 것일까? 외부의 문제를 그저 환경적인 요인으로만 치부해도 되는 것일까? 심리학은 이런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준서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교사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대학을 다니던 시절, 내게 심리학은 학점을 따기 위한 이수 과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교사가 된 뒤 교육심리학은 내게 새롭게 다가왔다. 교실에서 아이들과 부딪히며 살아야 하는 교사라면 심리학은 늘 가까이 해야 할 학문이었다. 딴에는 몇몇 교육심리학 관련 서적을 열심히 보고 익히면 큰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거라 한동안 생각한 적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공부한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오히려 심리학을 가까이 하면 할수록 아이들의 문제는 그들의 내면보단 구조적인 사회 모순과 가정 문제가 만들어 낸 화학작용이라는 확신만 강해졌다. 그러나 심리학의 유혹을 쉽게 떨칠 순 없었다. 경력이 쌓일수록 아이들 곁에서 사는 일이 점점 어렵게 느껴졌다. 마치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점술의 유혹에 빠져드는 사람들처럼 나 역시 그랬다.
주변의 교사들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답답함과 안타까움에 마치 신흥 종교에 귀의하듯 심리학으로 빠져들었다. 10여 년 전부터 교육대학원마다 상담심리학과가 개설되고 자격증까지 부여하기 시작하면서는 더 많은 교사들이 심리학을 쫓아 줄을 서고 있다. 대학원뿐만이 아니다. 교사 대상 연수에서도 상담 심리 연수는 고액이라는 부담이 있음에도 여전히 큰 호응을 얻고 있다. 하지만 늘 거기까지였다. 이전보다 많은 교사들이 상담 연수를 받고 있고 석 · 박사 출신의 상담 전문가들이 학교에 포진해 있지만 아이들은 조금도 달라진 게 없다. 자격을 갖춘 학부모들이 봉사 활동까지 나서며 심리상담사 역할을 자처했지만 해마다 같은 병(?)을 앓는 아이들은 늘어만 갔다.
오자와의 두 번째 의심은 이러한 학교와 심리학의 관계로 향한다. 그는 “심리 치료는 여러 증상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만, 문제의 ‘사회적 측면’을 경시하고 그 문제를 개인의 내면 문제로 환원시켜 버리는 경향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 즉, 심리학이 사회가 낳은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전가시키는 오류를 범하는 것은 아닐까?”라며 심리학의 역할에 대해 바닥 깊은 의문을 던진다. 오자와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칼 로저스로 대표되는 비지시적 상담에서 발생하는 권력관계에 불편을 표한다. 그가 보기에 상담은 상담자와 내담자, 그것을 지켜보는 제삼자조차도 자각하기 힘든 그 자체가 지닌 구조적 결함이 있다. 바로 상담자의 유일한 관심은 내담자의 감정에 관한 것이지 그 사람이 처한 상황 전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상담이 중립적이고 인간적일 거라는 생각은 환상에 불과하다.
일본에서도 최근 20년 이상에 걸쳐 등교를 거부하는 아이들이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오자와 선생은 등교 거부를 만들어 내는 ‘학교’ 그 자체는 전혀 바뀌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상담이 가진 기능의 본질을 알 수 있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최근 학교폭력에 대처하는 교과부와 학교의 태도도 그가 주장하는 상담의 기능과 꼭 닮아 있다. 도대체 문제의 원인을 감추고서 상담으로 우리 아이들을 구원할 수 있다 자신하는 그들의 믿음의 근거는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일까?
진단 - 상담 - 치료로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 속에 ‘문제 학교’는 ‘문제아’ 뒤에 숨어 버린다. ‘폭력 학교’는 사라진 채 ‘학교폭력’만 강조하는 지금의 프레임이 상담의 영역에도 고스란히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가해 학생 강력 처벌과 일진회 색출 등 온갖 요란스런 정책으로 폭력의 숙주인 학교의 실체를 감추듯, 학생들의 정신 건강을 위협하는 진짜 실체인 학교에 메스를 들이대지 않고 학생들의 정신 상태를 문제 삼고 있다. 이야말로 더욱 내밀한 폭력 아닌가? 자신이 느끼는 분노와 우울의 원인을 직시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자기 내면과 사투를 벌여야 한다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가?
- 한낱, 〈은밀한 폭력〉, 《오늘의 교육》 2012년 5 · 6월호, 16쪽
내담자인 학생이 부모와 교사, 친구들과 맺고 있는 현실의 관계는 그대로 둔 채 단지 상담을 통해 그를 바꾸어 낼 수 있다 하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사회와 학교가 제공한 문제는 그대로 있는데 상담을 통해 학생 스스로 분노와 우울을 조절할 수 있다는 심리 치료의 효과를 받아들이기도 쉬운 일이 아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한 번쯤 심리학의 역할에 대해 의문을 가질 만도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심리학에 희망을 걸곤 한다. 학교마다 어서 전문 심리상담사를 배치해 흔들리는 아이들을 돕고 교사들의 짐을 덜어 주라고 요구한다. 문제의 본질은 외면한 채 말이다.
《마음을 상품화하는 사회》, 《마음의 전문가는 필요 없다》라는 두 권의 책은 아직 한국에 소개되지 않은 오자와 마키코의 또 다른 저서다. 이 책을 읽지는 못했지만 《심리학은 아이들 편인가?》에는 이 두 권의 책 제목에 담긴 저자의 생각들이 오롯이 담겨 있다. 그는 심리학이 사람이 사람을 효율적으로 쉽게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꿀 수 있다는 조작 기법을 제공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심리학으로 빠져들게 했다고 일갈한다. 그로 인해 마음은 상품화되었고 마음의 전문가의 등장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박한 관계는 더욱 단절되었다는 것이다. 오자와 선생은 이처럼 사람이 사람과 자연의 관계 속에서 변화해 가는 당연한 과정을 소멸시켜 버린 근대 사상과 궤적을 같이한 심리학을 의심하고 또 의심한다. 마음마저 상품화해 돈으로 사람 사이의 관계를 회복해야만 하는 시대에 심리학이 철저히 복무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심리학의 역할은 마음의 전문가가 아닌 문제의 주체들이 자신들의 상처와 고통을 함께 나누며 관계 회복을 해 나가는 자연스런 변화를 이끄는 데 있다.
오자와 선생은 오늘날 사람들의 관계를 누가, 어떤 의도로 끊어 놓고 있는지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고 말한다. 구조의 문제를 개인의 탓으로 돌려 책임지우는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이해 없이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자연스러운 관계 회복은 요원하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 어른들이 준서와 같은 아이들에게 더 이상 책임을 물을 수도, 물어서도 안 된다는 얘기이다.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세계에 제 멋대로 아이들을 가두어 놓고는 선별하고 배제하고 차별하고 치유하는 폭력과 부당함을 거두어 내야 한다. 그렇게 준서가 자기 삶의 리듬에 맞게 성장할 수 있다면 준서와 교사인 나 사이에 더 이상 마음의 전문가는 필요 없을 것이다. 그저 준서와 어른인 내가 만들어 가야 할 소박한 관계 맺기와 이야기들만이 필요할 뿐.
심리학은 아이들 편에 서야
《마서즈 비니어드 섬 사람들은 수화로 말한다》의 저자 노라 엘렌 그로스는 “장애는 사회문화적으로 만들어지는 하나의 사회적인 가공 구조”라고 했다. 그렇다면 준서를 비롯해 지금까지 내가 만나 온 학습 부진아들은 경쟁이 곧 ‘선善’임을 앞세웠던 사회적인 가공 구조의 산물인 셈이다(역자 박동섭은 이를 ‘디자인된 사회’라 규정하기도 했다). 각기 다른 속도로 성장을 하는 아이들이 학교의 교육 내용을 받아들이지 못했을 때, 우리는 지금껏 그 책임을 모두 아이들의 부족한 지능과 부모의 경제력으로 돌렸다. ‘복지’와 ‘돌봄’, ‘약자 배려’라는 허울 좋은 정책을 위해 각종 심리검사와 상담이라는 도구로 아이들을 걸러 낼 때도 학교와 국가는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았다. 오히려 ‘수준별 교육’이라는 화려한 포장지를 덧씌워 학교와 국가가 약한 아이들을 위해 얼마나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 보여 주려 했을 뿐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그들의 위선은 오늘날 배움으로부터 도주하고 학교로부터 탈출하려는 아이들을 통해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다. 학교의 위기다. 그렇지만 이는 한 배를 탔던 심리학의 위기이기도 하다. 심리학자 비고츠키는 이를 오래 전에 간파하고 경고했다. 이 책의 역자 박동섭은 자신의 책에서 비고츠키의 말을 빌려 심리학의 위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비고츠키는 “개인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개인을 넘어설 필요가 있다”고 역설적으로 주장하였다. (……) 개인에게만 초점을 맞추어 모든 것을 설명하려고 하였던 당대 주류 심리학의 관점을 정면으로 맞서면서 그러한 관점을 심리학의 위기Crisis in Psychology로 규정한 비고츠키…….
- 박동섭, 《불협화음론자 비고츠키 그 첫 번째 이야기》, 27쪽
개체 혹은 개인의 머릿속에만 관심을 갖는 전통적인 주류 인지심리학에 반기를 들며, 인간의 마음 형성 혹은 행위에 있어서 상황과 만남, 그리고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한 새로운 심리학New Psychology을 창시한 러시아의 심리학자 비고츠키는 인간의 정신적 기능mental functioning 혹은 마음mind이 단독으로 완결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역사적 · 제도적 · 문화적 상황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으면서 구성되어 가는가를 밝히려고 하였다.
-위의 책, 59쪽
사람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구조와 시대 흐름, 국가가 추구하는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우리 아이들도 시대의 모순과 사회의 모순을 그대로 떠안고 순간순간을 살아가야 한다. 이런 그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감히 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 이런 그들에게 어떻게 치유라는 말을 함부로 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오늘날 우리 아이들은 ‘학교폭력’이라는 새롭게 만들어진 시공時空 아래 또다시 죄인이 되고 있다.
학교와 심리학은 오늘날까지도 ‘발달’을 바람직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여전히 하비거스트와 피아제의 인간 발달 단계 도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학교와 심리학은 아이들을 둘러싼 외부를 하나의 환경요소로만 여길 뿐, 아이들의 능력과 문제는 오로지 아이들 내부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신념을 버리지 않고 있다. 이들에게는 비고츠키의 표현을 빌리자면 ‘영원’을 사는 아이들만이 있을 뿐이다. 이들은 ‘일정한 환경과 실험실에서 얻은’ 아이들로 순간순간을 사는 역사적인 아이들을 분류하고 분석하려 한다. 하지만 본디 아이들은 자기를 둘러싼 바깥 세계와 끊임없이 소통하고 상호작용을 하며 살아간다.
아이들은 공장에서 찍어 낸 물건이 아니다. 물건처럼 값을 매길 수도 없다. 오직 심리학과 학교만이 아이들에게 값을 매긴다. 발달이 늦거나 빠른 아이. 공부를 못하는 아이와 잘하는 아이, 능력이 많은 아이와 그렇지 못한 아이로 말이다. 오자와 선생은 이를 “값 매김을 당하는 성장”이라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사람의 일생에 함부로 잣대를 대어 차별하는 일에 가슴 아파한다. 이는 살아 있는 생명체에 대한 일종의 위협이고 협박이기 때문이다. 생명체에 값을 매기는 사상들을 거두어 내고 어떤 형태로든 사람을 차별하는 사회를 막지 않고서는 스스로 자유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을 우리는 결코 그릴 수 없다.
현대의 아동심리학이 추구해야 할 과제는 다름 아닌 ‘영원한 아이Eternal Child’가 아니라 ‘역사적인 아이Historical Child’, 혹은 괴테의 시를 빌려서 말해 보면, ‘순간순간을 사는 아이Transitory Child’를 밝히는 것이다. - 비고츠키
- 위의 책, 173쪽
오자와 선생의 비판은 지금도 여전히 완고하게 교사들과 부모들의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는 행동주의적 관점, 즉 ‘어떠한 방식으로 가르치면 학생들은 이렇게 변화할 것’이라는 생각에 제동을 거는 시도이기도 하다. 나아가 그는 이러한 심리학적 관점이 신자유주의를 만나 우리의 사고와 행동을 어떻게 제약하고 있는가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해 볼 것을 요구한다. 이는 우리 사회에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식의 어설픈 위안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기를 바라는 뜻이기도 하다.
오자와 선생은 이 책에서 심리학을 필요 없는 학문이라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심리학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역할과 가능성을 진지하게 성찰해 아이들에게 봉사하는 학문으로 거듭나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전통적인 심리학에 매몰되지 않고 폭넓은 학문 간의 교류와 연구, 다방면의 실천을 통해 단단히 닫아 놓았던 학문 간 경계를 허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심리학이 단순히 개인의 문제에만 천착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사회를 두루 살펴보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여기에는 ‘사람’이 무엇이고 ‘교육’은 무엇이며, 또 ‘아이들’은 어떤 존재인지 심리학이 진지하게 되물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진화론의 창시자 다윈은 ‘미리 예정되어 있는 것을 펼쳐 보인다’는 뜻의 그리스어 ‘evolvere’에서 파생한 ‘evolution’이란 용어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지만, 《종의 기원》이 판을 거듭하자 결국 이 용어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일기에는 이 세상의 온갖 생명체를 논할 때 “나는 결코 어느 것이 하등하거나 고등하다고 쓰지 않겠다”는 다짐이 적혀 있다고 한다. 인간의 지능이라는 잣대로 다른 동물의 능력을 비교할 수 없다는 다윈의 철학은 인간을 차별하고 배제하고 짓밟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매우 큰 가르침을 준다. 아울러 생명에 대한 존중과 그 가치를 깨닫지 않고서는 학교와 심리학은 단 한 발짝도 더 나아갈 수 없다. 이것은 이 책을 관통하는 저자의 가장 중요한 주장이기도 하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오자와 선생은 단지 주류 심리학과 학교의 모순을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심리학이 왜 사람들의 삶,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세상과 호흡해야 하고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왜 권력의 편이 아니라 아이들 편에 서야 하는지, 심리학자와 교사, 그리고 부모가 이 사회와 아이들에게 어떻게 봉사해야 하는지를 아주 쉽고 뚜렷하게 보여 준다. 덕분에 나는 한동안 준서와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딜레마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었다. 내일 또다시 만날 준서를 반갑게 맞을 용기를 얻기도 했다. 끝으로 내게 큰 울림을 준 보석 같은 한 구절을 이곳에 옮겨 놓는 것으로 변변찮은 나의 책 이야기를 매듭짓고자 한다.
쾌적하고 편리한 삶을 살고 싶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지능과 학력의 비인간적인 양상만은 바꾸고 싶다는 논의는 모순이다. 비인간화된 지능의 양상을 부정하고, 살아 숨 쉬는 지知의 지평을 목표로 할 때 우리는 지능과 교육 그 자체뿐만 아니라 그러한 지의 뒷받침을 통해서 비로소 성립하는 현대의 기계 문명을 새롭게 묻는 작업으로 함께 향하지 않으면 안 된다.
- 본문 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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