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환의 글쓰기 삶쓰기/각종 서평 원고

초등교육과정연구모임의 <교과서 믿지 마라> 서평 _ <오늘의 교육> 2011. 5-6월호

갈돕선생 2013. 5. 30. 16:19

 

 

리뷰/ 격월간 <오늘의 교육> 2011. 5-6월호

 

아이들이 없는 교과서, 아이들과 상관없는 교과서

《교과서를 믿지 마라!》 초등교육과정연구모임 지음, 바다출판사

 

박진환

 

지금껏 학교를 다녔던 많은 사람들은 ‘달면 먹고 쓰면 뱉는’식으로 교과서를 대해 왔다. 교과서로 이득을 보는 이들에게는 그야말로 보약이었지만, 이득을 보지 못한 이들에게는 효용도 없이 쓰디 쓴 약일뿐이었다. 교과서라는 약을 소화해 내지 못하는 것은 전적으로 구매자인 학생의 능력부족 탓이었지, 약을 만들어낸 생산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였다. 효과도 없는 약을 꾸역꾸역 먹어가며 언제나 자신을 시험해야 했던 학생은 교과서라는 권력 앞에 늘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교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교과서를 감히 의심하려 들지 않았다. 교과서를 문제 삼으려 하는 순간, 해당 교사는 사상이 불온하거나 사고가 부정적인 사람으로 취급받기 일쑤였다. 자연스럽게 교사는 ‘무엇을 가르치느냐’보다 ‘어떻게 가르치느냐’에 더 집중해야 했다. 교과서 없이 자녀가 학교로 가는 탓을 무책임한 학부모에게 돌리는 일은 이제는 매우 자연스러운 풍경이 됐다. ‘학교에 교과서 없이 가는 일은 전쟁터에 나가 총 없이 적과 싸우는 격’이라는 비유를 써가며 아이를 닦달하는 어른들의 잔소리는 하나의 격언으로 자리 잡았다. 무소불위의 교과서가 행사한 권력의 폐해는 그만큼 깊어 우리네 삶 곳곳을 장악하고 규정해왔다.

 

교과서 권력에 전하는 아주 오래된 경고

 

올해 초등학교는 정규 교과에 검인정 교과서가 도입돼 한창 수업에 쓰이고 있다. 이전에도 몇몇 검인정 교재가 수업에 쓰이긴 했지만, 정식 교과를 검인정이라는 틀 안에 넣게 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예체능과 영어에 국한되기는 했으나 분명 새로운 시도이다. 그러나 이런 변화의 바탕에는 반드시 그 까닭이 있게 마련이다. 20년 전, 우리에게는 신성화된 교과서를 문제시하고 비판했던 잘 드러나지 않은 역사가 있었다. 고등학교까지 교과서를 단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던 대학시절 첫 해. 나는 우연히《교과서와 이데올로기》(천지, 1988)라는 책을 만났다. 이 책은 지금껏 공부한 교과서가 얼마나 거짓과 모순으로 가득 차 있었는지 뚜렷이 보여 주었다. 사회학적인 시각에서 교과서를 재조명한 이 책은 당시 교대에서 학생운동을 하던 이들에게는 일종의 필독서였다.

 

1989년, 전교조 교사 대량 해직사태라는 큰 사건이 우리 사회를 뒤흔들면서 교육민주화의 열기는 교과서 영역으로까지 빠르게 번져가기 시작했다. 이듬해, 전교조 교과위원회는 《참교육 실현을 위한 교과서 백서》(푸른나무, 1990)를 세상에 내놓았다. 교과서 문제를 종합적이면서도 구체적으로 분석한 이 책은 전교조가 왜 참교육의 깃발을 세울 수밖에 없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큰 결과물이었다. 다분히 지배 이데올로기의 모순과 문제를 드러내는데 집중돼 있어 한계는 분명했지만, 이 책은 당시의 시대적 소명을 충분히 해냈다. 곧바로 초등에서도 《바로 서는 초등교육》(푸른나무, 1991)을 발간했다. 문제제기와 비판의 수준이 앞서 출간된 ‘교과서 백서’의 수준을 넘지 못했다는 점이 아쉽기는 했지만, 이 책은 교과서 문제를 중등 중심으로만 논의해 온 한계를 벗어나는 출발점이기도 했다.

 

2011년. 교과서를 대하는 교사들의 연구와 실천은 이전과 확연히 달라졌다. 믿지 못할 교과서를 재구성해 수업하는 교사의 노력은 점차 이념의 문제를 뛰어 넘어 아이들의 성장과 삶에 더 큰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지난 20년 동안 초등에도 자생적인 교과 모임이 생기고 교사 개개인의 실천도 상당 수준에 이르면서 이제는 현장의 요구를 담지 않고서는 정부도 함부로 정책을 추진하기 어려운 시대를 맞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일방적인 정부 정책에 타격을 줄만한 교사들의 성과물은 아직 체계적으로 정리되지 못했고 조직력은 오히려 떨어지기만 했다. 여기에 정부의 그릇된 교육과정과 교과서 정책이 겹쳐지면서 전국의 많은 학생, 교사, 학부모들은 오늘도 가르침과 배움을 그저 고통으로 여기며 감내하고 있다. 이즈음에서 어렵게 세상에 등장한 책, 《교과서를 믿지 마라!》(바다, 2011)는 새로운 돌파구를 찾은 듯 보인다. 내겐 교과서 권력에게 전하는 낡고 아주 오래된 경고로 보이지만.

 

아이들을 모르는, 아이들과 상관없는 교과서

 

총 3부로 구성된 이 책의 1부는 아이들과 어른을 바보로 만드는 초등교과서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한글을 모르고 입학한 아이와 어른을 죄인으로 만드는 1학년 국어교과서, 아이들 발달단계에 맞지 않아 아이들이 수학을 싫어하게 만드는 1학년 수학교과서, 재구성을 어렵게 해 놓은 저학년 통합교과서를 시작으로 뚜렷한 근거도 없이 세 권으로 나눠 놓은 데다 되풀이 되는 단순한 구조로 흥미만 떨어뜨리는 2학년 국어교과서, 부모들도 심지어 대학생들도 풀기 어려워 얼마 전 공중파 뉴스프로그램에도 보도됐던 2학년 수학교과서. 이런 문제들은 학년을 달리해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올해 도입된 5, 6학년 사회교과서는 더욱 가관이다. 6학년도 어려워하고 학습량이 많은 역사 영역을 5학년으로 내려놓더니, 미처 역사를 배우지 못하고 새 교과서를 받아든 6학년에게는 보충교재까지 보급해 1학기만 사회교과서가 세 권이나 됐다. 6학년은 교사들이 생활지도는 물론 수업시간과 평가에 대한 부담으로 서로 맡지 않으려 하는 학년이다. 바로 그 교사들에게 영어시간 1시간까지 덤으로 던져 주며 역사 영역에 학습 결손이 없도록 하라는 지침까지 내려 보내는 상황은 차라리 한 편의 코미디다.

 

《교과서를 믿지 마라!》는 제목은 현장 교사보다는 학부모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더 강하다. 어쩌면 교사에게 이런 제목은 진부하기까지 하다. 교과서가 바뀔 때마다 애를 먹었던 교사들은 이제 거의 체념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어차피 교과서가 해줄 몫이 없다고 여긴 많은 교사들은 내용 그대로를 전달하거나 근근이 따라오는 아이들 중심으로 수업을 끝마치곤 했다. 일부 교사들만이 교과서 밖에서 문제를 해결하려 용을 써 왔다. 이와 달리 학부모들은 달라진 교과서 때문에 힘은 드는데 대체 무엇에 문제가 있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예전과 달리 교과서가 어려워진 탓에 아이들이 더 많은 걸 배우겠다고 여기거나 자기 아이가 못 따라가는 모습에 가슴 아파할 뿐이었다. 그래서 이런 부모들을 위해 이 책 곳곳에는 저자들의 오랜 경험에 바탕을 둔 학년별 아이들의 특성과 교과별 부모도움주기 꼭지를 마련해뒀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한다. ‘부모 잘못도 아이 잘못도 아닙니다. 엉터리 교과서 때문이랍니다.’

 

2부에서는 사교육과 부진아를 조장하는 교과서의 또 다른 문제들을 지적한다. 어렵기만 한 수학교과서와 수업시간만 늘여 놓은 영어교과서 때문에 사교육에 더욱 의지할 수밖에 없는 현실은 부진아 양산이라는 그늘만 잔뜩 드리우고 있다. 제대로 된 음악실과 미술실도 없는 학교, 교구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시간만 때워 가며 아이들의 감성만 죽이는 음악과 미술교과서로 수업하는 장면을 묘사하는 데까지 이르면, 절로 한 숨이 나올 지경이다. 오늘도 수학을 배우러 영어를 배우러 악기를 배우러 그림을 배우러 학교 안팎을 전전해야 하는 아이들을 생각하면 우리나라 초등교육을 감히 의무교육이라 말하는 이들의 입을 꽉 막아버리고 싶다. 이 같은 엉터리 교과서가 만들어지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다. 되짚어 그 까닭을 찾아가다 보면 두텁고 막다른 골목에서 만나는 기분 나쁜 상대가 하나 있다. 그건 바로 교육과정이다. 그런데 이 교육과정에 큰 문제가 있다. 그건 아이들과 상관없는, 아이들을 정말 모르는 이들이 교과서를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3부는 이런 점을 확실히 해두고 싶어 한다. 저자들은 교과부에 초등교육과정과 교과서를 통괄하여 책임지고 관리하는 부서조차 없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넘어 분노한다. 한 나라의 기초·기본을 담당하는 초등교육의 교육과정과 교과서를 통괄하는 책임부서가 없다는 것은 그만큼 정부의 교육철학 자체가 없음을 반증하는 것일 뿐이다. 이는 교과서를 엉터리로 만드는 자체보다 훨씬 큰 문제이다. 이렇듯 교육철학의 부재와 무책임한 행정 속에서 초등교육과정은 초등만의 고유한 특성을 잃은 채 중등교육과정의 축소판이 돼가고 있다. 학습량은 많아지고 교과서는 어려워져만 간다. 게다가 초등학생들의 발달단계와 교과 특성을 고려하기보다 교과 간 또는 교육 내 영역 구성을 두고 학자들끼리 다툼을 벌이는 일까지도 심심치 않게 벌어지고 있다. 상황이 이쯤 되면, 초등교과서가 점점 아이들과는 동떨어진 기형적인 모습이 되어가는 건 무척이나 당연해 보인다. 곧 수술대에 오를 초등교육과정과 교과서는 이처럼 아이들을 모르는, 아이들과 상관없는 사람들 손에 또 다시 난도질당할 형편에 놓여 있다.

 

화석화된 믿음과 교과서의 운명

 

3년 전에 찾았던 프랑스 파리의 학교는 우리와 사뭇 달랐다. 그들에게 교과서는 교육과정을 이해하기 편하게 구성해 놓은 하나의 텍스트였다. 내가 본 파리학교에서는 교사나 학생 모두 교과서를 그다지 중요하게 다루지 않았다. 특히 초등학교에서는 교육과정에 따라 교사가 직접 만든 수업자료와 교구, 학습지가 수업의 전부였다. 고등학교와 중학교에서는 그나마 교과서를 볼 수 있었지만, 이마저도 교사가 준비한 수업 자료에 떠밀려 책상에서 오래 있지 못하고 내려와야 했다. 파리에 일주일을 머물면서 운이 좋게도 나는 교과서를 제작하는 프랑스의 출판사 연합관계자들을 만나는 귀한 자리에도 함께 할 수 있었다. 그 때 그들의 입에서 나온 말은 지금 생각해도 놀랍기만 하다. 교과서를 제작하는 그들의 최종 목적은 아이들마다 각각 그들에게 맞는 교과서를 손에 쥐어주는 것이라는 게 아닌가? 이 말은 한 국가의 교과서 제도가 그 나라 국민의 삶의 철학, 인간관, 그리고 교육관을 그대로 반영할 수밖에 없음을 잘 보여주는 내게는 잊지 못할 사건이었다.

 

물론, 여기까지는 어디까지나 프랑스 이야기다. 프랑스와 전혀 다른 역사와 문화, 민주주의 수준을 가진 한국의 교과서는 전혀 다른 운명을 살아가고 있다. 얼마 전, 나는 정부의 독촉과 강제에 의해 다시 개정을 해야만 하는 국어교육과정 토론회에 초대를 받았다. 짐작한 대로 발표자들 대부분은 주어진 교육과정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채 무엇을 어떻게 바꿀 것인지에 초점을 두고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심지어 모 교수의 자조 섞인 ‘갑과 을’ 발언은 참여자들의 실소까지 자아냈다. 교육과정을 구성하는 우리는 ‘을’이고 교육과정을 강제하는 정부는 ‘갑’이니 우리는 그 틀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다는 얘기였다. 한계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듣기 불편한 어느 학자의 말 속에 아이들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교과서는 하나의 텍스트일 뿐이라는 교과서관과 아이들 발달단계와 삶에 맞는 교육과정을 구성해 새로운 변화를 꾀하자는 용기는 어느 구석에도 찾을 수 없었다. 그저 체념과 복종만 있을 뿐이었다.

 

《교과서를 믿지 마라!》에서 저자들은 학부모들에게 주체적인 소비자 정신을 요구한다. 잘못되고 고장 난 교과서라는 제품을 그냥 지켜만 보지 말고 반품하고 고발하여 시정되게끔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 아이들이 좀 더 쉬운 교육 내용으로 학부모들이 부담도 더는 즐거운 공부를 할 수 있지 않겠냐 한다. 더 이상 믿지 못할 이들에게 우리 아이들의 교과서를 그냥 맡길 수만은 없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다. 맞다! 옳다! 투철한 소비자 정신으로 교과서의 문제점들을 지적해 내는 일은 좋은 교과서를 만들어 아이들과 부모들의 고충을 해결하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이와 더불어 좋은 교과서가 좋은 수업의 전제가 되고 좋은 교과서가 행복한 아이들을 낳을 거라는 믿음을 넘어서는 이야기도 이제 해야만 한다. 그래서 아이들은 각기 다르게 성장하고 능력과 흥미가 다를 수밖에 없다는 기본 철학이 사회전반으로 퍼져야만 한다. 아이들 각자의 학습 속도를 존중하는 교육관은 틀에 박힌 교과서를 자연스럽게 거부할 수밖에 없다. 교과서도 믿지 말아야겠지만, 우리 어른들 마음속 박힌 믿음들도 함께 거두어 내야 한다.

 

모든 아이들이 똑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무조건 열심히 공부하면 된다는 믿음. 그래서 어떤 아이나 똑같은 교재로 같은 시간에 준비된 교사에게 수업을 받으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 부모와 학생 98% 이상이 전문대 이상을 나와야 비로소 사람 노릇할 수 있다는 믿음. 우리가 진정 거부하고 바로 잡아야 할 것은 어쩌면 엉터리 교과서가 아니라 어른들 머릿속에 단단히 굳어져 화석화돼버린 이런 믿음일지도 모른다. 《교실혁명》(리좀, 2005)의 페에 치쉬는 모든 교과서는 운명적인 성격을 띠고 있고, 아이들의 지식을 무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했다. 이미 결정돼 있는 운명과도 같은 교과서에 더 이상 우리 아이들을 맡겨 둘 수는 없다. 아이들이 가진 지식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낡은 지식으로 가득 찬 권력화 된 교과서에 기댈 수도 없다. 이러한 평범한 진리를 혜안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우리는 교과서에 덧씌운 절대 권력부터 거두어 내야 한다. 교과서 권력에 기댄 경쟁 이데올로기와 입시 제도를 끝장내지 않고서는 우리는 단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